메인화면으로
백승욱 서평에 답함, 덩샤오핑 체제와 덩샤오핑 이후는 다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백승욱 서평에 답함, 덩샤오핑 체제와 덩샤오핑 이후는 다르다

[기고] 덩샤오핑 시대를 이해하는 길

<프레시안>에 실린 백승욱 교수의 서평은 2017년 새해의 반가운 선물이었다. 학자에게 자신이 쓴 책은 긴 산고 끝에 낳은 자식과 같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4년의 노력 끝에 '세 쌍둥이'(<덩샤오핑 시대의 중국>(민음사 펴냄) 3부작)를 출산했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반대로 자기가 낳은 자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뿐만 아니라 애정 어린 관심으로 더욱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현재 내 심정이 그렇다. 특히 백 교수가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제주도로 휴양을 떠나면서도 내 책을 가지고 가서 꼼꼼히 읽고 장문의 서평을 썼다는 사실에 나는 백 교수의 깊은 우정과 진정한 학자의 풍모를 느낀다.

1990년대 중후반 서울대학교 사회대학에는 중국을 공부하는 예닐곱 명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의 전공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 제각각이었지만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만은 모두 한결 같았다. 그 무렵 중국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들이 미국으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들은 끝까지 서울대에 남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부는 유학 갈 능력이 안 되고 조건도 갖추지 못해서, 일부는 '우리의 중국 공부'를 하겠다는 아집으로 그렇게 했다.

한국에 돈 벌러 온 조선족 동포를 중국어 선생님으로 모시고 함께 중국어를 공부했다. 한 학기에 한두 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중국 공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함께 중국에 가는 날이면 낮에는 '베이징의 나무꾼'이 되어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저녁에는 허름한 음식점에 모여 못다 한 중국 공부 이야기를 이어갔다. 끝까지 중국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힘들고 지칠 때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렇게 해서 일군의 중국 연구자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중앙대 사회학과의 백승욱 교수를 포함하여 성공회대 디지털콘텐츠학과의 전현택 교수, 인천대 중어중국학과의 안치영 교수, 전북대 지리교육과의 이강원 교수, 한국금융연구원의 지만수 연구위원,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문순철 연구위원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이들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경북대 사회학과의 이동진 교수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의 장정아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공부했다. 그밖에도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대에는 중국을 공부하던 몇 명의 대학원 학생이 더 있었다.

나도 지난 20여 년 동안 이들과 함께 하는 행운을 누렸다. 되돌아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그나마 학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의 따뜻한 가르침과 함께 이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똥고집'을 빼고 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백승욱 교수는 탁월한 외국어 실력(중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문)에 치밀한 이론까지 갖춘 공부의 팔방미인이었고, 안치영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중국 문헌자료 전문가였다. 그래서 백 교수와 안 교수는 내가 연구 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도와주고 가르쳐주었다. 이번 서평도 백 교수가 나를 학문적으로 도와주기 위한 배려에서 쓴 것일 게다. 서평에 답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한다.

서평에 대한 답글(rejoinder)에는 대개 두 가지가 들어간다. 하나는 서평자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반박(반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서평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명이다. 이 답글은 주로 뒤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백 교수의 서평에는 내 책의 주요 주장을 비판한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백 교수의 과도한 칭찬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대신 백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 다시 말해 내 책이 마땅히 다루어야 하는데 다루지 않아서 부족함을 느꼈던 내용을 주로 지적했다. 후에 내가 책을 수정 보완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제기한 일종의 제안이다.

참고로 내가 어떤 배경에서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을 쓰게 되었는지,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중점을 둔 내용이 무엇인지, 이 책이 나의 다른 연구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균 차이나 브리프> 통권 42호(2017년 1월)의 '저자노트'에서 설명했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저자노트'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쓰지는 않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쓴 '저자노트'는 백 교수의 서평처럼 그렇게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아 독자들이 재미있게 금방 읽을 수 있다.

중국의 성공 요인 분석

먼저 백 교수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3부작이 "개혁 개방 시기의 통사(通史)"라기보다는 "덩샤오핑 시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국가정책"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도 이 3부작을 개혁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포괄하는 통사로 쓸 생각은 없었다. 정치학자로서 정치적 관점에서 개혁기를 분석했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정치'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책의 내용을 보면, 1권 '개혁과 개방'의 제1부가 농촌 개혁, 경제특구, 도시 개혁을 분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정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3부작이 개혁기에 벌어진 공산당의 권력투쟁과 국가정책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한 책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중국 정치를 연구하면서 가졌던 질문, 즉 '중국은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쓴 것이다. 책을 집필하기 전 오랜 연구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이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시에 독자들이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의 내용을 재구성했다.

이런 이유로 이 3부작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을 분석했는지를 이해하려면 1권 '개혁과 개방'의 1장에 나오는 분석틀에 주목해야 한다. 분석틀이 없다면 이 책은 개혁기의 정치 변화를 서술한 역사서에 머물 것이다. 이 점에서 분석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백 교수는 이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분석틀을 중시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내용이나 적절성에 동의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백 교수는 내가 왜 어떤 항목은 중시한 반면 어떤 항목은 무시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주장, 즉 '중국은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했을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중국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에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개혁 개방을 결정하고 지도했던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다. 이런 정치 리더십의 핵심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다. 둘째는 이들이 결정한 개혁 개방을 현실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던 유능한 당정간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정치제도다. 셋째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맞추어 수립한 개혁 개방의 전략과 정책이다. 북한도 이런 세 가지의 요소를 갖춘다면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의 성공 요소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체제가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만들어졌다. 공산당 개혁과 엘리트 정치의 변화, 정치제도의 정비와 발전, 국민의 정치참여 확대와 통제, 통치 이념의 개혁과 새로운 정책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런 정치개혁이 어떻게 추진되었고, 그것이 세 가지의 성공 요소가 형성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이처럼 이 3부작은 특정한 관점에서 중국의 성공 요인을 찾으려고 덩샤오핑 시대를 살펴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분석틀을 기억하고 이를 가이드로 삼아 책을 읽는다면 중국이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하면서 덩샤오핑 체제는 민간사상 배척을 공고히 했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해명

이어서 백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로 네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 첫째, 문화대혁명(문혁) 시기(1966-1976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없다. 특히 1957년의 '반우파 투쟁', 문혁의 '혈통론(血統論)', 인민해방군의 정치개입, '삼종인(三種人) 청산'은 모두 개혁기 중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해야 했는데, 이 3부작은 이를 소홀히 했다. 둘째, 개혁 개방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부족하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난 '양극화의 심화, 부패, 집단소요 사건(群體性事件)'의 뿌리는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에 있고, 따라서 이를 분석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셋째, '놀라울 정도로' 노동 영역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덩샤오핑 시기에는 농촌 개혁뿐 아니라 기업개혁도 있었고, 그 결과로 노동조건의 악화와 실업, '단위(單位) 체제'의 해체, 농민공(農民工)의 대량 이주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 3부작은 이를 분석하지 않았다. 넷째, 중국 공산당 내에서 진행된 개혁 논의뿐 아니라 민간사상(이단사상)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데, 이 책은 이를 소홀히 했다.

먼저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이 문혁과 그것이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하겠다. 백 교수의 지적처럼 문혁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만큼 문혁의 영향은 광범위하고 깊었다. 아니 영향 여부와 상관없이 문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10년 동안 국민을 혁명의 광풍에 몰아넣었던 정치운동은 인류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는 선구적으로 이에 주목하여 다른 학자들과 함께 문혁을 연구했다.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문화대혁명 시기의 기억을 중심으로>(폴리테이아 펴냄),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살림 펴냄),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펴냄)는 그 결과물이다. 이 중 세 번째 책은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대만에서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참고로 문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백 교수의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100쪽이 안 되는 짧은 문고판 책이지만 문혁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이 대부분 다 들어 있다. 만약 문혁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은 독자라면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그린비 펴냄)을 권한다. 책은 조금 두껍지만 내용도 충실하고 번역도 훌륭하다.

문혁이 이처럼 중요한데 내가 3부작에서 이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일차적으로 책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와 관련된 기술적인(technical) 이유 때문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은 말 그대로 '덩샤오핑 시대'에 벌어졌던 각종 정치현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연구의 초점을 유지하려는 것이 첫째 이유고, 이 책이 '옛날을 회상하는 신파조 영화'로 전락하지 않도록, 다시 말해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것이 둘째 이유다. 대신 마오쩌둥 시기에 있었던 사건이나 내용 중에서 개혁기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예를 들어, 1980년에 추진된 공산당의 당내 민주 개혁을 설명하기 위해 공산당사에서 '민주 집중제'(民主集中制)가 언제 등장하여 어떤 굴곡을 겪으면서 발전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핵심 기구인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서기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공산당 12차 당대회(1982년)와 13차 당대회(1987년)에 있었던 공산당 개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톈안먼 시위(1976년), 베이징의 봄(1978-1981년), 학생운동(1986-1987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1989년)을 주도했던 학생과 노동자들의 사상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서구 사상의 유입과 확산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마오쩌둥 시기의 민간사상(이단사상)에 대해서는 미국학자들도 연구했지만, 첸리췬(錢理群) 교수가 훌륭한 연구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나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첸 교수의 연구를 많이 참고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 기록>(길정행·신동순·안영은 옮김, 그린비 펴냄),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하)(연광석 옮김, 한울 펴냄), <내 정신의 자서전: 나에게 묻는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를 읽을 수 있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2, 3권(조영남 지음,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성' 인식 문제

그런데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이 문혁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학술 용어로 말하면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인식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는 곧 역사의 시기 구분 문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개혁기의 중국을 마오쩌둥 시기와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기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단절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뒤의 관점을 선택했다. 그것이 개혁기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는 이런 관점이 필요하다. 물론 역사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한 개인의 삶도 그렇고 한 사회의 변화도 그렇고, 현재는 과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중국 현대사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년), 덩샤오핑 시대(1977-1993년),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1994-2012년)가 바로 그것이다. 각 시대는 직면한 과제, 통치 집단의 성격, 추진한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별도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논의가 필요하다. 장쩌민 시기(1994-2002년)와 후진타오 시기(2002-2012년)를 하나로 묶어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시기가 직면한 과제(뒤에서 설명), 통치 집단의 성격(기술관료), 추진한 정책(개혁 개방의 확대)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두 시기는 덩샤오핑 시대의 연장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나는 이를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라고 부른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사회주의 건설'이 중심 과제였다. 공산당 일당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와 생산수단의 국유화(집단화),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주도한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세대'는 혁명적인 방식과 정책을 통해 이런 과제를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반우파 투쟁(1957년), 대약진 운동(1958-1960년), 문화대혁명(1966-1976년) 등의 중요한 사건은 그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런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덩샤오핑 시대와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이와 다르다. 1권 '개혁과 개방'에서 언급했듯이, 덩 시대에 중국이 직면한 과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민생 문제의 해결과 경제 발전이다. 둘째는 역사 청산과 사회 통합이다. 셋째는 권력 분배와 정치 회복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를 놓고 덩샤오핑 세력과 화궈펑 세력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덩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덩 세력은 '혁명원로'가 주축이 된 혁명세대로서, 통치 집단의 성격 면에서는 마오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정책은 마오 시대와 완전히 달랐다. 그것이 바로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개혁 개방이다. 이후 덩 세력은 다시 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후야오방과 자오쯔양)와 천윈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혁명원로 대부분)로 분화되어 치열하게 경쟁했다.

반면 1994년 장쩌민이 권력을 공고히 한 후 시작된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다른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시장제도의 전면적인 도입과 대외 개방의 확대다. 1992년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당론으로 확정되면서 시장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동시에 국유기업의 개혁, 금융기구의 정비, 국가 계획부서의 폐지와 정비, 유통체제의 개혁 등 개혁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가입을 목표로 하는 대외 개방도 더욱 확대되었다.

둘째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이는 첫 번째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문제로, 노동자의 지위 저하와 실업, 삼농(三農: 농업·농민·농촌) 문제의 심화와 대규모 이농민(농민공)의 발생, 연해지역과 내륙지역 간 지역격차의 확대, 계층 간 빈부격차의 확대(소위 양극화 현상), 부패의 전면화가 바로 그것이다. 장쩌민 체제와 후진타오 체제는 경제발전과 함께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고, 실제로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셋째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응하는 문제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미·소 양극체제가 붕괴되고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가 수립되었다. 그 결과 중국이 소련을 대신하여 미국의 주된 견제 대상이 되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시작된 서방국가의 중국 제재에 이어, 1990년대 초에는 중국위협론이 등장하여 중국을 위협세력으로 규정했다. 또한 냉전체제의 해체와 함께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응해야만 했다. 1987년 시작된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 경향의 강화, 1997년 반환된 홍콩의 분리 움직임도 거센 도전이었다.

넷째는 통치이념의 정비다. 국내적으로는 톈안먼 사건과 빈부격차의 확대,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 이념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럴 경우 공산당 일당독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혁명이념에서 ‘발전이념’으로 수정하여 공산당 일당체제를 정당화했다. 또한 공산당 주도의 경제발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중국식으로는 애국주의)와 유가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런 통치이념의 정비 과정에서 공산당과 지식인 간에, 또한 지식인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 간에 격렬한 사상논쟁이 전개되었다.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를 이끌었던 통치 집단은 기술관료(technocrats) 출신의 지도자로 구성되었다. 이 점에서 이 시대는 마오쩌둥 시대나 덩샤오핑 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이들은 혁명간부 출신의 혁명세대 지도자와 달리 대학에서 이공계를 전공한 후에 전문기술직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제발전과 국가건설에 필요한 전문성을 갖추었고, 실무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이들이 1990년대에 중국이 당면한 과제, 특히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그 결과 중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의 내용

마지막으로 백 교수가 제기했던 둘째(개혁 개방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 부족), 셋째(노동 영역의 연구 부족), 넷째(민간사상의 분석 부족) 문제에 대해 해명하겠다. 백 교수의 이런 지적은 모두 타당하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책이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 혹은 1980년대에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현재 준비 중인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일부러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백 교수의 말처럼 이런 문제의 기원은 1980년대(덩샤오핑 시대)지만, 이런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덩샤오핑 이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 교수는 내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을 준비 중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새 책에 담길 내용도 당연히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백 교수의 지적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맙다.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이 무엇을 눈여겨보아야 하는지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은 매우 어려운 사회문제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부패 문제는 1980년대에도 국민의 불만 사항이었지만, 그것이 전 사회로 확산되어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에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래서 이를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다루려는 것이다. 부패 문제를 깊이 연구한 페이(Minxin Pei)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 중국은 비록 공산당 일당제의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했지만 경제발전에 매진하여 국민의 삶을 향상시킨 업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이 한국의 박정희 정부나 대만의 장제스 정부와 비슷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혹은 개발독재의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은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강탈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석유와 천연자원을 독점하여 막대한 통치자금을 확보하고, 그렇게 확보한 통치자금으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장기 독재체제를 유지했던 아프리카의 많은 자원부국이 바로 약탈국가의 전형인데, 중국도 그렇게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벌어지는 당정간부의 무자비한 농민 수탈, 도시 지역에서 벌어지는 강제 철거와 개발사업, 정경유착을 통한 대규모 밀수와 막대한 국유재산의 유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이것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발전했다고 페이 교수는 주장한다(Minxin Pei, China’s Trapped Transi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ei, China’s Crony Capit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페이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1990년대에 들어 부패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문제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에 들어 국유기업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노동자의 지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노동자의 주거와 복지를 담당했던 단위 체제가 해체되면서 노동문제는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백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상세하게 잘 분석했다(백승욱, <중국의 노동자와 노동 정책: ‘단위 체제’의 해체>(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가 1990년대 중후반에 들어 급속히 확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문제를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다.

농민공 문제도 비슷하다. 농민의 도시 진출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시점은 1989년 무렵이지만, 그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고, 이들에 대한 착취가 심해지면서 사회문제로 부각된 때는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 특히 도시민과 농민을 법적으로 구분하고, 도시에 진출한 농민을 2등 국민으로 간주하여 합법적으로 착취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방조했던 호구제도(戶口制度)가 개혁되지 않으면서 농민공 착취는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디지털대학교의 이민자 교수가 상세하게 잘 분석했다(<중국 호구제도와 인구이동>(폴리테이아 펴냄), <중국 농민공과 국가-사회관계>(나남 펴냄)). 그래서 이 문제도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다루려고 한다.

그밖에 민간사상에 관한 논의도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자세히 검토할 예정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사상 논쟁은 비교적 단순했다. 즉 논쟁의 대립 전선이 주로 공산당(국가)과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 간에 형성되었다. 이런 지식인들은 1919년 5·4운동 이래 형성된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 전통과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도입하자고, 특히 민주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사항(四項) 기본원칙', 즉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사회주의의 길 고수로 대응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와 정부의 유혈 진압은 이들 간의 충돌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반면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에서는 공산당과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 간의 대립 전선뿐 아니라,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 간의 대립 전선도 형성되었다. 말 그대로 '민간사상'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는 1980년대의 계몽주의 운동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성을 기반으로, 19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가 다양한 성향의 집단으로 분화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여기서 보수주의는 국수주의의 성격을 띠는 민족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옹호하는 구좌파,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신좌파, 국가(특히 중앙 정부)의 강화를 주장하는 국가주의(statism), 유가사상의 부흥을 주장하는 문화 보수주의를 가리킨다.

▲ 덩샤오핑 시대 중국 체제는 이전은 물론, 이후 체제와도 다르다. ⓒ민음사 제공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자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어수선하다. 정치 리더십이 실종된 지 오래되었고, 새로 등장할 정치 지도자가 우리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이는 특정 지도자나 정치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른 길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힘 있게 집행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중국과 일본 등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것 같다. 그래서 혹자는 현재를 '초불확실성(hyper-uncertainty)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가 발전하며, 주변이 평화로울 때에는 공부가 절실하지 않다. 큰 고민 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공부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세계의 변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가슴과 머리를 함께 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단순한 생존을 넘어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도모할 수 있다.

중국 공부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중국만큼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간간이 배운 중국사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중국 지식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여행간 것을 가지고 중국의 실상을 직접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누적 인원으로 몇 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단기 혹은 중장기로 중국에서 유학하면서 '중국을 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는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한 착각일 뿐이다. 중국에서 10년을 산 사람은 중국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많은 수의 한국 사람처럼 말이다. 낮은 수준에서는 익숙한 것이 곧 아는 것이지만, 높은 수준에서는 양자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처럼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국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제라도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국은 더 이상 아무렇게나 이해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자는 공부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학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을 집필할 때도 그랬고, 지금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학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반성한다. 중국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초심(初心)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는 초심을 잃지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노력해온 것 같다. 내 책은 이런 반성과 발버둥의 산물이다. 백 교수가 내 책을 평가하면서 "피와 땀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성과물"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내 책이 우리 사회가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에는 옛 친구들과 함께 뜨거운 충칭 훠궈(火鍋) 국물에 술 한 잔 하면서 중국 공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