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가 되길 기도했던 화가가 있다. 나는 그 화가를 만나고 싶었다.
이 화가가 그림을 그릴 당시 아무도 화가 박수근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불우한 질곡의 시대를 산 화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는 우리가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화가가 되었다.
<박수근>.
그 가난한 화가가 어린시절을 보낸 화가의 마을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21일 일요일 아침. 그가 태어난 마을 강원도 영서 북부 펀치볼로도 유명한 양구 정림리로 가는 길은 오랜만에 중국에서 오는 미세먼지가 덮인 뿌연 하늘을 몰아내고 도화지에 하늘색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화가의 마을. 마을 이름마저 ‘박수근로’가 된 마을.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정림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서울을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국내에서 가장 길다는 5.91km의 배후령터널이 보였다.
이 터널이 뚫리면서 서울에서 박수근 마을로 가는 길은 30여 분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배후령 터널을 지나 2만7천평의 넓은 대지에 지은 박수근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미술관 앞 마을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담벼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낙서같은 소박한 그림들이 반갑다.
그 담장을 따라 올라가다 입구 커피점에서 커피 한 잔을 샀다.
박수근이 사는 마을은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가 많아서인지 휴일 관람객 대부분이 이곳 부대에 아들을 보낸 가족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 틈에 끼여 박수근이 어린시절 살았던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지은 박수근 미술관 1관을 구경했다.
1관은 박수근 그림을 닮은 투박해 보이는 화강암 같은 돌을 벽으로 쌓아 작은 마치 산성을 보는 느낌이다.
서양의 물감인 유화를 갖고 색을 칠하고 다시 깎고, 다시 그 위에 다른 색을 덕지덕지 겹쳐 발라 우둘두둘한 돌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은 멀리서보면 화강암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착시현상을 갖게 한다.
내 키보다 높은 돌로 두른 벽을 돌아 다리를 건너자 박수근이 처음 아내를 만났다는 빨래터가 나왔다. 그가 그린 ‘빨래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주로 갈색과 어두운 색을 많이 썼는데도 하얀 옷을 즐겨 입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빨래터에 앉아 빨래하는 모습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었던 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세탁기가 있어 엄마들이 ‘빨래’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이때 빨래터는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빨래터 옆에는 창신동 집 마루바닥에 무릎을 접고 두 손을 맞잡고 앉아 찍은 낡은 사진 속의 모습으로 1관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이제 어린 시절 밀레를 꿈꾸며 그림을 그렸던 그 집 대신 한국의 밀레가 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2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관은 회색 벽으로 둘러 쌓였다. 꼭 내 어릴 적 본 담벽 높은 회색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은 음침한 공장 뒷골목을 닮았다.
2관에서는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한 황재형 작가의 삶이 배어있는 사북 탄광촌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내 고향 별어곡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면 나오는 사북역. 그곳에 살며 지금은 카지노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검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다닥다닥 붙은 광부사택의 풍경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니 어릴 적 사북역 기억이 반갑다.
사북역은 내가 태어난 별어곡역에서 두 정거장 거리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더 반가웠던 것이다.
서울에서 박수근미술관으로 내려오면서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있는 ‘사북’을 다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사북은 그런 ‘검은 우산’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카지노와 호텔 콘도 여기에다 스키장까지 건설하며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닮아가고 있다.
화가 황재영의 그림처럼 열심히 노동을 통해 하루를 살던 사북사람들의 모습과 달리 지금 사북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김유정의 ‘금따는 콩밭’의 주인공 영식이 친구 수재의 꾐에 빠져 콩밭에서 금을 캐려다 빚만 지고 아내와 도주한 그런 사람들의 슬픔이 사북 카지노 가는 전당포에는 사회적 문제로 남아있다.
그의 작품 전시를 보며 나는 청밀밭이 반기는 3관으로 갔다. 작은 바다처럼 바람에 드러눕는 청밀밭길은 미술관의 또다른 자연이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밀밭보다는 청보리밭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박수근이 살던 가난한 그 때는 청보리밭이 대부분 이었기 때문이디.
2관을 나와 3관으로 가는 길은 여름날씨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1관이나 2관보다 3관이 청밀밭길이 있어서 더 싱싱한 생명을 느낄수 있어 가장 마음에 들었다.
1관은 돌벽이 주는 투박하면서도 박수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2관은 멀리서 보면 공장 뒷골목 같은데 안은 도시의 정원 같다.
이에 비해 3관은 박수근이 좋아했던 밀레 그림 속 ‘만종’의 사람들이 빵을 만들 밀들을 심어놓고 들판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풍성한 마을사람들이 지은 미래의 공동창고처럼 보였다.
박수근이 어릴 적 살았던 정림리 생가마을. 나즈막한 산 밑, 청밀밭이 있는 ‘박수근미술관’ 3관 입구의 벤취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의 어린시절은 저 청밀밭에 심은 밀로 만든 밥처럼 가난했지만 동화 ‘책읽는루브르’ 의 주인공 소년처럼 그림을 그리다 저 밀밭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는 밀밭대신 청보리밭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아 있는 그의 기록처럼 소년 박수근은 청보리밭에 앉아 밀레를 닮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쥐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을 그의 밀레 꿈을 청밀밭을 보며 생각했다.
그 가난한 소년이 그린 동생을 업고 엄마를 기다리는 가난했던 그때 ‘아기를 업은 소녀’, ‘빨래터’ 등등..그의 그림은 이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가난한 양구소년으로 자라며 미술학교를 나오지도 못하고 양구의 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가 그린 그림들이 당시 미술하는 사람들의 눈과 달리 21세기를 사는 사람들 눈에는 가장 창의적이고 소장하고 싶은 그림이 되었다.
이는 어리석은 과거 우리사회가 보지 못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가방에서 가져온 소설 한 권을 폈다.
박완서의 ‘나목’이다.
어느새 낡아버린 이 소설책 속에서 나는 박완서가 말하고 싶은 화가 박수근을 생각했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편견을 깨준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서 나목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벌거벗은 나무를 말한다, 그 나목은 박수근 자신이었으리라.
전쟁이라는 상처가 남긴 미군 PX(매점)의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경은 옥희도 유작 전시회에서 예전에 보았던 ‘고목’이 아닌 '나목'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그 나목의 내용이 담긴 줄거리를 다시 청밀밭에 앉아 읽으며, 청밀밭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뺨으로 맞았다. 시리면서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화가 박수근은 고독하고 삭막한 사막 같은 사회에서 더 이상 꽃잎을 틔우지 못하는 고목이 아닌 언젠가 새로운 잎을 틔우고 꽃이 필 날을 기다리는 나목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저물 녁. 밭에 뿌린 씨앗이 자라 얻은 곡식에 감사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밀레처럼 말이다.
저문 미술관을 나오는 청밀밭 사이. 잠시 후면 켜질 전봇대의 가로등 사이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툇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 보던 그 낡은 사진의 박수근의 얼굴이 구름처럼 지나간다.
점점 작아져 가는 미술관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그가 태어난 곳에 지은 2만7천 평에 지은 너른 집. 그 집을 우리는 가난했지만 겸손하게 꿈을 만들었던 박수근 화가의 순수한 마음과 이름처럼 낮고 겸손하게 지키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밀레를 꿈꾸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꿈이 되는 미술관으로 오래오래 남길 기대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 마음의 화가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가장 한국적인 화가는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를 꼽았던 나였다.
그러나 이제 또 한 명의 화가를 내 마음 속에 올려놓는다. 청밀밭이 아닌 청보리밭에 앉아 밀레를 꿈꾸던 가난한 화가 박수근. 미술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요즘 미술을 하는 사람들처럼 학사는 고사하고 석박사도 없지만 그는 한국의 밀레이다.
비록 서양의 유화물감으로 그렸지만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을 그 다음으로 손꼽으며 그가 어릴 적 놀았을 마을 앞강을 보았다. 백로들이 한 무리를 지어 놀고 있다.
백로들이 쪼아 먹고 있는 맑은 물은 춘천으로 가는 북한강으로 흘러들어 내가 가고 있고, 그가 마지막 삶을 살던 가난한 서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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