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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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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야기

광양출신 매천 황현선생의 생애와 학문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이 40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이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광복절노래 마지막 구절입니다.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민족은 36년동안 우리 글도 못쓰고 우리 말도 못하면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린 소녀들을강제로 끌어다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고 남자들은 징용으로 징병으로 강제로 글고가서강제 노역을 시키고 또 총알받이를 만들었습니다.인권을 탄압했고 살림살이를 강제로 수탈해갔습니다.

해방된지 70년이 지났지만 위안부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채 일본정부는 사과는 커녕 반성도 않고 있으며 독도를 자기네 땅 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사과는 못 받아낼 망정 우리손으로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일본이 과거에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한국이 발전했다는등 허무맹낭한 사실들을 교과서에 등재하여 역사를 왜곡하는데 정부가 앞장섰으니 이게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고 우리나라 장관 맞습니까? 정권이 바꾸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우리스스로 거짓 역사교과서를 마들어 후손들에게 가르칠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복절이고 또 지금이 무궁화가 만발한 계절이니 무궁화 꽃 이야기를 하렵니다.

1.개관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나라꽃 입니다.무궁화는 아욱과에 딸린 낙엽관목으로 종류는 2백여종이나 됩니다.
원산지별로는 한국무궁화, 미국무궁화, 하와이무궁화 등으로 나뉘며 계통별로는 단심계, 아사달계, 배달계로 구분됩니다.

무궁화는 가지가 많고 가지에는 잔털이 많은데 털은 자라면서 없어집니다. 잎은 어긋나면서 자라고 달걀형이며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꽃은 7ㅡ10월에 걸쳐 가지 끝과 그에 가까이 잎겨드랑이에 한송이식 핍니다. 꽃의 색깔은 분홍색이지만희색등 다양한 색깔이 개량되고 있습니다.

무궁화는 4월초에 잎이 피기시작해서 6월중순이면 꽃망울을 맺는데 꽃이 피는 시기가 한 나무가 약100일이나 됩니다. 그러기에 ‘피고지고 또 피는 무궁화’라고 노래했습니다. 꽃송이도 한 나무에 작게는 5백 송이에서 많게는 2천 송이까지 핀답니다.

나라꽃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전역에 고루 퍼져있습니다. 꽃이 호화롭거나 향기가 나는 꽃은 아니지만 아름답고 피는 기간도 길어서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받아서 꾸준히 뻗어나가는 우리 민족과 비슷합니다. 무궁화는 꽃잎이 깨끗하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붉게 빛납니다.

이것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깨끗한 마음이요 충성과 절개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민족성을 그대로 나타내느 것입니다. 중국의 나라꽃은 매화요 일본의 나라꽃은 벚꽃이랍니다.

2.무궁화의 유래
끊임없이 피고지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근면성과 백의민족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궁억선생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무궁화를 통해 반일 감정을 일으키려 하였으므로 일제는 무궁화 꽃마저 탄압하고 베버리고 그 자리에 아까시나 망초를 심었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산해경에는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우리 겨레와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해온 꽃이라 적고 있습니다.

3.나라꽃 제정의 배경
*1896년11월에 서대문에 독립문을 설치하기위해 땅을 파고 주춧돌을 놓는 행사장에서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무궁화삼천리)
*1948년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애국가가 국가로 제정되면서 다음해에무궁화도 국화로 지정되어 보급하였습니다.
*학명은 Rose of sharon 인데 sharon은 성경에서 성스러운 뜻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것은 1949년이지만 실제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이 된 것은 이미 수 천년전의 일입니다.

매, 난, 국, 죽등 사군자도 있고 봄에 일찍피는 개나리와 진달래도 있지만 왜 무궁화를 택한 것일까?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토양에 맞는 꽃이며 원산지가 우리나라이며 전국적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자생해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궁화는 천, 지, 인 삼재와 음양오행의 형상을 두루 갖춘 꽃 입니다. 원줄기에서부터 끝까지 한마디에 세 갈래씩 갈라져나가는 천 지 인 삼재를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잎사귀와 다섯장의 꽃잎은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뜻합니다.

무궁화는 품종에 따라 여러 색갈이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은 흰색의 꽃잎에 화심 입술이 붉은색이 자리잡은 단심무궁화가 손꼽히고 있습니다. 가운데는 붉고 가장자리가 흰점은 빛의 음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늘의 신을 뜻하는 색입니다.

무궁화는 빛의 광명민족인 한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듯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며 태양처럼 새롭게 가장 오래피는 꽃입니다.

무궁화는 날마다 이른 새벽 태양의 광명과 함께 피어나 새로피고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가질 무렵 태양빛과 함께 그날 핀 꽃이 떨어집니다. 무궁화는 태양과 일맥상통하며 태양과 운명을 같이하는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과 함께 내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피어 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일 동안 핍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은나무는 20여송이 큰 나무는 50여송이의 꽃이 피므로 백일동안 2천송이 ~ 5천송이의 꽃이 피게 됩니다.

무궁화는 질 때에 송이가6 꼭지채 빠지므로 뒤가 지저분하지 않습니다. 무궁화는 향기도 없으며 화려하지도 않고 요염하지도 않습니다. 순결한 영혼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 민족은 무궁화의 이름처럼 무궁한 태극혼의 정신을 이어받은 한민족의 후손들입니다.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이고 단점은 병벌레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진드기가 많아서 지저분하기 때문에 나라꽃을 개나리나 진달래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아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단점보다 장점이 많고 또 단점은 보완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온 우리꽃 무궁화를 더욱 사랑하고 아껴야하겠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광복절에 무궁화꽃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고향 광양출신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梅泉黃玹선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2001년에 구례교육장 발령을 받고 구례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어느날 매천황현선생추모회로부터 매천선생추모제를 지내니 참석해 달라는 공문을 받고 이상한 일이다. 매천선생은 광양출신인데 어떻게 구례에서 추모제를 지낸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님으로부터 매천선생은 경술년 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왜적에게 빼앗겼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지금까지 들은바도 없었고 아는바도 없었는데 구례에 와서 추모제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추모제는 광의면에 있는 매천선생 사당에서 지내는데 구례의 각기관장과 유지들은 물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온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열기로 조그만 구례고을이 가득찰 정도였습니다.

종헌관이되어 제복을 입고 잔을 올리면서 죄송합니다. “광양출신인데 구례에서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고 죄송스럽습니다^”하고 속으로 속죄를 드렸습니다.
이 때부터 매천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매천선생의 출생
1855년12월11일5 철종6년에 광양현 봉강면 석촌리(지금의광양읍석사리)에서 장수황씨 황시묵과 풍천노씨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백운산 도솔봉 줄기가 뻗어내려 文德峰을 이루고 있어 언젠가는 학문에 이름을 떨칠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종대왕때 정승을 지낸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황진의 후손입니다.

인조반정으로 가문이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시골의 가난한 유생으로 살았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서 호남에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왕석보를 만나 그의 휘하에서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32세 되던해 겨울에 광양에서 구례로 이사를 했다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생할고로 인해 처가가 있는 마을로 이사를 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2.매천의 학문
매천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유학과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문임을 알고 20세 이후에는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특히 실학파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으며 경세치용의 연암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아쉬워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의서적도 탐독하였는데 목민심서, 흠흠신서, 선제고등은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했습니다. 황현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부패한 정치사상이 성리학과 제도정치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3.저술활동
34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지만 당시 과거제도의 폐해를 목격하고 느낀바가 있어 낙향하여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처사형 선비로서 학문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16년간 살면서 많은 시를 짓고 매천야록 오하기문등을 저술하였습니다. 매천야록은 19세기후반 대원군5 집권기부터1910년 일제찬탈기가지를 기록한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의 역사기록이며 오하기문은 자신이 보고들은 동학혁명에 관한 기술입니다.

4.후진양성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이 자결하자 매천선생은 五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습니다. 특히 민영환을 추모하는 ‘血竹’이라는 시를 써서 추모하고 일제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은데 앞장선 대신들을 꾸짖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신학문을 배워 인재를 양성시키기 위해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 투합하여 1907년에서 1908년까지 의연금을 수집하여 구례군광의면 지천리에 壺陽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5.殉國하시다.
경술년인 1910년7 월29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자 絶命詩를 남기고 1910년8월7일 음독 자결하니 그의 나이56세였습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나는 벼슬길에 있지 않으니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백년간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상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하지 않는가? 위로는 황천이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절명시는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새와 짐승도 갯가에서 슬피우는데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는가?’하는 글로 보아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되기 훨신 전인 조선시대임에도 우리나라를 무궁화나라로 표현 하였슴을 볼 수 있습니다.

구례에는 매천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매천사당이 있고 해마다 추모제가 열리고 있으며 이제는 매천예술제를 해마다 개최한다고 합니다.

동백곷꽃이야기에서 밝혔듯이 도선국사는 신라말에 고려 송악의 왕륭집에 가서 집터를 잡아주면서 ‘아들이 삼한을 통일핳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도선국사는 풍수지리학의 시조입니다. 이분이 천하길지를 찾아 방방곡곡을 주유하다가 광양 백운산아래 백계산에다 옥룡사를7 창건하고 여기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조선후기의 최산두선생은 천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운산아래 학사대에서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의정부 사인벼슬을 지냈습니다.

매천선생은 34세에 구례로 이사를 갔지만 광양의 문덕봉아래서 공부를 하고 꿈을키웟던 광양사람입니다.

이처럼 훌륭한 조상들을 배출했지만 오늘날 그분들의 정신은 광양에 살아있지 못합니다. 광양에서는 일직부터 가난에서 벗어나기위해 밤, 매화, 등의 생산에 힘써 광양밤, 광양매화가 전국에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훌륭한 조상들을 가졌음에도 광양문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하동에서는 박경리선생이 쓴 ‘토지’라는 대하소설에 나오는 최참판댁을 만들어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면서 토지의 주인공인 길산과 서희가 실제인물인양 착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성에서도 소설속에 나오는 홍길동 마을을 만들었고 곡성에서는 심청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광양에서는 어떠합니까? 광양출신 매천황현선생의 영혼은 구례에서 활돟하고 있고 광양동교와 광양중학교 광양실고를 졸업한 동화작가 고 저채봉 작가의 영혼은 순천만정원에 살아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위한 소득증대도 좋지만 문화도 살아야 고장이 빛나고 후손들이 정기를 받게 됩니다.

다른 지방처럼 소설속의 허구의 인물을 내세울 필요도 없고 다른 지방의 인물을 슬쩍 빌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고장이 낳은 인물만 밝히고 그 얼을 본받는다해도 충분할 것이니 도선국사의 옥룡사를 재건하고 학사대를 정비하며 황현선생의 생가를 정비하고 공원화해서 교육의 장으로 삼는다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밀려들고 후손들도 조상의 빛난얼을 본받을 수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1917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나의 꽃 이야기는 나라꽃 무궁화 이야기를 하였고 곁들여서 내고향 광양출신 매천 황현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의 맑고 빛나는 선비정신과 애국충절을 본받고자 합니다. 광복절을 맞아 석 송 정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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