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 영화계의 눈과 귀는 모두 이날 첫 시사회를 가졌던 〈태풍〉에 집중됐다.
〈태풍〉은 150억 원이라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큰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다. 150억 원이라는 제작비는 배우와 스탭 개런티와 촬영 경비 등을 포함하는 순수한 제작비다. 영화를 홍보하고 배급하기 위한 비용까지 합하면 〈태풍〉의 덩치는 200억 원 가까이로 불어나게 될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120억 원, 〈실미도〉는 60억 원의 순제작비를 들였다. 따라서 〈태풍〉은 개봉 규모에서도 역대 최대가 될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충무로의 이목이 〈태풍〉에 모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 한국영화계의 모든 시계는 〈태풍〉이 개봉되는 12월 14일에 맞춰져 있다.
***블록버스터 한 편의 제작비는 멜로영화의 5배**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한국영화계는 때아닌 '멜로 훈풍'의 시절을 보냈다. 〈너는 내 운명〉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시작된 멜로 훈풍은 작품마다 관객수에서 기복이 있긴 했어도 〈사랑니〉와 〈새드무비〉, 〈소년, 천국에 가다〉와 〈광식이 동생 광태〉까지 3개월 여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멜로 영화들의 순제작비는 평균 30억 원 정도다. 〈너는 내 운명〉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 대여섯 편의 순제작비를 모두 합하면 대략 150여 억 원이 된다는 계산이다. 결국 〈태풍〉 한 편의 제작비가 웬만한 멜로 영화 여러 편의 제작비와 맞먹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한 편 제작비의 5분의 1 수준인 멜로 영화들이 만들어낸 훈풍은 사실 태풍급이었다. 〈너는 내 운명〉은 300만 명을 넘겼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도 200만 명을 넘겼다. 〈광식이 동생 광태〉는 개봉 첫 주에만 전국에서 1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새드무비〉와 〈소년, 천국에 가다〉도 선전했다. 어림잡아도 3개월 동안 일련의 멜로 훈풍이 불러모은 관객수는 600만 명을 넘어선다. 100억 원짜리 영화들이 고작 수십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퇴출됐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훨씬 더 내실 있는 장사를 했던 셈이다.
***블록버스터 〈태풍〉의 공습**
그런데, 이런 멜로 훈풍이 불어오기 전 충무로는 엄동설한이었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득세했었다. 한국영화가 사상 최악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는 기사가 각종 매체를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블록버스터들의 잇단 흥행참패가 원인이었다. 2004년 말과 2005년 초 개봉한 〈역도산〉과 〈남극일기〉는 여느 영화의 두세 배 제작비를 쏟아 붇고도 각각 전국 100만 명을 넘기는 데 그쳤다. 〈말아톤〉 같은 뜻밖의 흥행작이 있긴 했지만 〈달콤한 인생〉이나 〈주먹이 운다〉처럼 만만치 않은 제작비를 들인 작품들마저 흥행면에서 기대치를 크게 밑돌면서 위기론이 팽배해졌다. 그 같은 위기론은 언론이 1000만 관객과 함께 시작됐던 2004년 상반기와 2005년을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블록버스터와 평균 규모 영화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모습은 거의 매년 한국영화가 치르고 있는 홍역이긴 하다. 충무로가 경험한 최악의 한 해로 기억되는 2002년의 침체를 불러왔던 것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아유레디?〉 같은 블록버스터였다. 그리고 그 위기를 희석시킨 건 2003년 연이어 개봉됐던 〈살인의 추억〉이나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같은 작고 야무진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2004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마 영화들이 1000만 관객을 모으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들은 한국영화산업이 지난 수년 동안 작은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훈풍과 블록버스터가 빚어내는 태풍의 흥행 주기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한국영화는 야무지고 작은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역량을 갖췄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에서는 불안한 구석이 아직 많다. 지난 수년 동안 시장의 상승세가 마지막 도약의 단계에서 블록버스터의 침몰과 함께 퇴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얘기다. 반면 그런 주기적인 흐름이 상승세의 절정에 오른 건 2004년 상반기 단 한 차례뿐이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충무로는 멜로 훈풍으로 충분히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제 〈태풍〉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충무로가 다시 한번 블록버스터 흥행 주기의 절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얘기다.
***충무로가 블록버스터에 집착하는 이유**
사실 한국영화는 아직 100억 원이 넘는 블록버스터를 안정적으로 소화할 역량과 시장을 온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국영화시장에서 매주 평균 2편 정도의 신작 한국영화가 개봉한다고 봤을 때 매주 시장에 뿌려지는 판돈은 60억 원 정도다. 블록버스터는 그 판돈을 많게는 세 배까지 늘려놓는 셈이다. 엄밀히 말해 제작비가 늘어난다는 건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 시나리오의 구성에 모두 큰 족쇄가 채워진다는 의미다.
제작비 150억 원의 손익분기점은 600만 명 정도다. 한국영화시장에서 600만 명을 모으기 위해서는 10대 학생과 20대 대학생, 30대 직장인과 40대 넥타이 부대까지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의 주제가 남녀노소 모두를 끌어 들일 수 있을 만큼 보편 타당해야 하고, 이야기의 화법은 단순해져야 하며, 감독의 연출은 과장돼야 하고, 배우의 연기는 눈물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너무 단순하거나 너무 거대하기만 한 영화가 되기 일쑤다. 그건 할리우드도 경험하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한국영화는 그러한 블록버스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원초적인 한국인의 정서인 분단 이데올로기를 건드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건드려야 한다는 게 문제다. 관객의 입맛에 맞추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무로가 블록버스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흔히 블록버스터는 크게 걸어서 크게 먹는 도박의 논리로 설명된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는 오히려 주도 면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충무로의 산업화 과정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건 한국 영화산업이 메이저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누가 얼마나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고, 어떤 영화가 얼마만큼의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느냐를 놓고 벌이는 영화판의 배급 전쟁은 결국 누가 얼마나 센 영화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따라서 메이저 배급사의 입장에서 보면 덩치가 큰 작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시장을 놓고 벌이는 영토 확보전에서 밀리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 해 블록버스터를 몇 편 개봉하느냐에 따라 배급사나 투자사의 힘이 결정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영화들은 블록버스터가 등장하는 시기를 피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 일정을 맞춘다. 제작 일정들도 변경된다. 블록버스터를 제작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성공한 블록버스터는 해외 시장까지 내다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블록버스터는 도박이 아니라 사업이 되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산업 재편을 가속화하는 블록버스터**
하지만 개별 영화사가 아니라 한국영화산업 전체에 과연 블록버스터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충무로는 지금까지 블록버스터에서 너무나 많은 쓴맛을 봐 왔다. 작은 규모의 내실 있는 영화들이 만들어낸 상승세가 기 100억 원짜리 대작들의 침몰로 꺾여버린 경우가 많았다. 블록버스터는 한국영화 시장의 파이를 확대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내상도 입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업 논리로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블록버스터가 메이저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의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블록버스터는 필연적으로 위기론을 불러오는 측면도 있다. 실패했을 때는 당연히 위기론과 한국영화의 구조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성토대회가 열린다. 성공했을 때도 너무 큰 성공 직후의 진공 상태가 위기론으로 옮겨간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런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었다.
최근 충무로에서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왜곡된 부율을 고치려는 제작자들의 노력은 이미 시작됐다. 그건 지난 여름의 한국영화 위기론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다. 올 겨울의 블록버스터 전쟁에서 만약 사상자가 생겨난다면 그런 논란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블록버스터의 성패와 한국영화의 위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30억 원 규모의 영화들이 즐비하게 범작들만 양산하면서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건 위기의 징후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는 메이저 배급사들끼리의 사업 논리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런 비즈니스가 때론 한국영화시장에 찬물을 끼얹기도 하고 기름을 붇기도 해 왔다. 블록버스터는 시장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호재지만 결국 한국영화계 전체에는 순기능만큼이나 역기능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태풍〉에는 이미 〈친구〉로 전국 800만 관객을 동원한 적이 있는 곽경택 감독과 〈태극기 휘날리며〉로 1000만 명을 모았던 장동건이 있다. 그리고 〈태풍〉 다음에는 〈청연〉이 기다리고 있다. 역시 2년이 넘는 제작 기간이 소요된 대작이다. 제작비만 95억 원이다. 그 다음엔 100억 원대의 제작비가 투자됐다는 한국-홍콩 합작 멜로물 〈데이지〉가 대기 중이다.
〈태풍〉과 〈청연〉과 〈데이지〉가 지나간 뒤 그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또다시 산업적인 갑론을박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늘 그렇지만 갑론을박은 종종 짜증나는 일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많다. 〈태풍〉의 개봉에 영화계의 눈과 귀가 집중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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