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분쟁이나 장기화된 갈등을 겪는 당사자가 물리적 폭력을 중단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을 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쟁 당사자 간의 대화와 합의를 통해 어렵게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갈등은 재발할 수 있고, 합의 파기로 상황이 역진(逆進)함으로 인해 평화가 구축되지 못하는 데 있다. 즉 종이(paper)에서의 서명이 평화(peace)를 담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많은 평화 연구자와 운동가들은 분쟁 그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평화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방법과 평화협정을 실질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조건에 눈을 돌려왔다. 비교평화연구회가 기획 출간한 <분쟁의 평화적 전환과 한반도>는 특별히 공동체 혹은 국가 간의 장기분쟁(protracted conflict) 혹은 고질적 분쟁(intractable conflict)이 어떻게 평화적으로 전환이 되는지, 그리고 그 방법과 요인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비교평화연구의 이론과 방법, 2부는 내전 이후 평화구축, 3부는 국제전 이후 평화구축을 다양한 전공자들의 시선으로 조망한다. 이 책의 특징은 평화에 대한 접근과 가치에 대한 논의나 개별 분쟁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비교연구방법'을 통해 국가와 사회 내의 오랜 갈등이 어떻게 평화의 여정으로 나아가는지 혹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장기간의 내전과 국제 간 분쟁 이후의 평화구축 과정과 방식이 국가와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점을 주목한다. 1994년 약 80만 명이 사망하는 집단학살을 경험한 르완다는 '아루샤 평화협정(Arusha Peace Accords)'으로 인해 내전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 국가 재건 및 사회통합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이의 잔혹한 전쟁과 폭력이 '테이튼 협정(Dayton Agreement)'을 통해 종식되었고, 콜롬비아 정부 역시 50여 년 이상 지속된 정부군과 반정부 무장혁명군(FARC)과의 갈등이 평화협정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지만, 여기서 관심은 왜 이 땅들의 평화가 여전히 불안정한가에 있다.
70년 이상 지속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이 왜 평화협정 체결로도 극복되지 못하고 장기분쟁이 되고 있는지,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리는 에리트레아가 어떻게 에티오피아와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 냈는지에 대해 치밀하게 답을 찾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국가 중심의 정치집단 간 타협의 결과로 평화가 이행되는 위로부터의 접근 방식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아래로부터의 평화구축을 함께 조망한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와 평화교육이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상흔을 어떻게 치유하였는지, 르완다의 창의적이고 전통적인 화해 메커니즘이 사회통합과 평화구축 작업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파고든다.
이 책의 저자들은 평화협정 이후의 화해 협력, 피해자 보상과 치유, 합의 내용 준수를 통한 평화구축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냉철하게 지적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례들은 평화협정의 체결과 좌초가 반복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협상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리고 장기 분쟁의 종식과 평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과 노력이 있을 때, 분쟁의 평화적 전환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이 장기화 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70년 가까운 정전체제가 지속되면서도 남북이 공존하고, 거기에 북핵문제가 가중된 기묘한 반(半)평화·반(半)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 혹은 최소한의 평화(ostensible peace)만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은 평화협정 체결을 넘어 평화구축의 도정에서 우리가 살피고 주목해야 할 다양한 시사점과 교훈을 제공한다.
그런 시사점에는 지속가능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 분쟁을 확실하게 종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협정이 주요 방법이지만 그것이 역진하지 않기 위해서는 분쟁 당사자들의 이해를 균형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또 그런 전제 위에 인간의 존엄과 분쟁당사자들 사이의 상호 존중, 과거 상처에 대한 공동 인정과 화해,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향한 공동 노력이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보장해줄 것이다.
특히 분쟁당사자들이 맺은 합의가 이행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한 사례연구는 한반도 평화구축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분쟁평화 사례를 통해 한반도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안내해 주는 훌륭한 내비게이터(navigator)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 연구자는 물론 한반도 평화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의 일독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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