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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나도 그들에 대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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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나도 그들에 대해 배웠다

[한국어교원, 교단 너머 이야기] ③ 교실이라는 작은 우주, 그 안의 기적

지난 5월 스승의날을 맞아 직장갑질119와 온라인노조 한국어교원지부가 '교단 너머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한국어교원 수기 공모전을 열었다. 수기에는 외국인이 한국을 접하며 처음 만나는 선생님이자 초단기 계약과 공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한국어교원들이 겪는 고충, 그리고 애환이 담겼다. 세 편의 수상작을 최우수상 한 편과 우수상 두 편 순으로 싣는다. 편집자

"선생님, 한국어는 진짜로 왜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을 마친 뒤였다. 아직 환기가 덜 된 교실 안엔 따뜻한 햇살이 창가에 걸려 있었고, 학생 하나가 책상을 정리하다 말고 나에게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 학생의 손엔 낡은 한국어 수업 노트가 들려 있었고, 그 사이사이엔 손때 묻은 낱말 카드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몇 장은 테이프로 붙여놓기까지 했더라.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힌 걸 보니, 한국어라는 낯선 언어와 오늘도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중국어는 배우기 쉬울까?"

학생은 잠깐 멈칫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솔직히…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가끔 중국어 단어 중에 처음 보는 게 있어요. 그런데 한국어는… 뭔가 더 무서워요. 조사 하나만 잘못 써도 전혀 다른 뜻이 되잖아요. 단어도 무섭게(?) 생긴 게 많고요!"

그 말에 교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나도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이 학생에게 한국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었다. 매일 도전해야 하는 거대한 미로 같았고, 익숙해지기 어려운 외국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너희들은 선생님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 겁먹지 마. 너희가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선생님도 그 덕분에 매일 중국에 대해, 배움의 진심에 대해 배우고 있거든."

학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럼 우리,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하는 전사들이네요?"

나는 손을 들어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그 속에는 언어를 넘어선 따뜻한 연대감이 있었다.

후난성 창사. 중국 화중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나에게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두 번째 고향'이다. 2017년 9월,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정식 한국어 강사로 강단에 섰다. 그때의 떨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교탁 앞에 선 나는, 눈앞의 학생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숨조차 조심스럽게 쉬었다.

그 학기의 수업 중 하나는 'K-드라마로 배우는 한국어'였고, 교재는 '이태원 클라쓰'였다. 박새로이의 고집과 신념, 그의 말투와 감정을 따라가며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어의 억양과 문장을 익혔다.

"선생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표현 진짜 너무 멋져요!"

학생 하나가 환호하듯 외쳤고, 그 말은 곧 우리 반의 별명이 되었다. 서로를 '찰떡 조'라 부르며 우리는 점점 말보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짝을 지어 각자 역할극을 준비하고, K-드라마 속 장면을 재연하며 한국어를 익히는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속이 터지다'는 표현이 진짜 속이 터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비슷해. 누군가 답답하거나 너무 화가 날 때, 속이 터질 것 같다고 하거든. 근데 지금 너처럼 질문하는 거 보면, 나는 속이 뻥 뚫린 기분이야." 교실 안엔 웃음과 함께, 낯선 언어를 받아들이는 진심어린 자세가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던 교실에 유난히 당당한 목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저 오늘 숙제 못 했어요! 하지만 이유는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왜 못 했는데?"

학생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꿈에 김치찌개가 나왔는데요, 너무 맛있어 보여서 제가 그 안에 빠졌어요. 계속 먹다 보니 숙제를 깜빡했어요."

교실은 그야말로 폭소의 현장이었다. 옆 친구는 "그건 진짜 김치찌개스러운 변명이다!"라고 받아쳤고,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그 열정적인 꿈에 면죄부 한 장! 하지만 다음엔 김치찌개한테 지지 마." 그날 이후 우리 반에는 '김치찌개 면죄부'라는 전설이 생겼고,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아이, 종현. 그는 늘 앞자리에 앉아 질문을 퍼붓던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한국 가면 사람들이 저 이상하게 볼까요?"

알고 보니 그는 한쪽 귀에 청각장애가 있어 발음이 조금 어눌했다. 자신의 한국어가 '다르게' 들릴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종현, 네 목소리가 다르게 들려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야. 진심은 목소리보다 더 멀리 가니까."

그날 이후 종현은 발음보단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결국 말하기 대회에서 반 대표로 무대에 섰다. 무대를 내려와 눈가를 훔치던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뜨겁게 성장한 한 사람의 증거였다.

그와 함께 했던 어느 수업 시간. 종현이 발표를 끝내고 나서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자 그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 한국어 진짜 잘하고 싶어요. 왜냐면…. 말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의 하늘은 유독 맑았고, 교실 안은 마치 투명한 유리병 속에 있는 듯, 온기가 가득했다.

물론 모든 날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한 번은 명절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 학생이 날카롭게 물었다. "왜 한국 사람은 나이로 사람을 나눠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칠판을 조용히 지우며 말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한국에선 오랫동안 나이, 예절 같은 것이 중요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바뀌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게 더 소중한 거예요."

그날 이후 '궁금한 것 뭐든지 묻는 시간'이 생겼고, 학생들은 더욱 자유롭게 질문했다. "선생님, 왜 한국 사람은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셔요?" "한국 연예인들은 진짜 밥 안 먹어요?"

나는 매번 혼신을 다해 대답했다. 어느새 수업은 한국어 수업이 아닌, 살아 있는 한국문화 탐험기가 되어 있었다.

학기 말 시기가 되면 우리반 학생들은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전달하는 소중한 문화가 있는데, 몇몇 학생들이 나를 위해 쓴 편지를 꺼내 읽을 때마다 큰 감동을 하곤 한다. "선생님 덕분에 한국이 좋아졌어요." "언젠가 한국에서 다시 만나요."

이 순간마다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가르친 건 한국어 단어와 문법이 아니라, '용기'와 '가능성'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의 진심이 나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었음을.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작은 우주, 교실에 선다. PPT를 열 번 넘게 고치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수업 준비를 하더라도, 이 자리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자리다. 이렇게 매일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나는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어 강사이자, 교육노동자다. 누군가는 이 일을 '알바'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일이 얼마나 큰 책임과 열정을 요구하는지. 수업 하나에 온 마음을 쏟고, 학생 한 명의 표정에 밤잠을 설치는 것이 이 일의 본질이라는 것을.

특히 나의 경우에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해외에서 시작한 사례다. 물리적으로 낯선 땅에서 살며, 정서적으로도 때때로 깊은 외로움과 마주하곤 한다. 가족의 생일도, 명절도 멀리서 바라볼 뿐이고, 내가 있는 대학의 경우 한국인 강사가 나 혼자인 탓에, 동료 없이 혼자 부딪혀야 하는 각종 행정 업무와, 현지인과의 문화적 간극 사이에서 매일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럼에도 매일 교실 문을 열고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이 일을 사랑하게 된다. 나의 외로움은 학생들의 웃음으로 채워지고, 나의 고단함은 그들의 성취로 보상받는다.

그러나 나와 같은 미래의 무수한 해외 근무 한국어 강사들을 위해 시정되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어 강사로서의 삶은 때로 외롭고, 고단하며, 처우는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불안정한 계약과 낮은 사회적 인식, 그리고 제도적 보호조차 거의 미비한 상황이 한국어 강사로 살아온 지난 7~8년의 기간 동안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믿는다. 이 일이 나를 지치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 매 수업마다 쏟아지는 열정, 그리고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가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해준다.

나의 이름 앞에 붙은 '한국어 교사'라는 말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이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해외 한국어 강사의 삶을 존중해주고, 우리의 노동이 더 따뜻하게 대우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준 우리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너희들이 있어서 선생님은 오늘도 이 교실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기적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만들어가고 있단다. 그리고 그 기적 속에, 오늘도 나는 서 있다.

▲ 한글날을 하루 앞둔 2024년 10월 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열린 제30회 외국인 한글백일장에 참가한 외국인이 글짓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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