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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창] 대전, 광복을 향한 발걸음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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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창] 대전, 광복을 향한 발걸음을 기억하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걷다, 그날의 함성을 오늘에 새기다

▲ 광복절의 뿌리가 된 3·1운동 정신을 기리는 인동만세운동터의 기념 벽화. 태극기 물결 속에 담긴 자유와 독립의 염원이 전해진다. ⓒ프레시안(문상윤)

광복절은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되찾은 날과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1949년 10월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제정됐다.

이날은 중앙과 지방에서 경축행사가 열리고 전국의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며 경축의 뜻을 표한다.

정부는 경축연회를 열어 각계 인사와 외교사절을 초청하고 광복회원과 그 가족에게는 철도·버스 무임승차, 고궁 및 공원 무료입장 등 다양한 우대조치가 제공된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후세에 전하는 날이다.

그렇다면 대전은 이 광복절의 의미를 어떻게 간직해 왔을까. 대전 곳곳에는 여전히 독립운동의 흔적이 살아 숨 쉰다. 대전형무소, 인동시장, 유성장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지, 이곳들은 모두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증거다.

▲ 대전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현재는 망루와 우물만 남아있다. ⓒ프레시안(문상윤)

1919년 3·1운동 이후 수감자가 급증하자 설립된 대전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안창호, 여운형 선생 등이 이곳에 수감됐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는 민간인 희생의 아픈 역사가 더해졌다. 현재는 망루와 우물만이 남아 있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묵직한 역사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1919년 3월16일, 대전 인동시장과 유성장터에는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인동시장에서는 지역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고 유성장터에서는 이상수·이권수 형제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당시의 열기는 오늘날 재현 행사와 기념비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인동시장 만세운동터를 찾은 유성 배씨(여, 46세)는 “이 자리에 서니 100여 년 전의 뜨거운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광복은 하루아침에 온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름 없이 싸운 분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걸 느껴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이 역사를 알려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전 중구 문화동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와 동상이 있다. 그는 조선상고사와 독사신론을 집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무장투쟁과 사상운동 모두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전 시민들에게 단재는 지금도 자부심의 상징이다.

대전 출신 독립운동가는 현재까지 37명으로 기록된다. 이들의 활동은 지역 저항사의 한 축을 이루며, 매년 광복절마다 이름을 불러 기억하는 행사가 이어진다.

대전의 독립운동 현장을 따라 걷다 보면 100년 전 거리에서 울려 퍼졌을 태극기 물결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날의 함성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실천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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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세종충청취재본부 문상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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