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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론 대가가 '트럼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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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론 대가가 '트럼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프레시안 books] 주디스 버틀러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gender?)"라는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의 최고 권위자인 주디스 버틀러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버클리) 교수의 물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답변했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 전국 대학 내 '반유대주의 대응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UC 버클리는 지난 11일(현지시간) 160명의 학생, 교직원 및 교수진 명단을 교육부 민권국에 보냈다고 밝혔고, 이 명단에 버틀러 교수(이하 직함 생략)도 포함됐다. 버틀러는 유대인이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대한 팔레스타인 지지 활동을 이유로 수십개 대학을 상대로 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고, 이를 명분 삼아 대학의 지원금을 삭감하고 유학생들을 탄압하는 등 학문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버틀러는 지난 15일 '데모크라시 나우'와 인터뷰(바로 가기)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반유대주의 혐의가 정치적 발언을 억압하고 가자지구 학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며 과거 매카시즘에 비유했다. 버틀러는 "나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지만 외국인 유학생이나 강사들은 이를 계기로 구금, 추방 또는 퇴학을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의, 자유, 평등에서 젠더의 중요성을 옹호하는 일은 곧 검열과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 연대하는 일이다"라는 버틀러 주장의 정당성은 트럼프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다.

"'국가의 이익'은 기본적 자유의 말살을 통해, 바로 여성과 트랜스인 사람들과 퀴어한 사람들, 더 확장된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교육자와 학자, 정책 입안자와 정치인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의 말살을 통해 확대된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국가의 이익을 증대하고 우선시한다는 것은 신흥 권위주의를 설명하는 또다른 방법이며, 이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위험의 터전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아이들을 해칠 수 있는 위협으로 묘사하는 수사법에 의존한다."

보수 세력과 독재 권력의 무기가 된 반젠더 이데올로기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 이후 35년 만에 낸 젠더 이론서인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주디스 버틀러 지음, 윤조원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2017년 브라질에서 있었던 극우 시위가 계기가 된 책이다. 2017년 11월 상파울루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행사장 앞에 모인 군중들은 "마녀를 불태워라!" 등을 외치며 솜인형을 불태우는 '버틀러 화형식'을 벌였다. 버틀러가 참석한 이 세미나의 주제는 '민주주의의 종말'이었다고 한다. 버틀러는 이 책을 통해 젠더에 대한 실체 없는 공포가 어떻게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어떤 삶들이 파괴되는지 생생한 사례와 깊이 있는 통찰로 보여준다.

버틀러는 젠더를 공격하는 세력을 크게 종교 집단, 극우 정치 세력, 그리고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TERF)로 분류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논리로 젠더를 혐오하지만, 공통적으로 '세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막연한 확신을 공유한다. 그 중심에는 기독교 세력과 극우 정치가 있다. 로마가톨릭 교황청과 우파 복음주의 교회는 '신이 정해둔 남자와 여자의 이원성'을 위협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를 맹비난하며 교육 과정에서의 검열을 주장한다.

정치권에서는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그리고 한국 윤석열 전 대통령까지 젠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다. 이들은 저출산의 원인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거나, 동성애를 공산주의 혁명에 비유하며,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젠더는 이들의 입에서 '에볼라 바이러스', '핵전쟁', '소아성애'에 비유되며 내밀한 불안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도구가 된다.

버틀러는 이러한 현상을 '판타즘(phantas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판타즘은 실체 없는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효력을 발생시켜 현실처럼 작동한다. 경제적 불안정, 기후 위기 등 진짜 위협은 외면한 채, 젠더라는 허상을 만들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신흥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정상 가족'과 '전통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이주민, 난민, 젠더소수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침해한다.

또 버틀러는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의 논리가 본의 아니게 우익의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은 언제나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면서 "차별에 동참하는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며, 페미니즘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한다.

신 권위주의에 맞서는 진정한 연대를 위하여

버틀러는 이처럼 젠더에 대한 공격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고 진단한다. 젠더 교육에 대한 검열은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정체성 형성을 막고, '정상 가족' 모델을 고집하는 법적·사회적 규범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박탈한다. 젠더를 '국가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특정 집단을 향한 대중의 지지를 강화하고, 진짜 사회문제인 경제적 불평등, 기후 위기 등을 은폐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대'를 강조한다.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반젠더 세력의 논리적 허점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움직이고 숨쉬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트럼프, 보우소나루, 오르반, 멜로니, 에르도안 같은 인물이 보여주는, 면책특권을 누리며 뻔뻔하게 구는 행태는 20세기의 이른바 카리스마적 파시스트와는 확연히 다르다. 가족, 국가, 기타 가부장적 제도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죽음을 초래하고 권리를 박탁하는 이 시대의 파시즘적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되는 여러 유형의 권위주의를 뒷받침한다. 그렇기 때문에 '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논바이너리·젠더퀴어인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는 반동 세력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서로 다를 지라도, 우리는 억압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고, 경청과 도서를 통해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이론을 시험하고, 각자의 전통적인 전제들에 대한 도전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반대하는 파괴의 악순환을 내부적 반목으로 반복하지 않도록 동맹을 구축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차이들을 넘어서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주디스 버틀러 지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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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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