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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광장에 넘쳐난 무지개, 그냥 만들어진 건 아니에요"

[X세대가 만난 광장의 MZ]⑦ 권순부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 사무국장

지난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 뭐였을까. 광장을 이전과는 분명 다르다고 느끼게끔 한 것들 말이다. '빛의 혁명'이라는 수식어를 탄생시킨 응원봉, 색색의 깃발, 전에 비해 훨씬 많이 보인다고 느껴졌던 청년 여성, 그리고 곳곳에 휘날리던 무지개. 다른 이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중에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단언컨대 무지개였다.

무지개 상징을 처음 본 게 언제였던가. 대학생 때, 아님 20대 후반 새내기 기자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위험하리만큼 이질감이 느껴지던, 한없이 낯설고 조심스럽던 20여 년 전의 6색 무지개. 그땐 그게 무엇인지 누군가 설명해줘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아하,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광장에 온통 넘실대는 무지개를 보며 이제 다시 생각해본다. 그때 그 무지개 깃발을 든 사람이 낸 용기는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는 얼마나 떨리고, 두렵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이제 성소수자는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무지개가 다 성소수자는 아니고 통칭 퀴어 앨라이(Queer Ally,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퀴어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로 불리는 무지개 동지들을 포함한 것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던 정체성 고백 발언과 광장을 끝까지 지키던 그들의 모습은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한자성어를 떠올리게 한다. 2, 30년이라는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에 말이다.

지난 2일 서울 공덕동에 새 둥지를 튼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이하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순부 씨는 이런 흐름과 관련해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잘 설명해주었다. 그는 단체 활동가이자 이번 광장에서 활발히 활동한 청년 세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가기 전엔 몰랐는데, 인터뷰 당일 새 '무지개행동' 사무실은 문을 연 지 겨우 2주 남짓 된 상태였다. 새 집기와 모든 것이 잘 정돈된 깔끔한 공간은 새로 시작하는 이들의 설렘과 기대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공간은 지난 광장의 성과와 무관하지 않은 곳이다.

▲지난 2일 공덕동에 위치한 새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권순부 씨. ⓒ임은경

광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감 보여준 '무지개존' 활동

"무지개행동은 2007년 '성소수자차별저지 긴급행동'에서 출발했어요. 당시 참여정부 법무부가 차별 금지 법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재계와 종교계에서 강하게 반대했죠. 특히 종교계가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관련 부분을 문제 삼자, 법무부가 그것들을 삭제한 수정안을 냈어요. 그러면 그 삭제된 항목은 차별해도 된다는 역설적인 효과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당시 시민사회에서 이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일어났고, 그걸 계기로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이 2008년 5월 17일에 출범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BIT)'이기도 하다. <무지개행동>은 매년 5월 아이다호 기념대회를 집회 형식으로 여는 한편, 학술 연구자와 활동가가 모여 토론하는 '성소수자 인권 포럼'을 해마다 개최했다. 선거나 국정감사 등 현안에 대응하고, 정치인의 혐오 발언에 대한 규탄 집회나 기자회견 등을 개최하며 단체들의 허브 센터 역할을 해왔다. 그동안 상근자나 사무실 없이 회원 단체들에서 조금씩 품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돼온 <무지개행동>이 사무실을 마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윤석열 퇴진 집회 기간에 저희는 광화문 맞은편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에서 무지개존을 운영했어요. 무지개행동 큰 깃발을 중심으로 각 단체 회원들과 개인 기수들이 각자의 무지개 깃발을 들고 모였죠. 12월에는 여의도 공원에서 두 차례 무지개존을 열었고요. 그때는 워낙 100만 명이 운집한 상황이어서 급하게 제안했는데, 막상 약속 장소에 가니 정말 많은 분들이 와 있었어요. 그렇게 모인 무지개 깃발들이 참 인상적이었다는 평도 많이 들었죠."

무지개존은 광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현장에 나오는 서로를 지지하는 역할을 하자는 목표로 운영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내부적으로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고, 외부에 대해서는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성소수자를 동료 시민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광장에서만큼은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삭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도 컸다. 성소수자는 언제나 광장에 있었는데, 광장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제되고 외면받기 일쑤였다고 순부 씨는 말했다. 이번 광장에서도 집회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시민들의 발언을 듣고 광장의 무지개들을 다 봤을 텐데, 지금 정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성소수자의 삶을 존중하는 모습이 안 보이지 않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소수자 배려한 광장 + 억눌린 분노 = 무지개 물결로 이어져

"성소수자와 무지개가 이번 광장에 왜 이렇게 폭발적으로 많았느냐고요? 제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12월 5일쯤, 이번 광장의 거의 첫 성소수자 공개 무대 발언이었던 것 같은데요. 자신의 실명을 드러낸 그분이 '발언 사실이 학교나 일터에 알려지면 어떨지 너무 두렵지만, 윤석열 씨가 계속 대통령을 하는 세상이 백배 천배 두렵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고 말했는데, 시민들이 따뜻한 환대와 응원으로 화답해주더라고요."

이번 광장에서는 처음부터 평등 수칙이 특히 강조됐고, 그것이 4월 파면 시까지 광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같은 노력은 광장이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성소수자 시민들이 조금 더 안심하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고 순부 씨는 설명했다.

또 다른 이유는 성소수자들이 그동안 시민으로서 권리가 많이 부인되고 박탈되어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정치적인 욕구가 컸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그나마 성소수자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에 노골적으로 반인권 인사를 자행했다. 위원장과 일부 상임위원은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 등에 대해 혐오 발언을 쏟아냈고, 수십 년 동안 인권위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시민사회의 노력을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사실 성소수자 인권 문제 관련 정책은 민주당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박근혜 퇴진 광장에서도 시민의 힘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 출마했는데, 인권 변호사 출신인 그가 대선 토론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발언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느낀 배신감과 위기의식이 있었죠.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충분한 의석과 정치적 역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 입법에 나서지 않았잖아요."

이뿐 아니라 성소수자 통계를 내지 않고, 정책을 세우지 않으며,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등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거대 양당 모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순부 씨는 지적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성소수자가 혼인도 하고 입양도 하며 기본적인 인권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 하나 20년째 못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가 그저 지지자를 모으는 수단으로 소수자를 희생양 삼거나 더 나아가 혐오 발언을 일삼는 모습을 무력감 또는 분노로 지켜보던 소수자들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순간이 왔을 때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것이 지난 광장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성소수자 단체 등에 속한 활동가보다 이전에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인 성소수자들이 나온 경우가 훨씬 많았죠. 이번 광장에는 정말 많았어요. 8년 전 박근혜 퇴진 광장에서는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고 발언한 사람들이 다 저희가 아는 분들이었거든요. 어디 단체 활동가, 어디 회원 이런 경우였죠.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수백, 수천 명이 발언에 나섰잖아요. 이건 그냥 우연히 생겨난 일이 아니에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그간의 노력과 우리를 동료로 받아 안은 시민사회의 문화 등이 쌓여서 가능했던 일이죠."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지난 4월 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행한 24시간 철야 집중행동 무대에 올라 발언한 권순부 씨. ⓒ 무지개행동

혐오 공격 심했던 지난 10여 년, 시민사회와 연대하며 헤쳐와

내가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무대 발언을 했던 성소수자가 총 두 명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이 이토록 큰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건 그냥 생긴 일이 아닐 것이다. 순부 씨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지난 10여 년 동안 전에 없이 폭력적인 공격과 차별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미니즘이 부상하자 그에 대한 백래시가 심했던 것처럼,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성장하자 반대 세력의 움직임도 커진 것이다.

"돌아보면 무지개행동과 회원 단체들이 똘똘 뭉쳐서 그 시절을 헤쳐온 것 같아요. 날마다 규탄하고, 날마다 대응하면서. 민주개혁 세력을 자임하는 민주당 정부조차 의식적으로 우리를 외면했고, 90년대부터 교세가 꾸준히 줄어온 보수 개신교는 내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예전에 소위 '빨갱이' 사냥하듯 성소수자를 외부의 적으로 삼아 공격했어요. 심지어 육군에서 성소수자 군인을 색출한다고 나섰던 사건도 있었고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우리가 버텨낸 힘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연대였어요."

배제되고 차별받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노력했고, 그런 노력이 일정 부분 시민들에게 가 닿아서 이번 광장의 성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활동이 없었다면, 그래서 자신들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면 성소수자 개인들이 그렇게 광장에 나올 수 있었을까. 시민사회 운동에 연대를 확장하는 등 성소수자 커뮤니티 외부에 대해서도 손을 내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여정을 더 단단하게 해준 과정이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 저희도 '퀴어버스'를 운행했고, 쌍용자동차 투쟁할 때는 평택 공장에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의 합창단이 가서 연대 공연도 했죠. 그 뒤 2015년인가에 서울역 앞에서 열린 아이다호 행사에 금속노조 조합원 형님들이 오셔서 답가를 불러주셨어요. 이밖에도 장애인 인권운동, 여성 운동 등 다양한 부문의 운동과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관계를 넓혀왔고, 이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역동적인 사회운동 세력으로 어느 정도 자리하게 됐다고 봐요."

운동과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사회적 자산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기득권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가진 것 없는 약자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곁에 있는 동료들, 사람뿐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게 기꺼이 손 내미는 것이 곧 자신들의 인권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터득했고,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 저변을 확장해온 것이다.

약자들의 연대는 이번 광장에서 특히 빛났다. 초기부터 광장의 다수를 차지하며 눈에 띄었던 여성과 소수자의 모습이 그랬고, 농민과 소수자가 함께 굳건한 경찰 차벽을 뚫어낸 남태령 투쟁이 그랬으며, 정권 퇴진 구호에 그치지 않고 온갖 투쟁사업장에 부지런히 연대한 말벌 동지들이 그랬다. 윤석열 정권에서 특히 억압받던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손잡고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집회를 매주 개최한 것도 이번 광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약자들의 연대는 이번 광장의 키워드였고, 광장의 정신이었다.

"이번 광장의 성소수자 활동은 드러난 것 못지않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서도 많았어요. 이름 없는 무명의 헌신이었죠. 무지개를 든 집회 참가자들 말고도 제가 아는 한 인권침해 감시단이나 변호사, 비상행동 상황실 스태프 등 실무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성소수자들이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담당했어요. 광장을 벗어난 일상에서도 늘 그런 것처럼,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죠."

지금 사회운동 전반에 성소수자들이 많이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고 순부 씨는 말했다. 사회운동이 예전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고 정체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요즘, 성소수자 운동은 오히려 성장하고 있고,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최근 들어 꼭 성소수자 운동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운동 진영으로 적극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그는 어쩌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 광장의 키워드는 '약자들의 연대'

"저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운동권 성향의 독서 토론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20대 초반부터 성소수자 인권단체 활동을 했어요. 미군 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들의 연대체 활동과 진보 정당(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 활동을 했고, 최근까지 공공운수노조 산하 더불어사는희망연대본부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했죠. 이 공간들에서 저는 대체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했거든요."

지금 돌아보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찾아다닌 게 아닌가 싶다고 그는 말했다. 사회과학대학은 그래도 다른 곳보다 다양성에 대한 토론과 이해가 가능한 곳이고, 군대도 일반 육군보다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덜 모욕받을 곳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성소수자들이 사회운동 조직에 많은 현상은 자신의 인생 경로에 비춰보면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에 그는 고등학생이었다. 야간집회 금지가 막 풀렸을 때였다. 종각역 삼성증권 앞 사거리 차도를 깃발을 든 대학생 형들을 따라 걸으며 해방감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는 게 뭘까. 그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생긴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인권단체 활동을 하면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 때인 2014년에 박원순이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거부했을 때 성소수자들이 시청 로비를 점거하는 농성에 참여했어요. 이듬해에 학교에 성소수자 동아리를 만들고 총여학생회와 함께 인권영화제를 개최했는데, 성소수자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이 대관을 취소하고 행사를 불허하고 나섰어요. 그에 맞서 싸우면서 야외 상영을 진행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고, 성적 지향에 따른 시설 사용 거절은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는 인권위 시정 권고를 얻어냈죠."

그가 활동하던 성소수자 동아리가 학내에 신입생 환영 현수막을 걸었을 때는 학교에서 건학 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면서 방해하고 나섰고, 그것도 인권위에 진정해서 이겼다. 인권위 권고 사항은 법적인 강제력이 없어서 대부분 불수용을 하지만, 정치적인 부담을 주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시 못 할 의미가 있다. 대학생 때 이미 두 건의 국가인권위 진정에 대해 인용을 얻어낸 경험이 있는 그는 요즘 파행으로 치닫는 국가인권위의 모습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단다.

게이 인권운동 단체 '친구사이' 활동으로 알게 된 김조광수 김승환 부부의 결혼식이 혐오자의 난동으로 어지럽혀진 일과, 20대 초반에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연이은 죽음을 목격하며 그는 자신의 진로를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성소수자 자살률이 높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당사자가 직접 들려주는 현실은 참담했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청소년, 청년 등 젊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특히 많단다. 그런 경우 부모가 장례를 안 치러주거나 1일장으로 끝내고, 주변에 안 알리는 경우도 많다. 친구들은 나중에서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고.

"그 나이면 사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이 친구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만난 사람을 저 친구 장례식에서 또 만나는 거예요. 그럼 '야, 이런 데서나 만나는구나', 그런 이야기를 나누죠. 어느 장례식장에 가면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니까 영정 사진이 없어서 영정을 못 갖춘 제단도 있어요. 그런 장례식을 계속 다니다 보니 이들이 특별히 유약해서 죽은 게 아니라,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어떤 조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죽음이 너무 많은 이 상황을 바꿔야겠다는 생각, 그게 저를 이 길로 오게 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사는희망연대본부 사회연대 국장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빈곤철폐의날' 퍼레이드에 참가한 권순부 씨. ⓒ 권순부

"제 인생 경로 보면 성소수자 사회운동 참여 이해될 것"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길에서 십여 년, 요즘 그는 세상이 분명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성별이나 세대를 가리지 않고 성소수자 문제를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광장이라는 것의 예외성도 한몫했겠지만, '성소수자 차별도 윤석열도 없는 사회로' 손피켓을 선뜻 집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분명 성소수자가 나와 같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동료 시민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각 단체의 회원도 늘었다. 일시 후원의 형태로 들어온 시민들의 마음은 성소수자 운동이 광장에서 더욱 힘 있는 액션을 펼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이번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에는 이호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가 공동의장을 맡아 참여했는데, 성소수자 당사자가 주요 연대기구의 의장으로 들어간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성소수자 시민들의 활발한 광장 참여로 인해 활동가들도 더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발언이 양적으로 늘어났다는 것도 이번 광장의 소중한 성과에요.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모인 사람들은 어쨌든 듣게 되는 거잖아요. 나는 주변에서 한 번도 성소수자를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그들이 무대에 올라와 직접 발언하는 것을 들은 경험은 광장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사라지지 않을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번 광장은 성소수자 시민들이 이곳에서 주요한 몫을 가지고 있는 그룹이라는 점을 보여주었고,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시민 사이의 접점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 공간이었다고 순부 씨는 평가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입장에서 이번 광장은 큰 가능성을 확인한 동시에 그 못지않은 과제를 안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조직되지 않은 많은 성소수자 대중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는 가능성을,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모아낼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고민과 과제를.

"그분들이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삶을 용기 있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어요. 우리 운동이 어떻게 하면 이들의 용기를 잘 받아안을 수 있을까, 이분들이 아직 성소수자 인권단체나 운동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어떤 점을 더 개선해야 좋을까. 하지만 고민도 잠시, 당장 해내야 하는 일들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음 한편에 과제로만 미뤄둬야 했죠."

광장의 용기 받아 안아 새 '무지개행동' 사무국 출범

광장의 발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종종 '떨리는 목소리'라는 표현을 썼다. 아, 나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나도 보고 들었다. 정체성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흔들리던 그들의 몸짓을. 문득 떨리기 시작하던 그들의 목소리를. 내가 이럴진대 성소수자 당사자인 순부 씨의 마음에 일었던 파문은 어땠을까. 다음 기회엔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미리 잘 준비해둘 생각이라고,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나, 또 어떤 세상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성소수자 인권문제는 특히 관과 정치권으로부터 줄기차게 의도적인 외면을 받는 의제 중 하나다. 정당이나 선출직 공무원의 경우 반대 세력의 민원이나 압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급적 피하려는 주제이기도 하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매년 15만 명이 참가하는 아시아 최대 축제로 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규모와 문제의식에 비해 많이 축소 보도되는 탓에 사회적 관심을 끄는 데 한계가 있는 서울퀴어문화축제가 대표적인 예라고 순부 씨는 지적했다.

성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도 익명성 뒤에 숨기 좋은 서울이라는 대도시권의 얘기다. 상대적으로 좁고 보수적인 사회인 지방에서 이들이 넘어야 하는 편견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정보라 작가는 책 <다시 만날 세계에서>(2025, 안온북스)에서 자신이 참가한 포항 집회에서는 본인을 성소수자라고 밝힌 참가자가 한 명도 없었다며, '인구 50만 명의 보수적인 지방 소도시에서 성소수자임을 밝히면 이후에 살기 힘들어지니까 내놓고 말할 수 없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나 역시 취재 과정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지역 집회에서 용기 있는 발언을 해 꼭 만나보고 싶었던 한 소도시 출신 성소수자가 결국 인터뷰를 고사하고 연락을 끊은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 짐작할 것 같아서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세상은 분명 변했으나, 그 변화의 온기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시민들의 인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 비해 정치와 공적 영역은 수십 년쯤 뒤떨어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우리 운동은 혐오나 차별이 발생하면 그것에 대해 규탄하는 식으로 싸워온 케이스가 많은데, 우리가 먼저 우리 권리를 주창하고 이끌어 나가는 적극적인 운동을 해보자 해서 이번에 무지개행동 사무국을 세우기로 결의했죠. 새로운 무지개행동을 통해서 더 많은 성소수자 시민들과 만나고, 평등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더 많은 시민과 만나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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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여덟 살 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X세대 아줌마입니다.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다 한동안 소설을 썼습니다. 극심한 생존경쟁이 기본값인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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