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페이지에 민주 수호 네 글자를 새겼다는 자부심, 이제는 내란 청산, 사회대개혁 아홉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더 큰 광장에서 뜨겁게 만납시다. 빛나는 불빛을 들고 우리가 그토록 열망했던 새 세상을 꿈꾸며 '다만세' 함께 부르면서 오늘 승리의 밤 마무리하겠습니다. 민주시민이 승리했다! 몇 달 동안 함께 광장을 지켜주신 부산 시민 여러분께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 2025년 4월 4일(헌법재판소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일) 부산시민 축하대회
지난 겨울 부산 광장의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있으니, 광화문 집회 무대에서 봤던 20대 사회자들의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추위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눈빛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 그는 명실공히 집회의 메인 사회자였다.
탄핵 광장에 참여한 지역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광장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렸는데, 서울과 수도권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던 와중에 누군가 이지희 대표를 적극 추천했다. 부산에서 광장에 나왔던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12월 초부터 4월 파면 선고일까지 내내 부산 집회의 메인 사회자였고, 사회도 잘 봐서 사람들이 다들 좋아했다고 했다. 게다가 20대 중반의 나이에 부산에서 청년 단체 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단다.
지희 씨는 집회 사회자로 매일 무대에 섰던 겨울보다 요즘이 더 바빠 보였다. 주말에도 지역 단체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는 그는 인터뷰 당일에도 직전까지 상가들을 돌며 홍보 인사를 하다 들어왔다고 했다. 지역에 있는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금정주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금정구 주민이 직접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 주민의 힘으로 주민정책을 실현하는 자리라고 했다. '청년, 오늘'의 대표를 맡아 이끄는 일 외에도 진보당 부산시당에서 청년위원장, 금정구 지역위원회에서는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는 박근혜 퇴진 집회 때는 청소년이었으니까, 이런 큰 광장에 참여한 건 사실 처음이에요. 집회 사회를 본 것도 당연히 처음이고요. 제 인생의 큰 영광이었죠. 제가 무대에 올라서가 아니라, 집회에 나온 부산 시민들이 더 빛나도록 도울 수 있었다는 것, 그 집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탤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영광이었던 거죠. 시민들과 어떻게 하면 더 잘 소통할 수 있을까, 무대에 설 때마다 그걸 생각했어요."

부산 시민들이 모두 좋아했던 20대 집회 사회자
처음 무대에 올라갔던 날을 지희 씨는 기억한다. 서툴고 떨리는 와중에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맨 앞자리를 지키던 청년과 청소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과 눈빛을 맞추고,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잘 낼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었다. 사회 보는 일은 곧 익숙해졌다. 시민들은 순수한 진심과 열정을 가진 20대 사회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가끔 그가 무대에 서지 않는 날엔 아쉬움을 표했고, 큰 집회 때는 장미꽃이나 장갑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산의 광화문 광장'인 서면과 전포대로에서 열린 윤석열 퇴진 집회도 규모만 다를 뿐, 처음에는 서울과 별다르지 않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평일은 약 2000명, 큰 집회가 열리는 주말에는 5만에서 7만 명의 인파가 8차선 전포대로를 가득 메웠다. 응원봉과 깃발 부대가 광장을 채우고, 청년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서울처럼 부산도 12월 초에 평등수칙을 발표하고 광장의 질서 유지 기준으로 삼았는데, 상대적으로 작은 공동체인 부산에서는 서울과 달리 매 집회 때마다 평등수칙을 읽지는 않았다.
"부산도 광장으로 나온 청년들을 적극 포용해, 그들의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내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저 같은 청년 사회자를 내세운 것도 그중 하나고요. 12월 중순부터 '2030 집회기획단'을 모집해서 1월부터는 이 청년들이 직접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도 했어요. 집회에서 쓰면 좋겠다 싶은 노래 구호나 퍼포먼스를 짜기도 하고, 만장을 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면 만장을 같이 만들기도 하고요. 집회가 어땠는지 평가하고 무엇을 더 하면 좋을지 계속 회의하고 아이디어를 모았죠."
2030 집회기획단은 지희 씨가 제안부터 모집, 활동까지 담당한 모임이었다. 집회기획단의 활동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서면 플레이리스트'가 유명해진 것은 기획단의 대표적인 활동 사례 중 하나다. 서면 플레이리스트는 언론에 회자될 정도로 집회 참가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고, 활기찬 집회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울 집회도 K팝 대중가요들을 주로 틀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부산 플레이리스트가 유독 사랑받은 이유는 신청곡 위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신청곡엔 K팝도 있었고 민중가요도 있었다. 노래를 틀 때는 2030 집회기획단이 짠 구호를 추가했고, 청중은 뜨겁게 화답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나 구호엔 자연히 청년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지만, 소위 '민주화 운동 세대'들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그저 함박웃음이었다고.
사람들이 특히 환호한 구호는 걸쭉한 부산만의 사투리가 제대로 들어간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윤석열, 마!(선창) 끄지라!(후창)"
2030 집회기획단, 서면 플레이리스트, 부산 사투리 구호
아이돌 덕질을 하거나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지희 씨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번 광장에서 청년 세대의 주요 소통 창구로 떠오른 X(트위터)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문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듯, 대답 끝에 멋쩍은 웃음이 떠올랐다.
"저는 그러니까 단체 사람, 처음부터 조직에 속해있던 사람이죠. 이번 광장에 개인적으로 나온 분들도 많았지만 저 같은 사람도 분명 있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을 거예요."
기존 사회운동 단체들은 광장에 나온 새로운 세대를 궁금해 했고, 반대로 청년 참가자들은 운동권 선배들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민주노총 등에서 무지개 머리띠를 제작해 배포한 것이나, 청년들이 노조 조끼를 입고 민중가요를 배우려고 했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가교 역할'이라는 말에 지희 씨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한 발 뺐지만, 부산에서 꾸준히 청년 운동을 해온 '청년, 오늘'의 노하우가 청년들과 함께하는 광장을 만들려는 노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부산 광장은 3월 초 윤석열 석방을 기점으로 전과 후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요. 광장 초반에는 사회운동 단체에 비해 청년 세대가 훨씬 더 눈에 띄었고 숫자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석방 후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그 반대가 됐죠. 끝까지 나온 청년들도 물론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거든요. 그 이후로는 계엄 이전부터 윤석열 퇴진 광장을 열어왔던 시민사회단체들이 500에서 1000명까지는 늘 책임지고 동원해주셨고, 사실상 나머지 투쟁을 마무리했죠."
기억을 더듬어보면 광화문 광장도 그때가 고비였고 힘든 시기였다.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다들 지쳐나갔다. 다만 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인구도, 나오는 사람도 많으니까 청년 세대의 이탈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3월은 새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광장 초기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이 큰 주목을 받았고, 광장의 큰 원동력이기도 했잖아요. 다양한 깃발들이 그걸 상징적으로 표현해줬죠. 그런데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개인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봐요. 사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죠. 같은 지향을 가진 조직이나 공동체를 만나야 그 개인도 힘을 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결국 광장에 와서 함께 할 누군가가 있는가, 아니면 개인으로 와서 개인으로 끝났는가의 차이가 끝까지 버틸 동력 여부를 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개인들' 주목받았지만 싸움 이끄는 데는 조직의 힘 필요
'청년, 오늘'은 광장에 나온 부산 청년 50여 명을 인터뷰해 지난 3월 아카이빙 웹진 <일상을 멈추고 광장의 빛으로>를 발간했다. 발간 당일에 부산 비상행동 집회의 사전 집회를 겸한 청년 대회를 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청년들이 나와주었다. '혼자였지만 내 또래 청년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용기 내어 나올 수 있었다'고 소감을 말하는 그들을 보며, 지희 씨는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다. 그들이 광장에 소속감을 느끼고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노력이 좀 더 빨리 이루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산 광장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다른 지역 시민들도 이건 꼭 들어봐야지 싶은 스토리가 하나 남았다. 바로 지난 12월 28일에 벌어진 '부산의 남태령' 사건이다. 그날 국민의힘 부산시당 위원장인 박수영 의원이 지역구 사무실에서 주민 간담회를 개최한 자리에 몇몇 시민이 찾아가 '내란에 대한 입장'을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이 "내란죄 여부는 헌재가 판단할 일이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며 도리어 내란을 옹호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의원실에서는 경찰을 불렀고, 상당수 시민이 사무실 안에 갇혔다. 서면에서 주말 집회가 예정되어 있던 그날, 부산 비상행동은 박수영 사무실로 가기로 결정했다. 30분의 약식 집회를 마치고 수천 명의 대오가 두 시간 가까이 행진을 해서 박 의원의 사무실 앞에 결합했다. 갇힌 사람들을 구하고 박수영의 사과를 받아내자고 의기투합하며, 사람들은 외쳤다. "오늘 이곳이 바로 부산의 남태령이다!"
"그날 제가 집회 사회를 맡았는데 결국은 행진 사회가 되어 버렸어요. 서면에서 30분간 집회를 진행하고 현장의 시민들에게 '갑시다!' 하고 제안했죠. 아무것도 미리 계획되지 않은 진짜 우발적인 상황이었고 날도 너무 추웠어요. 하필 그날 행진 음원 USB를 들고 있던 동지가 박수영 의원 사무실 안에 갇힌 바람에, 급한 대로 여기저기 음원 자료를 찾아서 즉석에서 틀었어요. 작은 트럭 한 대뿐이었으니까 맨 뒤에서는 앞이 보이지도 않고 말이며 노래가 하나도 안 들렸을 거예요. 그런데도 이탈자 하나 없이, 그야말로 분노한 부산 시민의 힘으로 그 추운 날 두 시간을 행진해서 갔죠."
'부산 남태령' 투쟁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사건이 부산 시민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고 지희 씨는 설명했다. 부산 사람들은 계엄 당일에도, 남태령 투쟁 같은 큰일이 벌어져도 수도권에서처럼 현장에 바로 뛰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SNS에 올라오는 소식이나 유튜브 생중계를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렀고, 그것이 현장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부산 남태령' 투쟁은 그런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 계기였다. 전국적인 투쟁 분위기에 함께하면서, 부산만의 싸움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작은 자부심이라고 할까.

분노한 부산의 힘을 보여준 '부산 남태령' 투쟁
초등학생 때 이후로 부산에서 쭉 살아온 지희 씨는 부산에 대한 애착이 크다. 한부모 가정에서 늦둥이 외동딸로 자란 그는 자연히 '어떻게 하면 내 삶과 내 가정을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꿈을 좇아 경기도에 있는 IT계열 기숙형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기숙사비 등 학비도 부담스럽고 나이 많은 아버지가 혼자 계시는 것도 마음이 쓰여서 자퇴하고 부산에 내려와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올해 2월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시기에 '청년, 오늘'의 전신인 '청춘멘토'를 만나게 됐어요.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 꿈드림에서 연결해 주는 인턴 프로그램을 통해서요.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했을 때 느낀 절망감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청춘멘토'가 지향하는 가치관에 깊은 공감이 갔죠. 그 뒤로 꾸준히 단체와 인연을 맺으며 청소년 팀장, 운영위원, 사무국장을 거쳐서 이제 대표가 됐네요."
요즘 세상엔 개인의 삶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 속에 있지 않느냐고 지희 씨는 되물었다. 만약, 이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그는 수도 없이 많았다. 만약 현행 고교 무상 교육이 몇 년만 빨리 실행됐더라면 과연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을까, 하는 상상들 말이다. '청년, 오늘'은 그런 그의 고민을 나누고 기댈 수 있는 공동체였고, 이제는 지희 씨 자신이 '청년, 오늘'을 통해 부산의 청년들에게 그런 디딤돌이 되어주고 싶다고 한다.
'청년, 오늘'은 이번 광장을 계기로 회원 규모가 많이 늘고 이름도 알려졌다. 평소에는 책 모임 등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여러 소모임과 강연 및 교육, 기행 사업 등으로 활동하던 <청년, 오늘>은 이번 광장이 열리고 난 후 광장에서 청년들을 결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광장 이후에는 그곳에 모였던 청년들의 목소리를 정치·사회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청년의 정치세력화도 포함된다. 지희 씨는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게 스펙', 지역 청년들의 아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공통된 문제들이 물론 있지만, 지역에 사는 청년들은 또 수도권과는 다른 그들만의 고민이 있어요. 예컨대 주거 문제가 큰 고민인 것은 부산도 비슷하거든요. 월세는 서울보다 저렴하지만, 전세 사기 문제는 부산도 늘 국토부 통계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심각한 편이에요. 그 피해자는 주로 청년들이고요.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것이 일자리 문제에요.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은 양질의 일자리가 지방에는 정말 없어요."
지역에 살면 우리나라는 '서울공화국'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고 지희 씨는 말했다. 청년들이 서울로 공부하러 가거나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상황은 부산도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 근처의 울산이나 경남의 대규모 산업단지로 떠나는 이들도 있다. 부산에 살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청년들을 보면 그는 종종 마음이 아프다.
"부산에서 계속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지희 씨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부산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특히나 강하다고 들었다. '청년, 오늘'이 발간한 웹진 <일상을 멈추고 광장의 빛으로>에서 '지하철을 타고 바다를 볼 수 있는 도시가 어디에 있느냐'며 고향 사랑을 고백한 한 청년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태어난 게 스펙'이라는 부산 청년들의 자조에는 수도권 집중 현상 때문에 소외되는 지역인들의 울분이 섞여 있다.
"이런 청년들의 목소리를 포함해 각계 각층의 목소리를 담은 '광장의 힘'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나서지 않는데 정치권이 알아서 사회대개혁 의제들을 실현시켜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광장에 늘 시민들이 있고, 광장의 힘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느껴야 정치도 그 힘을 더 받아 안겠죠. 그래서 지난 15일 서울에서 열린 '광복80년 평화·주권·역사정의 실현 8.15범시민대회'에 저희도 부산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참가했어요."
이번 광장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희 씨는 광장과 정당정치가 결합되었던 것을 꼽았다. 그 때문에 그래도 현 정부의 시작이 큰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아쉬운 점들도 드러나고 있지만, 당장 전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청년들을 포함해 광장에서 활동했던 시민들이 정치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부상해야 되는 시점이라고 그는 짚었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 퇴진 광장의 아픔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활동가로서 지금 이 시점에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지 그는 요즘 고민이 많다.
무력감에 싸였던 청년들이 한 선택, 광장
이번 광장을 통해 지희 씨도 많이 변했다. 집회 사회자라는 눈에 띄는 겉모습은 차라리 작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많이 배우고 변한 것은 광장에 나온 청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부산 청년들은 어떤 마음으로 광장에 나오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인터뷰를 시작했고, 그것이 웹진 발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청년 사업을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모으기 어렵던 청년들이 12월 3일 이후 광장에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이 청년들은 정말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작년 12월 3일 밤,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로 향하는 수많은 시민을 보며 부산 청년들이 느낀 것은 무력감과 부채감이었다. 또 2014년 4월 16일,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청년들은 모두 그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지희 씨에게 들려주었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이후 계속되는 참사들을 통해 점점 더 누적된 무력감. 지난 2월 '윤석열 퇴진 부산행동'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지희 씨는 이렇게 무력감에 싸인 청년들이 한 선택이 바로 광장이라는 점이 놀랍다고 말한 바 있다.
"남태령 투쟁이 벌어진 날 마침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놀러갔던 한 청년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요. 남태령 소식을 듣고 이 청년은 부산에 돌아오는 기차 예매를 취소하고 남태령으로 향했대요. 12월 3일 따뜻한 방 안에서 느껴야 했던 무력감을 떨칠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차디찬 바닥에 앉아서 구호를 외치는 순간이 제일 마음 편했다고 해요. 함께 힘을 합치니까 무력감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워 왔다고 자부했지만 노동자, 장애인 등 다른 약자들의 문제는 외면했던 93년생 여성주의 운동가도 있었다. 일단 여성의 권리 찾기가 먼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장에 나와 노동자,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여성 문제를 같이 외쳐주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안의 무언가가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외면했던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지희 씨는 다시 질문해봤다. 청년들은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역사적인 순간에 언제나 광장에 있었던 청년들이 이제야 비로소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까. 이제서야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윤석열 내란 수괴도, 국민의힘 내란 세력도 '청년'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정치는 청년을 대상화하고 수단으로 여겼지만, 청년은 그런 정치를 버리지 않았다고 지희 씨는 강조했다.
"지난 광장을 청년들이 주인공이 되어 만든 '빛의 혁명'이라고 칭하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 광장을 통해 느꼈어요. 빛의 혁명은 정치적 힘을 가진 청년들의 손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아직은 정치권도 시민단체도 청년들의 정치 세력화를 눈에 띄게 이루어낸 세력이 없는 것 같아요. 광장에서 우리가 얘기한 염원들,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활동과 정치를 부산에서 구현해보고 싶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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