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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닫혔지만 청년 여성들의 정치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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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닫혔지만 청년 여성들의 정치는 멈추지 않는다

[프레시안 books] 이슬기 <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

지난해 12월 3일, 연말을 맞아 좀처럼 뭉치기 어려웠던 타사 또래 기자들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프집에 모여 근황을 나눴다. 웃고 떠들며 맥주를 들이붓던 시간도 잠시, 정치팀에 속한 기자들이 대통령 특별담화를 챙긴다며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냈다. "고생 정말 많다" 다독이며 대화를 이어간 지 5분이나 지났을까, 대뜸 한 기자가 "으악" 소리를 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어안이 벙벙하던 차, 고개를 돌려 호프집 TV를 보니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대통령은 들어도 들어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만 가득했다. 곧이어 나온 포고령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 전복 위협이 어디서 발생했나. 아닌 밤중에 계엄 선포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위협이 아닌가'라는 물음과 함께 자리에 모인 기자 모두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2024년 12월 3일 서울역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부터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기까지 꼬박 123일 걸렸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시민들은 한순간 붕괴한 민주주의를 수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국회에 진입하려는 계엄군을 맨몸으로 막아내는가 하면, 탄핵소추안 가결을 촉구고자 수백만 명이 한날한시 국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관저에서 버티는 대통령을 하루빨리 체포하라며 한파 속에 은박지 하나 두른 채 길거리에서 밤을 지샜고, 헌법재판소의 고민이 길어지자 단식투쟁과 삼보일배까지 해가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길고 지난한 투쟁을 취재하며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단연 청년 여성들의 민주적 역량이다. 이들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비상계엄 사태에 가장 많은 목소리를 냈으며 곳곳에서 열린 탄핵광장에 항상, 그리고 가장 많이 참여한 주체다.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여의도에 결집한 집회 참여자 중 2030 여성이 29.3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탄핵정국의 주요 장면으로 꼽히는 '남태령 대첩'과 '키세스 시위대'도 여성들의 주도로 이뤄질 수 있었다.

여성들은 '폭주하는 남성성'으로 무장한 정권은 물론 광장을 지배하던 중년 남성 중심의 집회 문화까지 끌어내렸다. 집회의 상징이 촛불에서 '아이돌 응원봉'으로 바뀌었고, 광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민중가요에서 대중가요로 바뀌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기 위한 여성혐오 발언과 광장 내 성희롱·성추행 문제가 불거지던 9년 전 탄핵집회와 달리, 집회 초 주최 측에서 평등수칙을 제정하면서 차별·혐오 문제를 크게 줄였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및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관련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안국역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는 24시간 철야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5.4.2 ⓒ연합뉴스

이런 청년 여성들에게 내려진 세간의 평가는 온전치 않았다. 현장 영상에 담긴 얼굴이 온통 여성들인데도 언론사들은 이들의 성별을 제거한 채 "MZ세대의 집회 참여도가 높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2030 여성들이 갑자기 등장했다"며 여성들이 집회에 참여해 온 역사를 소거하거나 이들을 '기특한 소녀'로 보는 시선이 이어졌다. 심지어 유명 팟캐스트에 출연한 어느 교수가 "2030 남성들에게 정보를 알려주려고 한다. 여자분들이 (집회에) 많이 나온다"고 말하는 등 청년 여성들을 집회의 유인책으로 취급하는 시선도 존재했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써 온 이슬기 기자의 신간 <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는 광장에 나선 10~30대 여성 10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깜짝 등장해 놀랍고 기특한 소녀"가 아니라 생애 전반에서 정치적 주체로 꾸준히 목소리 내어 온 존재들임을 다시금 보여준다. 대학생, 농업인, 영양사, 중국인 2세, TK(대구경북) 출신, 트랜스젠더 등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광장에 모인 이유에는 '청년'과 '여성'이라는 두 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생애사가 있었다.

비상계엄 선포 당일 서강대교 남단에서 국회 방향으로 향하는 군용차를 막아선 김다인 씨는 유신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감옥살이를 한 할아버지와 대안학교에서 배운 진보적 가치의 영향을 받았다. 스무살에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내향인' 기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성격을 뒤로 하고 꾸준히 정치적 목소리를 내왔다. '전국 응원봉 연대' 기수 김지연 씨에게는 2016년 재수를 준비하느라 또래 여성들이 박근혜 탄핵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부채감이 있었다.

앞서 정치적 역량을 쌓아 온 여성들은 청년들을 조직하고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에도 앞장섰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학생운동과 시민단체, 국회와 정당 활동을 모두 경험한 이재정 씨는 22개 청년 단체가 참여한 '윤석열 물어가는 범청년행동'과 17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더불어민주당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직을 연임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온 향연(김후주) 씨는 온오프라인에서의 활약을 통해 '남태령 대첩'을 이끌어 냈다.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에 나섰다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된 뒤 20시간 이상 대치를 이어온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2024년 12월 22일 오전 경찰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들이 저항한 대상은 윤석열 정권만이 아니다. 나이와 성별은 물론 지역, 국적 등을 향한 사회적 낙인까지 맞서야 했다. 경북 산불을 두고 '경북은 불타도 할 말 없다'는 사람들을 본 TK 여성 '햐' 씨가 그랬고, 광장에서 '짱깨'라는 발언을 들은 중국인 2세 최서연(가명) 씨가 그랬다.

"누군가는 '쌍도는 답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이번에 발생한 경북 산불을 두고 '경북은 불 타도 할 말 없다'는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대구경북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동지들이 대구 동성로에서 윤석열 파면을 외치고 있습니다. (중략)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을, 성별이나 장애나 학력 등 어떤 이유로든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죠? 그리고 그 세상은, 누군가는 특정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불에 타 죽어도 되는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216p, 햐 씨의 광장 발언)

"저는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갓 지은 흰 쌀밥과 김치와 김만 있으면 평생 만족하고 먹고 살 자신이 있는 저를 살게 해준 이 땅을 사랑합니다. 1980년대 천안문에서 국가를 향해 저항하던 제 외가 친척들이 있었다면, 이 땅에는 저보다 더 한국인 같지 않은 매국노를 쫓아내고자 하는 제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혐오의 눈길을 받으며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는 모든 이가, 자기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완벽히 선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만큼 이해와 배려가 넘치는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내란 동조자들은 당장 물러나라!"(192~193p, 최서연 씨 남태령 발언)

▲27일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 관계자가 기자회견 시작에 앞서 여성 폭력의 상징인 신발을 놓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 파면과 함께 광장은 막을 내렸고, 시민들은 정지했던 일상으로 복귀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고생 끝에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막았다는 안도 한편에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염원을 없던 일로 여기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있다. 여전히 정치는 중년 남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에 죽임을 당하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혐오한 공직자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중국동포들은 동네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극우세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광장의 열기가 가신 뒤에도 여성들의 정치적 발화는 끝나지 않는다. 여성단체에 가입하고, 노조를 조직하고, '말벌 동지'로 연대하고, 여성 농업인 의제 확산에 목소리 내고,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단체를 불평등과 청년 의제를 다루는 조직으로 확장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광장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차근차근 바꿔나간 일상이 쌓여 마침내 제도권이 청년 여성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광장과 일상의 낙차가 붕괴된 이들의 삶이야말로, 광장 정치와 대의제 정치의 구분을 뛰어넘을 단초가 된다. 더 많은 여성, 퀴어 정치인의 등장을 기대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우우놀' 기사에는 인터뷰이들을 두고 '정치 지망생이냐' 같은 댓글이 일종의 비아냥처럼 달렸는데, 나는 그걸 칭찬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전업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광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며 연대가 필요한 곳에 달려가고,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항거할 방안을 부지런히 모색하는 일상의 정치인으로 다들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우리가 놀랍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2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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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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