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몽이 아니라 현실을 그릴 뿐이다."(프리다 칼로. 1907~1954)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 '주변부의 주변부의 주변부의 주변부의 주변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칼로는 멕시코라는 주변부(소수자) 출신이다. 게다가 여자이니 '소수자의 소수자', '주변부의 주변부'다. 백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색인종'이니. 인종적으로도 '주변부(주변부의 주변부의 주변부)'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고 대학시절 대형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됐으니,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였다. 하나 더 있다. 그는 동성애, 양성애자였다는 점에서 '성적 소수자'였다.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의 소수자'라는 '5중의 소수자'였다.
칼로가 소수자가 아닌 거의 유일한 것은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상류층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유명한 사진사여서 유모를 두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중산층 출신이다. 아버지가 하던 사진관이 독재 정부의 큰 프로젝트를 했다가 멕시코혁명으로 망하면서, 이후 생활에선 그마저 어려워졌다.
생전에 칼로는 '멕시코 최고의 화가 디에고 리에바의 부인'이었다. 이제는 디에고 리베라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성이 전도됐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제 주로 멕시코 내지 라틴아메리카에서나 알려진 '과거의 천재 화가', '로컬 화가'라면, 칼로는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관련해 전 세계의 각광을 받고 있는 '현재의 화가', '세계의 화가'다. 그의 생가박물관은 오래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멕시코시티의 관광명소가 됐다.
멕시코시티 남부에 위치한 코요아칸 지역에 가면, 짙은 빨간색의 긴 단층집이 나타난다. 스탈린에 쫓겨 망명 와서 살다가 스탈린이 보낸 자객 손에 목숨을 잃은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살던 트로츠키 박물관이다. 여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700m)에는 정반대색인 새파란 집('카사 아줄')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다. 이곳은 칼로가 나고 자란 곳으로, 망명 온 트로츠키에게 집을 내줘서 그가 망명 초기에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25년 전인 2000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관람객이 별로 없었다. 2018년 갔을 때는 예약을 하지 않고 갔는데 줄이 너무 길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음 일정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번에는 어렵게 사전예약을 하고 갔다. 줄은 2018년보다도 더 길어졌다. 갈 때마다 길어지는 줄을 보며, 해마다 그의 명성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독일에서 이민 온 사진사였지만 간질 환자였던 아버지와 산후우울증을 앓았던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칼로는 6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아이들로부터 왕따당하고 부모님이 자주 아파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다만 아버지가 사진과 그림, 문학을 가르쳐줬다. 여자를 거의 뽑지 않는 명문 국립예과대(NPS)에 들어가 '모든 보수적인 것'에 저항했고 공산당 청년부에 가입했다.
18살에는 대형 교통사고로 척추 등에 큰 부상을 입어 평생 30번의 수술을 해야 했다. 병원에서 특별제작된 이젤과 거울을 놓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리베라를 만나 22살에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토착문화에 심취하기 시작해 그의 '포스트식민주의'의 상징이 된 멕시코 원주민 전통복장을 하기 시작했다. 출당당한 남편을 따라 공산당을 탈당했다.
미국으로 가 영어를 못하는 리베라 대신 대외업무를 하며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리베라의 부인'에서 '화가 칼로'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바람을 피웠다. '그링고랜디아(Gringolandia)'라고 부르는 미국 생활을 통해 칼로는 대공황으로 양극화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멕시코 정체성을 강화하는 등 결정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여러 차례 유산에 절망도 했다.
귀국 후 리베라가 동생과 바람을 피우자 트로츠키와 맞바람을 피웠고, 리베라와 이혼했다. 여러 작품을 그리며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사건으로 미국으로 도주한 리베라를 찾아가선 재혼했다. 건강 악화로 미국에서 수술했지만 실패했다. 1947년 재입당이 거부당한 리베라와 달리, 칼로의 공산당 재입당은 허용됐다. 1953년 통풍으로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진통제에 의존했고 자살을 시도했다. 1954년 미국중앙정보부(CIA)의 과테말라 침공 규탄연설을 했고, 얼마 뒤 진통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자살이란 설이 있다.
예약 시간이 돼서, 카사 아줄에 들어가자 칼로가 생전에 모은 멕시코 전통조각, 공예품들이 나를 맞았다. 안타깝게도 그 작품들은 해외 순회 중이라 몇 점밖에 보지 못했다(귀국하니 내가 살고 있는 분당에 위치한 성남아트센터에서 '프리다 칼로 작품전'을 하고 있어서, 멕시코에서 보지 못한 작품들을 집 앞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곳은 칼로의 작업실이다. 칼로가 쓰던 목발과 작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든 이젤, 물감들이 눈길을 끈다, 그 이상으로 내 눈길을 끈 것은 칼로의 침실에 걸어 놓은 한 장의 사진이다. 칼로가 잠들기 전 매일 한참을 바라봤던, 레닌이 연설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다.
칼로는 16살에 공산당 청년부에 들어갔고 리베라와 결혼하기 전인 20살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이 불법화된 이후에도 당원으로 남았다가, 당서기장이던 리베라가 1929년 스스로 자신에게 출당조치를 하자 함께 탈당했다. 트로츠키가 만든 국제좌파조직인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스페인내전을 지원했다. 리베라와 함께 트로츠키의 망명을 도왔다. 말년에 공산당에 복당했고 '마르크스주의가 병을 치유하리니'라는 그림을 통해 최후까지 마르크스주의에서 희망을 찾았다. 사망한 뒤에도 관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공산당기를 덮고 장례식으로 향한 '골수 빨갱이'였다.
"소련은 피카소의 정치를 좋아했지만, 그의 그림을 싫어했다. 미국은 그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의 정치는 싫어했다." 피카소의 부인이었던 프랑수와 질로(Francois Gilot)는 <피카소와의 삶>에서 피카소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기초해 피카소 그림을 '부르주아 퇴폐주의'에 오염됐다고 비판하는 소련과 '정통 좌파'에게 피카소는 "혁명적이기 위해 총을 든 사람을 그려야 하는 건 아니다. 사과 한 알이 똑같이 혁명적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멕시코공산당은 프리다 칼로의 정치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그림을 싫어했다면, 미국은 그의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정치를 싫어했다." 세계가 자본주의로 평정된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하지만, 그의 정치는 싫어하거나 외면한다. 예술가의 작품과 삶은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 예술가, 나아가 그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그의 삶에 대한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화상 등 그의 그림을 사랑하지만, 칼로 자신은 자신의 '사적인 측면'을 주로 그린 자신의 그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민중의 복잡한 혁명조직의 한 세포에 불과하다. 이 조직에서 나는 멕시코 인디오와 결합하듯이 피로 결합되어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한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이 고맙다. 나는 혁명적 공산주의운동에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에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 무엇보다 무엇인가에 소용이 되는 그림으로 변화에 기여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당에 유용하게 쓰이는 일과는 무관하게 겨우 내 자신을 솔직하게 그릴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혁명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건강과 싸우고 있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다",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너무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주제는 바로 나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생겨난 정치 구호다. 우리는 정치 등은 '공적인 것'이고 가정, 가족 등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간주해 왔지만, 이 같은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고 '개인적인 것'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설거지를 누가 하느냐, TV채널권을 누가 갖느냐 역시 정치적인 것이다. 이 주장은 페미니즘, 동성애운동 등 소수자운동과 관련된 '포스트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칼로는 사회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에 소용이 되는 유용한 그림'이 아닌 개인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부끄러워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또 다른 혁명', 페미니즘, 소수자정치, 포스트주의 혁명의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폭탄을 두른 리본'.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이 칼로의 그림을 극찬하며 한 평가다. 대부분 칼로를 초현실주의 작가로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악몽이 아니라 현실을 그릴 뿐이다"라는 고백이 보여주듯이, 그는 '초현실주의적 무의식'이나 '꿈(악몽)'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삶이라는 현실'을 처절할 정도로 리얼하게 그린 '리얼리즘', 남미의 중요한 전통인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칼로는 자신의 가족적 연혁('나의 가족상'), 출생('나의 출생'), 어린 시절('유모와 나'), 전차 사고('교통사고'). 유산('헨리 포드 병원'), 미국생활('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선 자화상', ‘멕시코의 네 주민들'), 리베라의 외도('몇 번 찔렀을 뿐인데'), 건강 악화('부서진 원추', '희망 없이'), 척추수술 실패('부서진 척추, '부상당한 사슴'), 무릎 이하 다리 절단('나는 날개가 있는데 왜 발이 필요한가'), 마르크스주의('스탈린이 있는 자화상', '마르크스주의가 병을 치유하리니'), 리베라와의 관계('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지구, 우주, 디에고, 나') 등 자신의 변화하는 현실을 끊임없이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육체적 고통과 신체적 문제를 생생하게 그린 그의 그림은 '생체의 유물론'이다.
카사 아줄 문을 나서자, 죽음을 앞두고 칼로가 고백한 삶에 대한 모순된 두 절규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그는 말한다, "나는 즐겁게 출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외친다. "Viva La Vida(삶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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