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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진 복수-밑그림>展, 피해자 측의 연대로 그린 돌봄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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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진 복수-밑그림>展, 피해자 측의 연대로 그린 돌봄의 장

[기고]

9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부산에서 젠더기반폭력의 '피해자 측'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재미진 복수-밑그림> 전시가 열렸다.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화사/이충열 작가(이하 화사)가 기획·주관했고, 성폭력 피해자 201명의 응답과 지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피해자 측을 구성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화사의 시도가, 전시 공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부산으로 향했다.

젠더기반폭력(Gender Based Violence)이란 불평등한 젠더 권력에 기반해 발생하는 모든 폭력 행위를 총칭하는 용어로 직장 내 성적 괴롭힘, 가정폭력, 성폭력, 여성 살해(femicide), 인신 매매, 온라인이나 디지털 폭력, 성 착취 등 공적·사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신체적, 언어적, 심리적, 경제적 폭력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재미진 복수-밑그림>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피해자 측을 구성하기 위한 의지를 담은 전시 취지문이 선언문처럼 자리하고 있다.

젠더기반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면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현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할 때 심리상담가 앞에서조차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는 자리를 반복해서 경험하니, 이제는 나의 잘못이 아닌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낸 차별과 폭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가 가시화되는, 그 힘이 전시로 어떻게 시각화될지 궁금했다. '재미진 복수'라는 이름부터가 피해자 측은 상처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명랑한 에너지를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했다.

<재미진 복수-밑그림>을 기획한 바탕에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몇 년 전 부산의 한 문화예술단체 대표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화사는, 사건을 공론화하고 부산 문화예술계에 성평등 의식을 환기시키고자 부산성폭력상담소에 사건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가해자 측은 사건을 축소, 부정하며 화사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지 2년이 지나서야 형식적으로 SNS에 사과문을 올리며 마무리된 듯 보였으나, 해당 문화예술단체는 화사를 조력했던 상담소를 상대로 민원과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무기력감에 빠진 화사는 결국 피해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가 이번 전시였다.

화사는 "성폭력이라고 하면 강간과 같은 극심한 폭력을 떠올리고 그 외의 다양한 폭력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젠더기반폭력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젠더기반폭력 피해자들이 상처를 고백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회복과 연결을 체험하는 자리였다.

▲피해자 측 201명이 보낸 <재미진 복수-밑그림>에 대한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가 무지개색깔로 전시장 유리벽을 둘러싸고 있다. 화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악령을 막아주는 '혼문'을 떠올리며 이 유리벽을 '무지개 혼문'이라 명명한다.

전시장을 들어서기 전, 유리벽에는 무지개빛 메시지들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 201명의 피해 당사자들이 보낸 응원의 말들이었다. 화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악령을 막아주는 '혼문'을 떠올리며 '무지개 혼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전시 입구 장치가 아니라,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맞이하며 보듬는 돌봄의 문이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시의 취지를 알리는 글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연대하여 목소리를 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첫 번째 섹션 "우리를 억압하는 젠더박스"는 태어날 때부터 강요되는 성별화된 규범을 문제 삼는다. 사회가 남성과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기준이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드러내며, 관람객은 자신이 겪은 젠더박스를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다. 서로 다른 경험들이 모여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차별의 양상을 보여주며 젠더 억압의 구조를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했다.

▲첫 번째 섹션 "우리를 억압하는 젠더박스"는 젠더기반폭력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젠더박스를 살펴보며 관람객들이 들었던 말과 차별의 경험으로 빈칸을 채우고, 포스트잇을 붙여 만들어진 공간이다.

두 번째 섹션 "말할 수 없는 것이 피해"는 차마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공간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드러낼 수 없는 폭력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고, 피해자 측이 서로의 목소리를 감수성의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마련된 장치였다. 관람객은 하얀 벽에 하얀색 보안용 펜으로 글을 쓰고, UV랜턴으로 비춰야만 그 문장을 볼 수 있다. 피해 사실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면서도 개인의 안전과 비밀을 동시에 보호 하도록 고안된 장치였다.

▲두 번째 섹션 "말할 수 없는 것이 피해"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피해와 상처를 기록하는 공간이다. 육안으로 보면 하얀 벽지로 보일 수 있지만, UV랜턴을 비추면 관람객들이 작성한 피해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섹션 "우리가 느낀 감정이 바로 피해"는 검은 벽을 긁어내면 형형색색의 메시지가 형상화되는 참여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벽면에는 분노, 억울함과 같은 단어와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겹겹이 새겨졌다. 관람객이 함께 긁어내며 완성해가는 이 작업은 무겁게 가라앉은 감정을 알록달록한 글자와 색채로 바꾸어내며 생기 있는 발화로 전환시켰다. 화사는 검은 벽이 젠더기반폭력을 은폐하려는 사회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며, 피해자이자 관람자가 내면의 무게를 표현함으로써 '성적 수치심'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퍼포먼스의 주체가 되기를 의도했다고 밝혔다.

▲세 번째 섹션 "우리가 느낀 감정이 바로 피해"는 검은 벽을 긁어내면 무지개빛을 낸 메시지가 드러나도록 관람객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네 번째 섹션 "젠더기반폭력의 피해자 측 201명의 이야기"는 피해자 측이 이야기하는 감정, 젠더기반폭력이 만연한 이유, 젠더기반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그래프와 텍스트로 정리해 제시했다. 이 자료는 피해 경험이 더 이상 개인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임을 다시금 명징하게 드러냈다.

▲한 달 동안 구글폼을 통해 피해자 측의 목소리를 담아내었다. 201명의 피해자가 응답을 해 왔다. 피해자 측이 이야기하는 감정, 젠더기반폭력이 만연한 이유, 젠더기반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래프와 텍스트로 정리되어 있다.

다섯 번째 섹션은 손을 활용한 퍼포먼스 영상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우리가 옳다'는 글자를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 힘겹게 적지만, 오른손에 의해 쉽게 지워진다. 이어지는 영상에서는 '우리가 이긴다'라는 문구로 연필로 쓰이자마자 지우개에 의해 사라지지만, 볼펜으로 다시 적힌 문장은 지워지지 않는다.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연대와 전략이 함께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니 '피해자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경험이 사적 고백으로 축소되는 현실 속에서, 이번 전시는 글과 색, 설치와 퍼포먼스 영상 등을 통해 공적인 언어로 옮기고자 했다. 여성의 목소리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화사의 손길에 2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응답했다. 그 응답은 다시 서로를 지지하는 울림으로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전시에서는 피해자 측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뜨거워졌다.

2018년 한국사회는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터져 나온 미투(Me Too)운동의 파장을 경험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었던 권력형 성폭력이 드러나면서 문화예술계는 미투의 상징적 무대가 되었다. 올해 3월 연극계는 다시금 미투 운동에 대해 논의하고자 <연극계 미투 이후,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 포럼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도 젠더기반폭력은 여전히 횡행하며, 피해자의 경험은 사적인 상처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다.

<재미진 복수-밑그림>은 젠더기반폭력을 예술로 공론화하며 피해 당사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주체임을 밝히고자 했다. 201명 피해자들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재미진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화사는 "끝없이 n차 피해를 경험하는 피해 당사자들과 피해자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백래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고 서로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던 바로 그 지역에서 전시를 연다는 것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드러내며 연대를 요청하는, 용기 있는 실천이었다.

피해자 측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연대는 가해자 중심의 문화를 바꾸어가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피해자 측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서로를 지탱하며 변화를 촉발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재미진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목소리와 더 넓은 공감으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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