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에서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수사 기록 전체 공개를 강제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상원이 신속 통과를 공언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책상에 법안이 곧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표결을 포함해 엡스타인 문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 및 공화당에 대한 절대적 장악력에 균열을 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을 보면 18일(이하 현지시간) 미 법무부가 보유한 모든 엡스타인 관련 기록을 30일 내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이 미 하원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하원에서 해당 법안이 찬성 427표 대 반대 1표로 압도적으로 가결되자 상원은 이 법안이 상원에 도착하는 즉시 통과된 것으로 간주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해 신속 처리를 보장했다.
존 튠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가 미 CNN 방송에 해당 법안이 19일 오전 하원에서 공식적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밝힘에 따라 법안은 이날 서명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일 것으로 전망된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법안이 백악관으로 넘어 오면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법안 상정을 몇 달간 저지해 온 하원 공화당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은 트럼프 지지층을 포함한 여론의 거센 반발을 의식해서로 풀이된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이날 "이 법안에 계속 반대해왔다"면서도 반대표를 던질 경우 마주할 정치적 역풍 탓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중 누구도 최대한의 투명성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날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공화당 소속 클레이 히긴스 뿐이다.
엡스타인 파일 공개 주장에 격렬히 반발해 온 트럼프 대통령도 표결에서 공화당 표 이탈이 확실시되자 돌연 입장을 바꾼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파일 공개 요구가 "민주당의 사기극"이라는 주장은 유지하면서도 "아무 것도 숨길 게 없다"며 "하원 공화당은 엡스타인 파일 공개에 투표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날 문건 공개를 요구한 오랜 측근 마조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하원의원을 "배신자"로 낙인 찍고 공화당의 "수치"라고 격하게 비난한 뒤다.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표결 없이도 법무부에 엡스타인 문건 공개를 지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찬성 투표 촉구는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파일 공개 표결을 막으려 이를 주도한 공화당 의원들에 압박을 넣었지만 실패했고 결국 패배한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공화당에 찬성 투표를 촉구했다고 분석했다. CNN도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하원 표결 뒤 창피를 면하기 위해 입장을 선회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원 표결 뒤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원 통과 시점이 언제든 "상관 없다"며 짐짓 태연한 태도를 취했지만 취재진에 관련 질문을 받자 폭언을 퍼부으며 끝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백악관에서 모하메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만났을 때 기자가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명령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고 끔찍한 기자"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에도 엡스타인 파일을 왜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냐는 질문을 한 기자에 "조용히 해, 돼지(Quiet, piggy)"라고 모욕적 언사를 했다.
이번 표결은 2기 취임 뒤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및 마가(MAGA·트럼프 열성 지지층) 세력에 대한 통제를 잃은 첫 사례로 평가된다. 트럼프 지지층은 지난 2019년 미성년자 성착취 혐의로 기소돼 구금 중 사망한 엡스타인 사건에 부유층과 권력자가 연루돼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을 펴며 파일 공개를 요구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엔 파일을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취임 뒤 실행하지 않았고 지난 7월 법무부는 엡스타인 문건에 음모론의 핵심인 유력 인사가 포함된 "고객 명단"은 없었다며 자료 추가 공개를 거부했다.
이에 트럼프 지지층이 들끓었고 지난주 하원에서 공개된 엡스타인의 이메일 일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 범죄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 및 피해자를 만났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이 발견되며 공개 압박은 더 커졌다. 미 정치권은 내년 11월 총선(중간 선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과 한때 알고 지냈지만 이미 2000년대 중반 사이가 틀어져 연락을 끊었고 성범죄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CNN은 이번 사건으로 "트럼프의 마가 운동 내 '무적의 기운'에 구멍이 났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0년간 지지층을 장악하고 지지층에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지시해 온 데서 물러섰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 문건 외에도 최근 아르헨티나 구제금융,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적 위협, 중국 유학생 및 외국인 전문인력 환영 발언 등으로 미국의 해외 개입 및 이민 반대를 주장하는 마가 세력의 불만을 샀다.
지지층이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달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이 총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유지할 여유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CNN은 선거 패배로 트럼프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 우려가 커졌고 이에 일부 공화당원들이 트럼프를 뒤로 하려 시도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짚었다.
새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2기 지지율은 최저점을 기록 중이다. 지난 14~17일 미국 성인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8일 공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38%로 한 주 전 조사(40%)에 비해 2%포인트(p) 하락했다.
물가와 엡스타인 문제에서 불만이 두드러졌다. 응답자의 26%만 트럼프 대통령이 생활비 부문 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답했다. 엡스타인 문제에선 응답자의 20%만 트럼프 대통령의 처리 방식에 동의했다. 응답자의 70%는 정부가 엡스타인 고객 관련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봤는데, 공화당원의 60%도 이러한 의혹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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