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에게 근로자 참여 하에 각 사업장이 스스로 위험 요인을 파악하는 위험성 평가를 매년 실시하도록 정한다. 그런데 이 때 위험의 기준은 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주류 인종의 성인을 전제하고 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다양한 몸은 고려되지 못한다. 여성이 대표적 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산하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위험성 평가팀은 '젠더 관점을 포함한 위험성 평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세 편의 글을 기고한다.
"더 이상 동료의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 않다."
지난 11월 4일,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은 학교급식실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폐암 산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폐암 산재가 인정된 급식 노동자가 178명, 그 중 5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경력 10년 이상 급식 노동자의 30% 이상이 폐에 이상 소견이 있다고 호소했다.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집단 급식이 시작된 것이 1998년, 배기시설이 고장난 학교 급식실에서 장기간 근무하다 폐암에 걸려 사망한 여성 노동자가 처음으로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것이 2021년이다. '밥하고 설거지하는' 여성 노동자의 일터가 발암물질로 가득 찬, 죽음을 부르는 일터였음이 드러나는데 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바탕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일터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인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개선이 시급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위험성 평가에서도 예외없이 작동한다. 여성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에 비해 더 쉽고, 더 적은 숙련과 노력을 필요로 하며, 더 안전하고 편한 노동, 그래서 더 적은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노동으로 여겨지는 순간, 여성 일터의 위험은 '사소한' 위험이 되고, '표준적인 남성'과 구별되는 여성의 '몸'과 '처지'에 대한 고려는 쉽게 무시된다.
여성이 다수인 일터에서 간과되는 '사소한' 위험
종사자의 80~90% 이상이 여성인 콜센터 상담사 10명 중 3명은 방광염에 걸린 경험이 있거나 현재 치료 중이다(<2023년 콜센터 건강권 실태조사 결과(민주노총)>). 회사가 동시에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인원을 지정하고 목표 콜 수를 정해 압박하는 탓에 화장실 가는 시간, 물 마시러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근무하다 생긴 질병이다. 같은 또래 여성의 3.2배가 넘는 수치다. 그러나 당신이 콜센터 상담사로 채용되더라도 '방광염' 위험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업종별 안전보건 실무의 표준안이라고 할 만한 고용노동부의 <콜센터 및 텔레마케팅 서비스업 안전보건 실무길잡이(2023년)>에도 화장실 가기도 어려운 노동 강도와 실적 압박, 스트레스로 인한 '방광염'의 위험은 포함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역시 종사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평균 연령이 61.7세(2023년 기준)에 달하는 전형적인 고령 여성 노동자 다수 업종이다. 시설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 1명이 하루에 돌봐야 하는 환자는 8-10명 정도인데(야간에는 최대 2배까지 늘어난다), 노인 환자의 평균 몸무게 60kg을 기준으로 1일 최소 2회 각 환자를 휠체어 등으로 이동시키고 다시 침대에 올린다고 치면 그 횟수는 40회, 무게는 2톤이 넘는다. 축 늘어진 사람, 몸부림치는 사람을 다치지 않게 들어 올려 부축하고 씻기는 작업은 고정된 중량물 작업보다 더 많은 힘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들이 건설 현장 노동자 못지 않은 중량물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고, 업무상 질병 승인은 종종 거부된다. 이들의 허리, 손목, 어깨가 아픈 것은 업무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아플 때가 됐기 때문'이다.
남의 집을 방문해 '혼자' 일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의 일터는 성희롱, 성폭력, 폭언, 폭행 등 잠재적 범죄 현장이 될 수 있다. 여성이 혼자 있는 집에 낯선 남성이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고객 의견을 반영해 가스 검침원은 대부분은 여성을 고용하는데, 그 결과 고객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여성 노동자에게 넘겨졌다. 가스검침원 10명 중 7.4명이 성희롱 피해를 입었고(<방문서비스노동자 감정노동.안전보건실태 설문조사 분석결과(민주노총)>, 2019년), 고객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긴 방문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등의 피해는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3.2명이 성희롱 피해를 겪었고, 2회 이상 반복된 비율도 41.7%에 달했다(<2023년 가구방문 돌봄노동자 실태조사(사)보건복지지원연구원). 그래도 2인 1조 근무를 법으로 강제하는 수준의 '위험'에서는 여전히 제외되고 있다.
노동하는 '몸'과 처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위험 격차'
동일 산업, 동일 직종, 동일한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는 남성과 여성이라 하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차이, 서로 다른 작업 역할, 각자가 처한 사회 문화적 처지에 따라 노출되는 위험의 종류, 노출되는 수준과 결과가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표준화된 남성'을 기준으로 짜여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에는 이같은 위험 격차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거의 부재하다.
평균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키가 크고 무겁다. 그러나 여성은 '작은' 남성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몸은 다르다. 이같은 생물학적 차이는 동일한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때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조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을 사용해 똑같은 양의 부품을 세척하는 남녀 노동자가 있다. 유기용제 벤젠은 호흡기나 피부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며 지방에 축적된다. 그런데 여성은 평균 체중에서 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25%로 남성(15%)에 비해 높다. 체지방이 많으면 축적된 벤젠이 인체 내부로 방출되면서 지속 노출이 길어질 수 있어, 같은 노출량이라도 여성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벤젠의 허용 노출 농도는 이같은 위험 격차를 담아내기 어렵다.
동일한 산업 내 같은 직업을 가진 남녀 노동자가 성별 특성에 따라 다른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제6차 한국근로환경조사>(2020년)에 따르면, 일터에서 남성은 주로 무거운 짐들기와 서 있는 자세, 여성은 반복적인 손 움직임과 앉아 있는 자세에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이는 성별 특성에 따라 할당된 업무가 달라진 결과로 분석됐는데, 일례로 공장에서 상대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은 남성 노동자는 상자 적재와 같은 강도는 높지만 저반복 작업에, 여성은 제품 포장과 같이 강도는 낮지만 고반복 작업에 투입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고반복 저강도 노동은 위험요인으로 인지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성별에 따른 위험 격차는 신체적 차이, 일터에서 작업 역할 차이에 의해서만 발생할까. 45세 이상 중고령 노동자를 대상으로 장시간 노동에 따른 정신건강 문제 위험을 조사한 결과(<국내 장시간 노동에 따른 정신건강의 성별차이(2025)>), 1주 55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의 우울 증상 발병 위험은 그보다 적게 일하는 노동자에 비해 12% 높았고, 여성은 29%까지 발병 위험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 성 역할 규범이 여전히 강한 중고령 세대에서 여성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을 끝내고 퇴근하면 다시 집에서 가사와 돌봄 노동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일터 밖에서도 여전한 성차별적 분업이 여성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또다른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일하는 '모두'의 위험이 드러날 수 있도록
여성 일터의 위험이 '사소한' 위험으로 취급될 때, '표준화된 남성'의 몸과 구별되는 여성의 몸이 '위험'을 말하지 못할 때, 젠더 관점의 위험성 평가는 어떻게 이 위험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개선해야 할까.
사실 막막한 질문이다. 여전히 어떤 위험은 정의할 언어도, 측정할 기준도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아래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위험성 평가 체크리스트 목록에 추가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보육교사에게 성인용 책상과 의자를 제공하고 있는지?", "여성 용접사에게 크기가 맞는 보호구를 지급하고 있는지?", "콜센터의 휴게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지는지?", "이동 노동자의 이동 경로 중 화장실과 휴게 공간이 확보되는지?", "방문요양보호사에게 현장에서 성희롱 등 위험 발생시 작업 중지 및 이후 절차를 안내하는지?", "가사노동을 포함한 총 근로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사업장에서 발생한 업무상 재해 및 폭력 피해는 성별, 국적, 숙련도, 연령 등 근로자 특성을 반영해 평가, 관리하고 있는지?"
체크리스트를 채워가는 것은 일터의 여성 노동자일 수도, 이주 노동자일 수도, 장애인 노동자일 수도, 남성 노동자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표준'이 아닌 자기 몸과 처지를 기준으로 확인한 위험의 체크리스트가 쌓여갈수록 일터 안전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는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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