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축복의 인연, 박태준과 황경로
이대환(작가, 『박태준 평전』 저자)
지난 2011년 12월 13일에 서거한 박태준 포스코 회장(이하 박태준)에게는 영혼의 동반(同伴)이며 필생의 동지로서 가장 가까운 최고 보좌가 있었다. 황경로 제2대 포스코 회장(이하 황경로)이었다. 1930년 생으로 박태준보다 세 살 아래인 황경로, 그가 2025년 12월 12일 향년 95세를 갓 넘어 영면에 들었다. 영겁의 우주적 시간에서는 세 해 뒤에 나서 열네 해 더 살았다는 것쯤이야 한낱 찰나에 불과하겠거늘, 두 사람은 마치 불가사의의 손길이 작용한 것처럼 거의 한날한시에 생을 마감했다.
박태준과 황경로는 육이오전쟁의 전우였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박태준은 1948년 단기 육사 6기로 임관해 38선 포천의 중대장으로서 전쟁을 맞아 사선을 넘나들며 포항-원산-청진-강릉으로 후퇴와 진격의 길을 누볐고, 황경로는 전쟁 발발 나흘째에 교복을 벗고 대한유격대에 들어가 구사일생을 겪은 다음 9주짜리 단기장교양성소를 거쳐 1‧4후퇴 무렵부터는 수색중대장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장교로서 처음 조우한 때는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한 박태준이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한 1954년이었다. 황경로는 교수부 장교였다. 육사에서 만나 서로 좋은 인상을 받은 두 사람의 장교 경력에는 공통점도 생겨난다. 두 차례의 미국 연수가 그것이다. 박태준은 미 육군 부관학교를 다녀왔고, 황경로는 미 육군에서 경리교육을 받고 경리장교로 전환했다. 늘그막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야전 보병장교가 내 기질에 맞았지만 경리 쪽으로 나간 것이 뒷날에 내 인생을 박태준 회장과 일하게 해주는 인연의 힘으로 작동했다.”
두 사람이 군복을 벗은 1964년, 황경로의 말 그대로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이 뛰어난 경리장교 출신의 그를 먼저 찾았다. 강의와 사업을 접고 대한중석에 합류한 황경로는 경영 혁신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대통령(박정희)이 대한중석 사장으로 내정한 독대자리에서 “저에게 맡기신 이상 정부와 여당의 간섭을 일절 배제해주십시오.” 하는 건의를 올려서 즉답 언약을 받아냈던 박태준은 황경로의 보좌를 받으며 소신껏 밀어붙여 사원 복지제도를 개선하고 축구팀을 국가대표처럼 육성하는 가운데 경영 첫해에 흑자체제로 전환한다. 이것은 앞으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의 대성취를 이끌어나갈 예행연습 같은 일이 된다.
젊은 시절의 황경로는 애연가였다. 박태준은 평생 담배를 멀리했다. 하지만 황경로와 마주앉으면 재떨이를 앞에 놓아줬다. 그러니까 박태준의 재떨이는 순전히 황경로의 재떨이였다. 그만큼 그는 아끼는 부하를 친구처럼 예우했다. 황경로는 대한중석 시절의 평생 잊지 못하는 추억도 털어놨다.
“1966년 어느 날이었는데, 내가 뜻밖의 횡액을 당했어요.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벽을 뚫고 침입해서 돈이나 귀중품이 없으니까 책을 싹 실어간 거야. 웃지는 못할 황당한 사건을 박태준 사장께 웃으며 얘기했는데, 책을 다시 구하라고 500만원을 주시는 겁니다. 그때로서는 제법 큰돈이지. 쌀이 귀한 시절에 쌀 사라는 돈은 안 주시고 책 사라는 돈은 주시더군요.”
1965년 6월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특명을 내린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테니, 임자는 종합제철소를 맡아.” 그때 그는 대한중석 내부에 테스크 포스(TF) 같은 종합제철 담당조직을 만들었다. 황경로가 책임을 맡았다. 포스코 창립 과정부터 재무관리를 총괄한 그는 당연히 1968년 4월 1일 포스코 창립요원이 된다. 첫 직책은 기획관리부장이었다. 말이 거창해서 부(部)였지, 부원은 창립요원 34명의 일원인 여상환뿐이었다.
포스코는 문자 그대로 무(無)에서 출발했다. 자본, 기술, 경험, 자원이 전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서방 5개국 8개사의 컨소시엄인 KISA에 의지했다. 그러나 박태준의 판단 그대로 “어중이떠중이 장사꾼”에 지나지 않은 그들이 차관조달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럴싸한 핑계거리는 세계은행(IBRD)에서 내놓은 ‘1968년의 한국에는 종합제철 건설이 시기 상조’라는 경제분석 보고서였다. 1969년 1월에도 KISA는 움직이지 않았다. 박태준이 미국 피츠버그로 날아가 KISA 대표와 담판을 짓기로 하면서 황경로에게 “회사 청산 준비를 해두라.” 하는 비밀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69년 1월에 회사 조직은 101명으로 불어나 있었어요. 회사 청산 방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모아놓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주선해주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대한중석 사람들은 대한중석으로 복귀시키는 길이 상책이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쩌나, 이런 골머리를 앓아야 했지요. 담판은 결렬됐으나 박 회장이 귀로의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전용 아이디어에 착안하고 비공식 선언을 하면서 그때부터는 회사 청산이 아니라 드디어 회사 건설로 나가게 됐는데, KISA하고는 안 된다, 일본하고 해야 성공한다, 이런 생각을 오래 해온 그분이 자본 조달의 마지막 퍼즐로써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착상했던 거지요.”
포스코 초창기 멤버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면 기술부문과 경영관리부문이다. 기술부문에서 포항제철소를 만들었다면, 경영관리부문에서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를 만들었다. 공장 만든 사람들과 회사 만든 사람들로 나눠보면 된다. 경영관리부문에서 황경로는 특정 부문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조직, 기구, 시스템, 기획전략, 규정, 대정부 업무 등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하지만 1970년 수준으로 보면 창의적인 것들이 많아서 그의 기질에 맞았다.
창업에는 회계질서가 곧 회사질서로 직결된다. 이 사실에 주목한 황경로는 박태준에게 ‘장부를 없애고 코드로 관리하자’고 건의했다. 1970년의 포스코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회사들이 캐비닛에 켜켜이 쌓아두던 ‘검은 장부’가 없어졌다. 대신에 전표가 등장했다. 타자기로 한 번 두들기면 겹겹의 묵지가 한꺼번에 똑같은 전표를 7장씩 생산했다. ‘통합관리’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이것은 ‘내부견제’ 효과로는 만점에 가까웠다. 모든 물품구매와 예산집행에 똑같은 전표가 7장씩이나 나오고 모든 관련 부서가 차곡차곡 철해둬야 하니, 누군가 엉뚱한 흑심을 품더라도 똑같은 전표의 상호 견제작용 때문에 적어도 대여섯 명은 공모해야만 이뤄질 것이었다. 여기에다 그는 ‘코드’를 부여했다. 창업 포스코의 공장과 부서마다 빠짐없이 주민등록번호처럼 ‘고유 코드번호’가 매겨졌다. 모든 비용이 당연히 코드번호를 통해 지출되고 결산됐다. 전표와 코드는 ‘투명경영’과 ‘효율경영’의 원천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황경로는 포스코에 컴퓨터 도입을 서둘렀다. 경제기획원, 대한항공 등에 컴퓨터가 도입되긴 했지만 국내 수준은 아직 프로그램 작성에도 못 미치고 있던 1970년, 포스코는 그해 12월 입사한 전산 담당 성기중을 중심으로 신일본제철의 전산시스템을 따라가려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연히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이때 그는 단 한 번 최고경영자의 사전 결재 없이 전산 인력을 특채했다. 박태준은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간부들의 전산화 시험성적과 추진실적을 직접 챙기겠다.”고 선언하여 오히려 경영쇄신에 박차를 가했다.
대망의 포스코 1호 컴퓨터(후지쓰의 FACOM 230-25)가 도입된 때는 1974년 6월. 준비가 잘된 회계관리부터 전산화를 도입했더니 대뜸 경영 사이클이 5일이나 단축됐다. 1975년에 미국 하버드대 교수 두 사람이 와서 포스코의 관리회계시스템을 보고는 어느 나라 어느 회사의 용역이냐고 물었을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 장부 없는 기업은 포스코가 유일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왔으나 잘 배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기도 했다.
박태준이란 인물의 위대성에는 ‘바른 건의를 수용한 안목’을 꼭 넣어야 한다고 강조한 황경로.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면 최고경영자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내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의 보좌를 했다는 점이고, 이는 지금도 전혀 후회 없다고 단언한 황경로. 2025년 8월 19일 내가 서울 역삼동 조그만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평소에 과묵한 그가 거침없이 말했다. 황경로 생애의 마지막 영상 인터뷰로 남은 작심 발언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오십년 지기인데 내가 박태준 회장을 존경하는 것은 그 양반의 리더십입니다. 박태준 리더십의 근본은 첫째 청렴결백, 둘째 지혜와 지식, 셋째 추진력입니다. 인재등용과 활용에는 천재적인 지혜를 가진 분입니다. 그 양반이 25년간 포스코 CEO를 역임했는데, 경영전략의 판단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이것이 포스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행복하게 일했어요. 육사에 같이 근무할 때는 몸이 통통하고 튼튼했던 양반이 포스코 CEO 25년 하고 나니까 몸도 홀쭉해지고 머리도 다 빠지셨는데, 참 보고 싶네요.”
창립 포스코의 황경로 밑에서 출발해 포스코 부사장을 역임한 여상환, 1937년 생으로 아직은 국제경영연구원을 꾸려나가는 그가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박태준 평전』을 쓴 이대환 작가가 포스코의 대성취는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시각에서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을 ‘위대한 만남’이라고 했는데, 포스코의 대성취를 들여다보면 ‘박태준과 황경로’의 만남이 ‘위대한 만남’으로 작동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평가에 나는 얼마든지 동의한다. 포스코의 대성취가 한국 산업화에 내려진 축복이었고, 영혼의 동반이며 필생의 동지로 살아간 ‘박태준과 황경로의 인연’은 최소한으로 좁혀 살펴도 포스코의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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