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 여성 80여 명을 성희롱한 신학생에게 사과를 요구한 피해자가 협박과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 300만 원형을 확정받았다.
가해자는 사과를 거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재판부는 사망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며 "잘못에 대해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타박했다. 여성계에서는 성희롱으로 입은 고통, 불가능해진 피해 회복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어 처벌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23일 프레시안 취재를 종합하면, 인천지법 제2-3형사부(판사 신순영·이수환·진원두)는 지난달 12일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명예훼손 및 협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A 씨에게 벌금 100만 원의 선고유예를 내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벌금 300만 원 형을 내렸다.
재판부는 A 씨가 단체채팅방에서 여성들에게 성희롱을 가한 B 씨의 발언을 캡처해 온라인 상에서 일부 지인에게 공개한 것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의 행위는 B 씨를 비방할 목적으로 보이고 명예를 훼손한 사실이 충분히 인정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거나 피고인에게 공익적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또 A 씨가 B 씨에게 자신을 비롯한 성희롱 피해 여성들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53차례 메시지를 보낸 게 공포심과 불안감을 유발하는 행동이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대표 사례로 제시한 메시지는 "다른 여성들한테도 다 밝히고 사과하시고 하나하나 하기 힘들면 사과문 게재하세요",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밝히고 사과하세요", "사과문 초안 완성되면 제게 먼저 보내주세요" 등이었다.
재판부는 "둘 사이의 메시지 내용, 전후사정, 대화 흐름 등을 종합하여 보면, B 씨가 A 씨 요청에 대해 계속해 사과하며 극심한 두려움을 호소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지인들의 신상정보를 캐묻거나 사과문을 요구하면서 그를 비난하고 몰아치는 내용이 주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이 사건 범행으로 B 씨는 상당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이며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며 "A 씨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질타했다.
앞서 신학생 B 씨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지인들과 함께 단체채팅방에서 미성년자, 지인, 애인, 연예인, 정치인 등 여성 80여 명을 대상으로 성희롱을 일삼았다. 동의 없이 일부 여성의 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B 씨 또한 당시 연인 사이였던 A 씨를 촬영한 사진 등의 일상을 올리며 성희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A 씨는 단톡방에서 'O집', '계X년'으로 불렸고 둘이 만난 날의 단톡방은 A 씨를 향한 성희롱으로 가득찼다.
A씨는 B 씨의 범행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를 요구했다. B 씨가 사과를 주저하며 자살할 것 같다고 하자 A 씨는 그를 달래면서도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B 씨는 2023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B 씨 유가족은 자식을 대신해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A 씨를 고소했다.
다른 가담자들도 A 씨가 다른 성희롱 피해자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인 중 한 명인 C 씨는 A 씨에게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 무시하고 성폭력 가해자라고 말하는 건 마음의 상처"라거나 "나도 조현병에 자살 이력이 있는데 봐 주면 안 되느냐" 등 조롱성 메시지를 수 차례 보냈다. '사필귀정(모든 일은 결국 반드시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A 씨가 처벌받는 게 정의로운 결말이라는 듯 행동하기도 했다.
C 씨가 고소한 건은 무혐의 처분이 나왔지만, B 씨 유족이 대리한 고소는 재판에 넘겨졌다.
A 씨가 여건상 기한 내에 상고 절차를 밟지 못해 2심 판결은 확정됐다. 결과적으로 성희롱 피해자인 A 씨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로 판결문에 남았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들은 재판부가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성희롱 피해자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었다고 질타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프레시안>에 "B 씨가 사망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A 씨는 가해자가 사망함으로 인해서 회복을 위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수사·재판까지 이어졌을 때 성희롱 피해자가 겪을 고통을 재판부는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소장도 <프레시안>에 "A 씨가 연인 사이었던 B 씨에게 겪은 성희롱으로 인해 여러 감정과 행동이 나올 수 있고 재판부가 이를 참작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듯해 안타깝다"며 "전체적인 대화와 상황을 보면 A 씨는 B 씨와 사건을 잘 해결하려고 노력한 정황들이 보이는데, 이번 판결은 너무 B 씨 입장만 이입해서 판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B 씨 사망의 책임을 A 씨에게 떠넘기는 판단이 특히 부적절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최 부소장은 "재판부는 성희롱 피해자에게 가해자 사망의 책임을 묻고 있다. 도대체 성희롱 피해자가 왜, 어떤 잘못을 인정해야 하느냐"며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양형사유"라고 꼬집었다.
한편 A 씨는 벌금 및 성희롱 사건으로 비롯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A 씨는 이를 알리는 글에서 "단톡방 참여자 중 기소된 가해자에게 검찰이 구형한 벌금은 30만 원, 피해 사실을 알리고 사과를 요구한 제가 선고받은 벌금은 300만 원"이라며 "여성 80여 명을 향한 집단적 성범죄보다 그 사실을 알리고 사과를 요구한 피해자의 행동이 10배 더 무겁게 처벌됐다"고 법원을 비판했다.
또 "판결은 (벌금) 300만 원이지만 제가 치른 대가는 그것뿐이 아니다. 수 년 간 이어진 수사와 재판, 가해자들의 괴롭힘과 2차 가해 속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받아왔다"고 호소했다.
그는 "피해 사실을 알린 일이 또 다른 처벌로 돌아오는 현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며 "이번 모금은 벌금과 회복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입을 연 뒤 어떤 대가와 비용을 감당하게 되는지 드러내고, 그 말하기가 혼자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기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이 판결 때문에 더 오래 망설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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