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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라는 '호모 루덴스', 규칙에 저항하는 새로운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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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라는 '호모 루덴스', 규칙에 저항하는 새로운 '플레이어'

[게임필리아] 새로운 호모 루덴스 찾기

게임학(Game Studies)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전을 꼽으라면 단연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꼽을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여전히 가벼운 오락거리 정도로 여겨지던 게임이 독립적으로 연구될 만한 진지한 탐구 대상임을 선언했던 일군의 젊은 게임 연구자들 -예컨대 에스펜 올셋(Espen Aarseth)이나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 같은 이들- 이 <호모 루덴스>를 호출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소한 오락거리라고 멸시 받았던 게임처럼, 과거 놀이(play) 또한 아이들의 철 없는 장난이나 노동 효율을 올리기 위한 부수적 재충전, 심지어는 비생산적인 탕진으로 폄하되곤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를 통해 인간 문화와 문명의 근본적인 원동력으로서 놀이를 재조명했다. 이 중요한 정전의 호출을 통해,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 돈을 탕진한다며 손가락질 받던 게임은 21세기 문화를 수행하는 능동적인 삶의 양식으로서 그 이론적 정당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게임학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어온 <호모 루덴스>지만, 그 출간이 1938년이었다는 사실에서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시대와 맥락을 살펴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위키이미지

우선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호모 루덴스>의 논지가 당대에 파격적이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인간을 '호모 파베르', 즉 무언가를 만들고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당대의 -오늘날에도 딱히 낯설지 않은- 이상적인 인간상과 맞닿아 있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서구의 '호모 파베르'들은 근면하게(?) 산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진하고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를 인류 문명의 진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맞닥뜨린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호모 루덴스>는 바로 이 시점 -정확히는 1차 대전 후의 환멸 속에서 2차 대전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던 시기- 에 출간됐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던 서구 문명이 어떻게 이토록 야만적인 파국에 이르게 된 것인지, 저서 전반에서 느껴지는 문제의식은 그와 같은 시대의 그림자와 무관하지 않다.

하위징아의 놀이론에 있어 도드라지는 '규칙'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당대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해서 <호모 루덴스>를 읽는다면 규칙이란 단순히 놀이를 성립시키는 조건을 넘어선다. 문명이 야만으로 폭주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일종의 윤리적 기제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위징아가 제시한 개념 중 게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매직서클(magic circle)'은 그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하위징아가 말하는 매직서클이란 놀이 규칙을 경계선 삼아 일상과 구별되는 신성한 놀이 공간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매직서클이라는 이 놀이 공간은 위아래 동서남북 없는 혼돈의 카오스(chaos)에 (규칙이라는) 선을 그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코스모스(cosmos)와 같다.

여기서 진짜 악당은 -사기꾼(cheater)이 아니라- 그 규칙을 어기면서 판을 깨는 자(spoil-sport)다. 사기꾼은 겉으로나마 규칙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이득을 얻는 존재라는 점에서 가식적으로나마 규칙을 전제(함으로써 코스모스 자체는 유지)한 셈이지만, 판을 깨는 자는 규칙으로 보호받는 조화로운 코스모스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당대 서구 사회를 휩쓸던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광기를 생각하면, 저서 전반에 걸쳐 규칙을 준수하는 페어플레이가 강조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코스모스가 무너지는 시대에 대한 하위징아의 불안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사람, 즉 '호모 루덴스'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규칙을 준수하면서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코스모스를 만들고 지켜내는 존재다. 즉, 생존과 효율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로움 속에서 받아들인 규칙을 지키면서 타인과 공정하게 놀이하는 진정한(또는 멀쩡한?) 인간이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가 보기엔 비효율적인 장애물일 뿐인- 놀이 규칙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구적 이성 너머의 창조성과 자유로움을 즐기면서도, 그 규칙을 합의하고 지키는 페어플레이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소통한다. 그렇기에 하위징아의 놀이론에서 규칙(과 그것의 준수)가 중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위징아의 놀이에 대한 고찰이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대로 유효한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하위징아의 논지에 따르면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근대화 시기는 놀이정신이 후퇴하면서 문명이 퇴보하는 시기가 된다. 하지만 대중 오락 및 여가의 발전사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는 이전까지 계급 및 신분적 제한때문에 오락과 여가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비로소 그 문이 열리는 시대였기도 하다. (예컨대 '페니 아케이드'는 동전 하나만 있으면 소소하게나마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과 신분의 벽을 넘어 오락과 여가를 즐기게 된 것을 문명의 퇴보라고 보기는 -물론 이를 놀이의 상업화나 저질 오락의 대량 생산으로 보는 시각도 없진 않지만 어쨌든- 좀 아쉽지 않겠는가.

▲애플 II에서 실행 중인 <브레이크아웃(Breakout)>. 개인용 컴퓨터 등장 초기, 비디오게임이라는 새로운 오락은 낯선 기술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였다.

나아가 하위징아가 중시했던 그 '규칙'의 성격 자체가 21세기 디지털 환경에서 완전히 달라졌다는 문제도 있다. 하위징아에게 있어 (놀이의) 규칙이란 광기로부터 문명을 지키는 신성한 약속이자 인간이 자율적으로 따르는 윤리였다. 하지만 오늘날 대표적 놀이인 게임을 보자. 그것은 사실상 알고리즘과 코드로 치밀하게 짜인 시스템이며, 그 규칙은 (자발적 합의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는 통제 -적어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에 가깝다. 코드로 구현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과연 하위징아가 말했던 자유롭고 자발적인 규칙의 준수와 같을까? 시스템이 허용하는 행위만을 착실히 수행하는 플레이어를,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게 놀이하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하위징아가 강조했던 규칙과 페어플레이가 오늘날에 이르러 무가치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바는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그 자체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게임 연구분야에서 그것이 다뤄지는 방식이다. <호모 루덴스>가 게임학 연구의 중요한 기반으로서 게임이라는 놀이의 가치와 의의를 구축한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놀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오늘날의 게임을 논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게임이라는 놀이가 20세기와 비교해서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AI와 빅데이터, 알고리즘이 현실에 치밀하게 스며들면서 인간이 설 자리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기대와 더불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게임은 인간과 기계 간의 미묘한 긴장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갈 분야다.

인간은 기계가 설계하고 운용하는 규칙 속에서 게임을 플레이한다. 동시에 인간 플레이어는 그 규칙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것을 비틀거나 탈주하기도 한다. 하위징아의 관점에서라면 일종의 '판 깨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비틀기나 탈주야말로 오늘날 인간 플레이어들이 키득거리며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아닐까? 자신의 행위를 촘촘하게 규정하는 시스템에 맞서 소소하게나마 저항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게임을 '가지고 노는' 플레이어. 바로 이 지점에서 하위징아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호모 루덴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호모 루덴스>가 오늘날 인문학적 게임연구에 새롭게 던지는 연구문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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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라

게임을 연구한다. 게임플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해왔지만 게임 연구를 접한 것은 대학원에 들어와 우연히 게임학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의 게임,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대표 저서로는 <게임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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