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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만 누르면 공론조사 끝? 남아공이 韓 '숙의공론'에 던지는 30년 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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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선택지만 누르면 공론조사 끝? 남아공이 韓 '숙의공론'에 던지는 30년 전 질문

[세계의 공론장] 남아공 몽플레 시나리오

남아공이라는 나라


30년 전 아프리카의 숙의공론 케이스가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살펴볼 만한 사례를 남겼다.

1990년대 초 남아공의 대표적 휴양지 몽플레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몽플레 시나리오)는 적대하던 진영들이 한 자리에 앉아 함께 미래를 숙의한 프로젝트로, 남아공의 미래를 네 갈래 시나리오로 그려냈다. 이 시나리오는 이후 30년간 남아공의 정책 언어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1996년 흑인 정권이 채택한 거시경제 정책 GEAR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동시에 그 과정과 절차는 사회적 대화 모델로 세계에 알려졌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바도 결과보다는, 민감도 높은 의제에 대해 서로 극도로 예민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숙의 프로젝트로 설계하고 기획했는가이며 이를 설계한 사람 - 오거나이저로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 - 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시민원탁회의, 공론조사, 사회적 대화 같은 자리들이 매년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 숙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1991년의 남아공

1948년부터 1991년까지 남아공에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제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어로 '분리'라는 뜻으로 인종에 따라 사람을 분리한 법인데 당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흑인은 시민권이 없었고 백인이 사는 동네에 살 수 없었으며 학교도 결혼도 같은 인종끼리만 허용되었다.

이 제도에 가장 강하게 맞선 인물이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다. 변호사 출신으로 흑인 해방운동을 이끌던 그는 1962년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 섬의 감옥에 27년을 갇혀있다 1990년 2월 풀려났다. 백인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F. W. de Klerk)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고, 만델라의 석방과 함께 흑인 해방운동의 주축이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등 야당들이 합법화되었다.(두 사람은 1993년에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1990년 남아공은 '흑백갈등'은 물론 '백백, 흑흑 갈등'으로 평화는 멀리 있었다. 백인 강경파는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보수당과 극우 무장단체(AWB)가 개혁에 반대했다. 흑인 진영 내부에서도 주도권을 둘러싼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코사족(Xhosa) 중심의 ANC와 줄루족(Zulu) 중심의 인카타자유당(IFP)이 부딪혔다. 1990년부터 1994년 사이 정파 간 무력 충돌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백인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한 사람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옛 질서는 무너졌으나 새 질서는 아직 서지 않은 시간이었다.

몽플레에 모인 사람들

1991년 가을 케이프타운 외곽의 작은 컨퍼런스 센터에 스물두 명이 모였다. 흑인 해방운동을 이끌던 사람들, 백인 정권의 기득권 인사들, 그리고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민사회의 지식인들이었다. 불과 한 해 전까지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던 진영이다.

스물두 명은 1991년 9월부터 1992년 3월까지 세 차례 워크숍을 진행했다. 몽플레(Mont Fleur), 이 장소의 이름이 그대로 프로젝트의 이름이 되었다.

그 결과로 함께 그려낸 것이 남아공 국민이면 누구나 습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네 마리 새로 1992년부터 2002년까지 남아공이 걸을 수 있는 네 갈래 미래의 길을 비유한 몽플레 시나리오다.

  • '머리를 모래에 묻은 타조(Ostrich)'처럼 백인 정권이 흑인 다수의 현실을 외면하다 무너지는 미래,
  • '절름발이 오리(Lame Duck)'처럼 새 정부가 어느 쪽도 결정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미래,
  •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루스(Icarus)'처럼 흑인 정권이 무리한 복지 확대로 경제를 무너뜨리는 미래,
  • 그리고 '무리지어 천천히 함께 비상하는 플라밍고(Flight of the Flamingos)'처럼 모든 진영이 점진적으로 함께 일어서는 미래.

단순한 비유같아 보이는 네 마리 새의 이름은 이후 30년간 남아공의 정책 방향을 좌우했다.

1996년에 흑인 정권이 출범한 직후 남아공 정부는 '이카루스'의 추락을 피하기 위해 강도 높은 거시경제 정책을 채택한 GEAR(Growth, Employment and Redistribution, 성장·고용·재분배)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를 주도한 재무장관이 몽플레에 참가했던 트레버 매뉴얼(Trevor Manuel)이다. 시나리오의 이름이 정책의 언어가 된 것이다.

몽플레를 만든 두 명의 퍼실리테이터

몽플레의 얼굴로 흔히 알려진 인물은 아담 카헤인(Adam Kahane)이다. 당시 다국적 에너지 기업 쉘(Shell)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을 담당하던 30대의 캐나다 청년이었고, 이후 그가 쓴 〈통합의 리더십〉이 세계적으로 번역되며 그의 이름이 몽플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처음 구상하고, 적대하는 진영들을 한 자리에 끌어들여,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판을 짠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웨스턴케이프대학교(University of the Western Cape, UWC) 사회개발연구소(Institute for Social Development)의 피터 르 루(Pieter le Roux) 교수다.

카헤인이 워크숍 안에서 대화를 이끈 퍼실리테이터였다면, 르 루는 그 워크숍 자체를 기획하고 설계한 오거나이징 퍼실리테이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 보이지 않는 많은 기획과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가(host) 초대하면 거부당하지 않을 것인가', '자금은 어디서 가져와야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것인가', '진행은 누구에게 맡겨야 모두가 신뢰할 것인가'. 이 질문들을 기획하고 답을 내는 건 숙의공론 이전에 마무리되어야 할 절차이기 때문이다.

▲ 영화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Mandela: Long Walk to Freedom, 2013년) 스틸샷.

웨스턴케이프대학교(UWC), 좌파의 지적 고향이 된 학교

1959년 케이프타운 외곽에 설립된 웨스턴케이프대학교(UWC)는 당시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라 유색인종 학생을 백인 학생들과 분리해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1980년대를 지나며 저항을 시작했고,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백인 교수들과 흑인 해방운동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모여들면서 1990년 무렵에는 '좌파의 지적 고향(Intellectual Home of the Left)'이라 불렸다.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부가 학술적 자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 가운데 하나가 된 것도 이 시기다.

이 학교의 사회개발연구소는 사회복지와 빈곤 정책을 다루는 곳이었으며, 1991년 당시 소장이 피터 르 루였다.

한 지식인의 두려움

만델라가 풀려난 1990년 이후 르 루는 한 가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인 정권이 무너지고 흑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지만, 정작 정권 교체 이후가 더 문제였다.

"좌파가 권력을 잡고 경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동할까 봐 두렵다. 우리는 저항에서 재건으로 나아가야 한다."

흑인 해방운동을 지지해온 학자가 흑인 정권의 경제 정책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의 두려움은 어느 한 정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것으로, 정의의 회복과 사회의 생존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두려움이 몽플레의 출발점이다. 르 루는 자기 두려움을 보고서나 정부 건의로 푸는 흔한 길을 가는 대신, 자기 두려움을 다른 진영의 두려움과 한 자리에 놓는 길을 택했다. 백인 기득권은 흑인 정권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흑인 해방운동 내부에도 권력 이양 이후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려움의 방향은 달랐으나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같았다. 르 루는 이 공통의 두려움을 자리의 재료로 삼았다.

독일에서 가져온 중립 자금

모두의 두려움을 함께 풀어내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했다. 자금, 퍼실리테이션, 그리고 그 퍼실리테이션을 운영할 사람. 르 루는 이 셋을 모두 남아공 바깥에서 가져왔다.

먼저 자금을 요청한 곳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riedrich-Ebert-Stiftung, FES)이었다. 1925년에 사망한 독일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사회민주당계 공익 재단으로, 1980년대부터 남아공의 흑인 해방운동을 지원해오다가 1991년 케이프타운에 첫 공식 사무소를 연 참이었다. 자금이 남아공 안에서 들어올 경우 백인 기업의 자금은 해방운동 측이, 흑인 단체의 자금은 기득권 측이 의심하기 마련이었지만, 외국 재단의 자금은 그런 의심에서 비껴 있었다. 르 루는 이 자금을 '중립 자금(Neutral Funding)'이라 불렀다.

다국적 기업에서 가져온 퍼실리테이션

두 번째로 필요했던 것은 퍼실리테이션에서 어떻게 중립성을 보장할 것인가였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노동자에서 경영자까지, 빈민을 대변하는 단체에서 자본을 대변하는 단체까지, 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이어야 했다. 적대하던 진영을 한 자리에 앉혔다고 대화가 시작되지는 않으므로 무엇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틀이 있어야 했는데, 그 틀 자체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르 루가 가져온 것은 다국적 에너지기업 쉘(Shell)의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 기법이었다. 남아공의 정치와 무관한 곳에서 만들어졌으면서도 미래를 다루는 데 이미 검증된 도구였다.

르 루는 쉘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시나리오 플래닝의 사회적 영향력을 넓히려던 쉘은 이 요청에 응했다. 워크숍 진행자로 파견된 사람이 30대 초반의 캐나다인 시나리오 담당자 아담 카헤인(Adam Kahane)이었다. 카헤인은 남아공의 어느 진영과도 이해관계가 없었고, 영어로 진행된 워크숍에서 그의 외국인 억양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진영의 참가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중립적 리더십(Neutral Leadership)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영국에서 가져온 대화 규칙

세 번째로 필요했던 것은 대화의 규칙이었다. 적대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도 자기 진영의 입장만 반복해서는 진전이 없고, 진영의 외피를 잠시 벗고 솔직한 말을 하려면 그 솔직함이 자기 진영에 약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했다.

첫 번째 규칙은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가 만든 '채텀 하우스 룰(Chatham House Rule)'이었다. 회의에서 나온 발언의 내용은 외부에 공유할 수 있으나 누가 그 발언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는 단순한 규칙으로, 적대 진영의 인사가 자기 진영의 입장과 다른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자기 이름과 함께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보장을 통해 솔직한 발언을 끌어내는 장치였다.

두 번째 규칙은 '선호가 아닌 논리(Logic, not Preferences)'라는 원칙인데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는 흔히 자신의 희망을 얘기하기는 즐겨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상해보는 토론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못하다.

모든 것을 묶은 한 가지 - 중립성

세 곳에서 가져온 도구들을 하나로 묶은 원칙은 중립성이었다. 르 루가 명시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내린 모든 선택의 기준이 그것이었다. 자금이 외국 재단에서 들어와야 했던 이유도, 방법론이 정치 단체나 학계가 아니라 기업의 도구여야 했던 이유도, 대화 규칙이 발언자 신원을 가리는 방향이어야 했던 이유도, 진행자를 외국인으로 영입한 이유도 모두 같았다.

중립성은 어느 편을 들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어느 편의 입장과도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 위치가 만들어져야 적대하던 진영들이 그 자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적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불어 공론의 출발점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를 보장하는 것도 중립성이다.

르 루 자신은 백인 자유주의 좌파 성향의 학자였으며, 그가 몸담은 UWC는 좌파의 지적 거점으로 불리던 학교여서 객관적 조건만 보면 르 루는 중립적 인물이 아니었으나, 그는 자기 위치를 자기 작업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그가 만든 자리, 그가 끌어온 자금, 그가 영입한 진행자가 모두 그의 색깔과 분리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중립성은 르 루의 속성이 아니라 그가 짠 판의 속성이었다.

적대 진영 끌어들이기

판이 짜여도 사람이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1991년의 남아공에서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부와 백인 기득권 인사가 같은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어느 쪽이든 자기 진영에서 의심받을 수 있는 정치적 위험이었다. 르 루는 양쪽을 따로 만나 서로 다른 언어로 설득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흑인 해방운동 측에는 시나리오 플래닝이 정책 강요가 아니라 가능성의 탐색이라는 점을, 백인 기득권 측에는 새로운 질서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미리 그려보는 일이 자신들의 자산과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식이었다.

최종적으로 모인 인원은 스물두 명으로, 흑인 해방운동 진영 8명, 백인 기득권 진영 6명, 시민사회 8명의 구성이었다. 해방운동 진영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경제기획 책임자와 차세대 경제 정책 담당자, 좀 더 급진적 노선이었던 범아프리카회의(PAC)의 활동가, 남아프리카공산당(SACP) 이론가 등이 자리했다. 기득권 진영에는 광업회의소의 대표와 보수적 성향의 은행가, 백인 국민당 계열의 정치인이 포함되었다. 시민사회 쪽에는 성공회 주교, 노조 지도자, 그리고 대학에서 미래 연구를 하던 학자가 있었다. 어느 진영도 다수가 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고 시민사회를 가장 많이 배치해 양 극단의 충돌을 완충하는 구성이었다.

미래를 하나로 예측하지 않는 법 - 단일 시나리오 선택의 오류에서 벗어나다

시나리오 플래닝 기법의 뿌리는 19세기 프로이센 군사 훈련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폴레옹에게 연전연패하던 프로이센은 군사 개혁에 나서면서 참모부를 정비했고, 그 일환으로 고안된 도상 훈련 게임이 모든 연대에 보급되며 정식 훈련법으로 자리잡았다. 독일어 'Krieg(전쟁)'과 'Spiel(놀이)'을 합친 '크릭스슈필(Kriegsspiel)', 영어로 '워게임(war game)'이라 불린 이 훈련은 지도 위에서 가상의 적을 두고 가능한 여러 상황과 그 대응을 모의해보는 훈련으로, 단일한 마스터플랜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의 판단 능력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사고법이 100여 년 뒤 대서양을 건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설립한 싱크탱크 RAND 연구소가 1950년대 워게임을 핵전쟁 분석에 적용했고, 그곳의 전략가 허만 칸(Herman Kahn)이 이 분석법에 'scenario(시나리오)'라는 이름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 도구를 다시 기업 전략의 기법으로 옮겨와 본격 발전시킨 곳이 다국적 에너지 기업 쉘이다.

자신의 의견을 오로지 현실가능성만 놓고 스스로 평가하다

몽플레 워크숍에서도 같은 사고가 작동했다. 9월 첫 모임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발표했다. 질문은 Why and then 원칙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주장의 근거와 그 이후만 질문이 가능했지 반박이나 비판은 허락되지 않았다. 11월 두 번째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4~5명씩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첫 번째 주장들을 분석해 구조화한 30개의 초안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검토의 기준은 단 하나, '현실성(Plausibility)'이었다. 정치적·경제적 인과관계가 성립하는가, 단순히 어느 한 진영이 바라는 미래라는 이유로는 부족했다.

가장 격렬한 충돌이 있었던 지점은 흑인 해방운동 측의 시나리오였다. 정권 교체 후 복지 지출을 대폭 늘리면서 동시에 고성장을 달성하는 경로다. 기업계 참가자들은 그렇게 재정을 운용하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국가 경제가 무너진다는 경제 논리를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이 시나리오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자기 진영이 가장 원하던 결말이 폐기되는 결정이었다. 이 검토를 거쳐 30개는 9개로 줄었고, 셋째 날에 다시 4개로 좁혀졌다. 남은 것이 타조, 절름발이 오리, 이카루스, 플라밍고 시나리오였다.

미니퍼블릭의 위기 - 숙의참여단과 대중 간 논의 과정과 결론에 대한 괴리

몽플레에서 한 일을 한국의 시민대표단은 하지 못했다. 한국의 숙의공론은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아왔지만, 정책당국이 공론조사가 마치 공론화의 전부인 것으로 치부하고 계속되는 문제를 방치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2024년 4월 국민연금 개혁 공론화에 시민 500인이 참여했고 생방송(KBS)까지 진행했다. 시민대표단은 한 달간의 학습과 숙의 토론을 거쳐 최종 조사에서 56%가 '소득보장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21대 국회에서 사라졌고, 이후 사회적 담론에 미친 영향도 크지 않았다.

2023년 4월의 '선거제도 공론화 500인 회의'에서는 시민참여단이 정보를 듣고 토의한 후 의원정수 확대 찬성이 33%에서 56%로 크게 늘었지만, 같은 자리에서 함께 발표된 시민 5000명 대상 일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의원정수 확대에 반대했다.

보수 진영 정치권은 후자에 무게를 두면서 공론조사 결과를 일반 국민 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비례대표 증원안에 대해 "상정 가치조차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시민이 결정의 자리에 들어왔으나 그 결정이 어디에도 가닿지 못한 것이다.

대학입시제도, 국민연금, 정치구조 개편까지 성격이 전혀 다른 의제들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 처리되었다. 시민대표단을 모집하고, 주최측이 정리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사전·중간·사후 설문으로 의견 변화를 측정하는 절차다. 쟁점이 이미 정리되어 선택만 남은 의제라면 맞는 방법이지만, 무엇이 쟁점인지부터 합의되지 않은 의제에는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가 주도한 공론화 의제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공론조사의 틀에 들어갔다.

미니퍼블릭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선택지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시민참여단의 역할이 제한된다는 데 있다. 의견 수렴 과정에서 도출되는 정말 다양한 수많은 의견들이 인지적 관점에서 명제화되고 구조화되지 못하고 단지 로데이터라는 이름으로 보고서에만 정리되는데, 이마저도 퍼실리테이터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공론조사가 유독 한국에서 사전 선택지가 이미 정해져 버리면서 시민은 피조사원의 자리에 머문다. 그저 학습하고 선택하는 역할에 제한되는 방식이 곧 공론조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계 단계의 두 가지 오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마치 표준이 된 것처럼 유통되고 있다.

첫째는 참여단 구성이다. 한국의 미니퍼블릭은 참여단 구성을 성별·연령·지역의 인구통계 비율을 맞추는 일에 집중하고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그러나 인구통계 비율을 맞춘다고 해서 그 의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한 자리에 모이지는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무게중심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표집의 정확성에 예산과 관심이 쏠리는 만큼 정작 시민들이 서로 토론하는 과정, 그 토론을 어떻게 설계하고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비중은 줄어든다. 누구를 앉힐 것인가에만 공을 들이고, 앉은 뒤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뒤로 밀린다.

표집 자체에 대한 지적도 있다. 공론조사의 창시자인 스탠퍼드대 제임스 피시킨(James Fishkin) 교수는 인구통계적 대표성에 더해 그 의제에 대한 의견과 가치관까지 균형 있게 표집해야 한다는 원칙, 이른바 '태도적 대표성(attitudinal representativeness)'을 일찍부터 강조해왔다. 한국에서도 2025년 국회 입법토론회에서 통계적 대표성과 담론적 대표성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2020년 영국 기후시민의회는 이 원칙을 분명히 적용했다. 108명을 표집하면서 연령·성별·민족·학력·지역·도시농촌의 인구통계 기준에 더해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 수준'까지 기준에 넣었고, 우려가 낮은 사람을 일부러 약간 더 표집해 의제에 회의적인 관점이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았다. 피시킨이 직접 운영하는 미국 'America In One Room'도 같은 원칙 위에서 약 500명을 인구통계와 태도의 양 측면에서 동시에 대표하도록 선발한다. 프랑스 기후시민의회는 인구통계 6개 기준만 사용했지만, 시민사회 자문기구가 의제의 틀을 잡는 단계에 직접 참여해 다양한 관점이 의제 자체에 반영되도록 보완 장치를 두었다.

여기에 더해 태도를 대표하는 기구가 직접 참여자를 추천하는 방식도 검토해 볼 만하다. 1991년 몽플레의 22명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둘째는 결정 방식이다. 주최측이 제시한 옵션 중 하나를 참여단이 선택하는 방식으로 표준화되었다. 직접 이해관계자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에서 새로운 안을 만들고 소수자의 입장을 살리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짜인 선택지 안에서 선호를 표시하는 작업이 숙의공론의 전부인 것처럼 전파되고 있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시나리오 플래닝의 본질과도 어긋난다. 몽플레의 22명은 30개의 시나리오 초안을 만들고 직접 검토해 9개로 줄였고, 다시 4개로 좁혔다. 불확실한 이슈에 대한 시민의견 수렴이 핵심인 공론화에서, 주최측이 제시한 것 중 하나를 고르는 작업은 그 핵심을 누락한 채 형식만 가져온 것이다.

이 구조는 시민을 결정의 자리에 앉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민이 심의만 하도록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시민 참여라는 외피를 쓴 토크니즘(tokenism)으로 흐를 위험이 그 안에 있으며, 시민이 직접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의제별 서사가 무뎌지는 역효과도 함께 따라온다.

몽플레의 22명이 인구통계 비율이 아니라 진영의 대립을 한 식탁에 앉히는 기준으로 구성되었고, 시나리오를 직접 만들고 직접 폐기하는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는 점은 한국이 다시 들여다볼 만한 가장 단순한 출발점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극복할 통합의 시그널, 중립성

르 루가 숙의민주주의를 찾은 이유는 '좌파가 권력을 잡고 경제를 무너뜨리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고, 그가 선택한 방안은 그 두려움을 다른 진영의 두려움과 한 자리에 놓는 통합의 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두려움이 있다. 올해가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폭염과 집중호우가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재배 한계선이 북상하면서 사과와 배의 주산지가 바뀌고 있다. 네팔에서는 히말라야 빙하와 암석이 무너지며 대규모 산사태와 홍수가 덮쳤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빠른 문명 전환은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두려움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중립성을 죄악시하는 정치 문화일지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30년 전 르 루 교수가 그랬듯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진영을 초대할 만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지금도 어디선가 참여하고 있을 전국의 시민 토론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런 시기 몽플레 케이스는 '두려움'을 '비전'으로 통합해낸 30년 전 먼 아프리카가 전해주는 시그널이자 이정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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