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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 지친 미국, 이제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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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 지친 미국, 이제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나

[다시! 리영희] 역사의 종말? : 민주당의 진보적 흐름은 건국 전 봉쇄된 평등주의 꿈의 부활이다

재건축이 맞는가 아니면 증축이 맞는가? 한국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민주당 내 논쟁 말이다. 지금 미국은 경이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에, 뉴욕 시장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인 조란 맘다니가 1% 지지로 선거운동을 출발해서 지금은 당당히 현직 시장이다. 그곳은 원래 진보의 텃밭인 뉴욕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나는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지만 일단 넘어가자).

이건 어떤가? DSA(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 소속은 아니지만 경합주이자 이번 중간 선거에서 상원의 핵심 승부처 중 하나인 미시건에서 압둘 엘사예드가 이스라엘 원조 중단 등 급진적 아젠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했다. 현재 그는 대부분의 본선 여론조사에서 박빙 우세를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전면에 내걸었던 AOC(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이 대선 초반 승부처 중 하나인 뉴햄프셔주에서 현재 민주당 대선 후보군 중 1위를 달리고 있다. AOC는 민주당의 다른 어떤 유력한 대선 후보들보다 젊고(1989년생) 급진적이며 여성 소수계(여성이자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고 탁월한 메시지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AOC의 미래잠재력을 볼 때 이후 민주당 대선 경선판이 본격화되면 승리 여부와 무관하게 그 바람은 과거 버니 샌더스 현상보다 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트럼프가 제왕처럼 군림하는 오늘날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이 세 사건들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 신간에서도 여전히 버리지 않은 '역사의 종말'(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능가하는 대안의 부재)이 아니라 역사의 귀환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 역사의 종말 이전에 두 가지 역사를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는 근대 초기 유진 뎁스와 같은 (공화주의적-자의적 지배에 대한 투쟁) 사회주의 부활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건국 직후 제임스 매디슨 계보의 자유민주주의(혹은 자유주의 헌정주의 민주주의) 최종 승리 이전에 열린 길이었던 급진 평등주의 대안의 부활이다. 짧은 에세이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기에 아래에 간단한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유진 뎁스의 부활이다. 2016년 버니 샌더스라는 민주사회주의자가 민주당 예비경선에 등장했을 때 나이 든 좌파 지식인들은 근대 초기 활약했던 사회주의 정당의 리더 유진 뎁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가혹한 탄압과 양당제의 구심력, 노동자층의 분열, 아메리칸 드림의 달콤함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미국 최초의 전국철도노조 조직화에 성공했던 인물 말이다.

뎁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민주당 위성 정당에서 벗어난 독자적 노동자 후보로 대선에 도전하였으며 1912년 선거에서는 6%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등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미국판 백기완(87년 독자 민중 후보)이다.

사실 샌더스는 호주머니 속에 뎁스의 이름을 새긴 열쇠고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 한다. 비단 백발의 샌더스만이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의 좌파 스타이자 대선후보인 AOC나 뉴욕시장인 맘다니는 오늘날 모두 유진 뎁스의 정신을 21세기에 재현하려는 후계자들로 언급되고 있다.

건국 전 강렬했던 평등주의 흐름의 부활도 기억하자. 흔히 미국의 주류 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나 책으로 공부한 지식인들은 건국 후 매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 류의 자유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역사에만 주로 익숙하다. 물론 이 자유주의 주류 가치는 오늘날 미국을 세계적 네트워크와 혁신 국가로 도약시킨 힘으로서 긍정적 역할을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빛만이 아니라 그림자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더구나 이 주류 흐름에 가려진 채 지하실에 봉인된 다른 조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를 균형 있게 관찰해 오지 않은 이들은 2016년 트럼프와 샌더스가 강력하게 부상하자 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취급했다가 부단히 당황하고 있다.

사실은 미국 건국 직전에는 트럼피즘과 마가 경향의 '신정국가' 스타일의 중세적 흐름은 매우 강했다(신정국가 옹호자인 밴스 부통령의 이란 침공은 그래서 무척 기괴하다. 이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진 뎁스 이전인 건국 직전과 직후에 강력하게 존재했던 또 하나의 흐름인 민중적 참여와 통제의 공화주의를 기억해야 한다.

비록 샌더스는 뎁스와 달리 독립적 노동자 정당의 꿈 대신에 민주당 내 좌파 블록 전략으로 꿈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추구하는 가치는 그리 다르지 않다. 자의적인 엘리트 지배에 대한 평범한 이들의 반감, 민중적 참여와 통제, 평등주의 공동체 비전 등은 사실은 뎁스가 아니라 건국 전 민중 운동에서부터 그 뿌리가 있다.

사실 우리는 미국 혁명이란 단어를 들으면 매디슨과 해밀턴 등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봉건 대영 제국을 상대로 한 자유의 투쟁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매디슨처럼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 후손들이 영국 압제에 대항해 일으킨 미국 혁명 이전에 뎁스의 선조들이 꿈꾼 다른 혁명도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바로 선주민인 인디언과 흑인 노예들이 유럽 백인 이주자들에게 대항했던 미국혁명 말이다. 아니 유럽 이주민도 하나가 아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매디슨과 같은 지주가 아닌 다수 민중들이나 여성 등 소수자들의 반 기득권(포퓰리즘) 반란도 미국 혁명의 주요한 흐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뉴딜 시기는 이 건국 전에 꽃핀 평등주의 흐름이 다시 발전될 수도 있는 계기였다. 물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그 자체만으로도 극단적 시장주의 흐름을 교정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잊어버린 게 있다. 뉴딜에는 유럽식 사민주의로 더 확장해 나가자고 하는 흐름이 일부 존재했다. 그 대표적 아이콘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보좌한 부통령인 헨리 왈라스이다.

그를 비롯한 뉴딜 블록 중 급진파들은 국내적으로는 모든 차별을 폐지하는 평등주의(이는 단지 자유주의적 권리 운동을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한 존재와 삶의 권리를 위한 제2차 권리장전 아젠다 운동 등으로 표현된다), 국제적으로는 반 제국주의 비전으로 뉴딜을 확장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남부에 기반한 보수파를 비롯한 민주당 내 중도파에 의해 건국 직후에 이어 다시 봉쇄되었다.

이후 민주당은 남부 민주당과 동부 엘리트가 주도한 중도화 가속화 및 신자유주의 혁명, 그리고 이 대안을 대표하는 신세대 리더를 내세우면서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빌 클린턴과 엘 고어가 바로 그들이다. 이는 레이건 보수주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대중 정당의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진보의 가치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렸다.

클린턴 시대에 좌절한 이후 미국 진보파들 중 일부는 오바마가 뉴딜 진보주의 확장의 부활을 만들어 낼 기수로 한때 착각했다. 하지만 그는 2008년 미국 자본주의 위기를 자유주의적 방식(은행 국유화를 검토하다가 결국 시장 친화적 안정화 조치로 선회)으로 돌파했다. 결국 클린턴과 오바마 시대의 '진보적 신자유주의'(경제는 시장경쟁, 사회문화는 진보적 정체성 강조)는 선거 경쟁력은 가졌지만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 민주당이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틈새에서 반 기득권을 내세운 트럼프와 마가 운동이 민중적 에너지를 납치했다.

오늘날 역사의 사이클이 바뀌어 민주사회주의를 내건 DSA 조직의 부상에 전 세계가 놀라고 있다. 물론 DSA는 각종 선거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 내고 있다. 한때 추수감사절 폐지(사실 굶주린 백인 이주민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가 인종학살을 당했던 네이티브 아메리칸 선주민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날은 기념하기 어렵지 않나?) 등 너무 극단적 목소리를 내고도 이번에 민주당 경선에서 석패한 프란체스카 홍 위스콘신 주지사 후보는 DSA의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홍 후보는 월가점령 시위 이후 오랜 풀뿌리 진보 활동을 해온 단련된 활동가로서 다음 주지사 선거에서는 거뜬히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위스콘신은 미국 백인 진보주의 역사의 산실이다. 그곳에서도 DSA 회원이자 한국계 미국인 주지사가 탄생될 수도 있는 정도로 미국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 외부에서 DSA 조직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DSA와 관련된 후보들이 강력하게 부상하는 이유는 DSA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미국식 자본주의 및 기득권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 대안에 대한 갈망에 더 기인한다. 그러하기에 지금 미국 내 좌파의 부상은 DSA 이념의 부상이라기보다는 반 기득권 포퓰리즘의 부상과 다른 세계에 대한 갈망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조지아에서 스타 대선 후보로 부상 중인 젊은 존 오소프 상원의원은 DSA와 거리가 먼 중도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반 기득권 포퓰리즘을 탁월하게 구사한다. 민주당의 또 다른 스타인 미셸 우 보스턴 시장은 DSA와 거리를 둔다. 하지만 뉴딜 진보주의와 실용주의가 적절히 섞인 스타일로 유능하게 시정을 펼치고 있다.

지금 미국은 좌든 우든 이념이 아니라 반 기득권 포퓰리즘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이들의 시대이다. 한때 트럼프의 우파 포퓰리즘이 시대의 대세였다면 그의 모순(머스크 등 빅테크에 특혜를 베푸는 반 기득권 포퓰리즘?)과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짓(이란 침공과 사익 추구 등)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시계추가 좌파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2025년 11월 4일, 뉴욕시 시장 후보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가 뉴욕 브루클린의 브루클린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열린 선거 행사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은 가끔 절제하지 못하고 너무 나가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의 우파 포퓰리즘이 오버한 후 AOC의 좌파 포퓰리즘도 오버했다.

나는 오래전 AOC에 대해 격찬과 동시에 우려의 칼럼을 쓴 바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의 밀레니얼과 Z세대는 역대 그 어느 시절보다 진보적이라는 지표가 사방에서 확인되면서 진보 지성과 민주당 주류 활동가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이 진보의 핵심 동력이다. 그들은 젠더와 인종에서 기존 가부장제 등 카스트 체제를 해체하고자 한다. 미투 운동과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의 성취는 이들에게 더욱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역사의 시계추가 이제 도도한 진보의 물결로 변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낙관이 비관으로 바뀌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2024년 대선 초반에 카멀라 해리스 대선 캠페인이 시대정신을 착각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시대정신은 단지 인플레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삶 지반이 흔들리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안감, 법과 질서에 대한 갈망 등이 부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리스 같은 주류 중도파는 이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레이건 스타일의 아메리칸 드림의 낙관론을 설파했다.

그리고 AOC 등 좌파는 어리석게도 '법과 질서' 담론을 우파에게 자진해서 헌납해 버렸다. 경찰 예산 축소, 이민세관단속국 해체 등 구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리가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이는 메시지 프레임 전쟁에서 우파의 강경한 법과 질서 담론을 강화하는 지혜롭지 못한 행보였다.

다행하게도 AOC는 진화하고 있다. 그녀는 얼마 전 유머를 섞어 워크 1기(Woke 1.0)는 미쳤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과거의 극단적 진보 수사와 거리를 두는 듯한 미묘한 제스처라 이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DSA 일부 분파들은 그녀의 주류로의 접근을 시도하는 일련의 행보에 불쾌해하거나 의구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DSA 일부의 진단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선거 공간을 활용하는 등대정당(이 또한 소중한 역할이다)의 역할이 아니라 권력을 취하고자 하는 정당의 정치인이라면 평범한 이들의 상식적인 희망과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설령 자신이 진보주의자라 하더라도 누가 자신 주변 어두운 거리에 경찰이 덜 보이고 마약쟁이들이 뒹구는 걸 좋아하겠는가?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인기 민주당 시장이자 중도주의자인 다니엘 루리나 더 진보적인 미셸 우 보스턴 시장의 재건축(실용주의와 중도확장)에 동의한다. 최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놀란다. 펜타닐 마약에 찌들어 좀비처럼 널브러져 있는 이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가혹한 처벌 패러다임보다 치료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진보주의자이다. 그러나 그 교화의 가치가 정도를 넘어 도시의 법과 질서를 해치는 것이 진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급진 사회주의자이지만 맘다니 뉴욕 시장도 나처럼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기존 처벌 위주의 정책을 펼친 제시카 티쉬 경찰청장을 유임시켜 DSA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하지만 DSA 멤버들은 이제 마오 전기를 그만 읽고 등소평 전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 흑묘백묘 아닌가? 맘다니는 그 경찰청장을 통해 그를 두려워하는 중산층들에게 다가가는 시그널을 보내고 동시에 자신만의 공동체 안전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민주당의 재건축과 증축론 둘 다 일리가 있고 동시에 둘 다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바마의 전 비서실장 출신인 람 이매뉴엘은 재건축론자이다. 버니 샌더스와 AOC는 증축론자이다. 그저 중도로 확장을 추구하면 다시 또 반 기득권의 우파 포퓰리즘에게 민중적 에너지를 내주고 패배한다. 그저 진보로 확장을 추구하면 다시 '안티 워크'(진보적 가치에 깨어있음에 반대하는 우파 운동; Anti-Woke)나 반공주의에 실탄을 제공한다.

최소한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뉴딜 진보주의 확장과 사회문화적 진보주의에서 적절한 균형의 공식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공식이든 지금까지 맘다니가 하듯이 평범한 이들의 관점에서 삶의 안정과 존엄이라는 등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들이 이 공식과 메시지를 찾아낸다면 아마 중간 선거와 대선에서 민주당과 진보파의 압승이 가능할 수 있다.

반대로 DSA의 민주사회주의 대 민주당 중도파의 신자유주의 이념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대립으로 국한되면 중간선거는 승리하더라도 다가오는 대선에서 트럼피즘의 후예들에게 승리를 헌납할 것이다.

미국 진보의 재부상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 속에는 복잡한 심경이 교차한다. 나는 오래 전 청주의 감옥에서 노회찬 대표가 소년 같은 눈빛을 빛내면서 브라질 룰라 노동자 정당 대표의 부상을 기뻐하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도 독자 노동자 후보가 정당을 만들고 집권할 날이 곧 다가온다고 그는 나에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백기완과 룰라의 길은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 같다. 독자정당 운동의 전략적 실패 및 위성정당의 등장과 조국혁신당의 약진 속에서 이 길은 더 험난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한국 버전의 DSA 인사라고도 볼 수 있는 양경규 현 정의당 대표에게는 미국 DSA와 달리 너무나 어려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물론 한국 진보주의는 젊고 대안적 가치를 지향하는 스타인 장혜영 전 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지형은 미국 민주당과 달리 자유주의 아젠다인 차별금지법조차 급진 정책으로 간주하는 민주당의 현실이 시사하듯이 더 퇴행적이다.

한때 잠시 노회찬이 추구했던 샌더스의 길(민주당 내 진보블록)도 미국과 달리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민주당 내에서 자체적으로 뉴딜 진보파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스탠포드 대에서 연구년을 하는 동안 오늘날 한국 민주당 내 분파 대결을 미국 청중들에게 강연할 때 참 곤혹스러웠다. 미국 민주당 내 진보 대 중도 블록의 대결과 달리 한국 민주당 내 분파 갈등을 어떤 정치학계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다들 자신들이 진보라고 하는데 글쎄 그들 중 가장 고통받는 약자들과 치열하게 연대하는 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록 미국의 민주당 사정은 우리보다 약간 더 낫지만, 미국도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지금은 진보파들이 부상하긴 하지만 이념이 부재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나르시시스트)인 트럼프와 달리 극단적 이념으로 체계적으로 무장한 밴스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미국 정치지형은 현 양당제와 금권선거의 자장을 흔들 수 있는 제도적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힘들다. 결국 미국 진보는 그 구조적 제약 속에서 부단히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은 상황이 더 나쁘다. 세계적으로 사례가 드문 위성정당 체제라는 창의적인 돌파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더 아쉬운 점은 한국에는 미국과 달리 현재 삶의 고단함으로 고통받는 평범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면서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 진보 리더가 아직 민주당은 물론이고 정의당 및 녹색당 등 진보 정당들에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자꾸만 1944년 뉴딜 진보 확장론의 기수였던 헨리 왈라스가 생각난다. 그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만약 국내외적으로 뉴딜을 더 진보적으로 확장하지 못하면 위험한 파시즘이 다가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의 예언은 한참 지나 오늘날 파시즘 도래 및 3차 대전의 어두운 가능성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존 니콜스는 2020년 <The Fight for the Soul of the Democratic Party(민주당의 영혼을 위한 싸움)>이란 저서에서 이를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응원봉 광장의 감동적 승리 이후에 계엄과 파시즘의 유령은 완전히 사라졌는가? 한반도에는 평화의 시대가 열렸는가? AI와 기후 위기 등에 대한 인간다운 대안은 실현되고 있는가? 이를 돌파할 작은 틈새를 만들어 낼 결선투표 등 다당제로의 진전은 이루어졌는가? 그리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제 헨리 왈라스가 과거 고민했던 더 존엄한 사회로의 확장의 꿈을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다시 꾸어야 한다.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을 시도해야 한다.

▶리영희재단 홈페이지 https://rheeyeunghu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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