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캔자스에서 6대째 내려오는 퀘이커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플로이드 슈모(Floyd Schmoe, 1895~2001)는 나무와 바다 생물에 빠져 살던 학생이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산림학을 공부하던 스물두 살 청년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총을 들 것인가, 감옥에 갈 것인가. 슈모는 세 번째 길을 골랐다. 갓 창설된 미국친우봉사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를 통해 대체복무를 신청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적십자 구급대에서 들것을 나르며 14개월 동안 전쟁난민이 살 조립식 집을 짓고 군 막사를 살림집으로 개조했다.
총알은 총을 든 사람과 망치를 든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슈모는 평생 여섯 번의 전쟁터에서 총격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총을 잡지 않았다. 남들은 쏘는 쪽이 이득이라고 믿을 때, 그는 맞는 쪽의 손해를 평생 기꺼이 떠안았다.
귀국 후 미국 레이니어산 국립공원의 첫 상근 자연해설가로 일했던 그는 워싱턴 대학교 등에서 산림생물학을 가르치며 해양생물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숲과 바다를 깊이 탐구하던 학자가 훗날 세상의 우물과 집터를 챙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면서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이 하루아침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슈모는 즉시 교수직을 내려놓고 친우봉사회 지역사무소를 맡았다. 일본계 학생들이 미국동부 학교로 전학해 학업을 이어가도록 주선했고, 수용소 내부를 돌며 주인 잃은 재산을 지키고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에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조사하며 '미친개 같은 평화주의자(rabid pacifist)'라는 딱지를 붙였다. 평화를 지나치게 열렬히 추구한다는 이유로 광견병 환자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으나, 이는 그에게 평생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슈모는 이를 "전쟁 중이라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잔학 행위"라고 비판하며 말뿐인 사과 대신 직접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구호 단체 '히로시마에 집을(Houses for Hiroshima)'을 직접 결성한 그는 1948년부터 4년간 히로시마에 21채, 나가사키에 12채 등 약 100가구가 비바람을 피할 지붕을 마련해 주었다. 병원과 고아원에 우유를 공급하기 위해 젖염소 250마리를 이끌고 입국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도시 하나를 파괴하는 데는 폭탄 한 발이면 충분했지만, 서른세 채의 집을 세우는 데는 4년이 걸렸다.
슈모의 발길은 한국으로도 이어졌다. 1953년 한국전쟁 피난민 소식을 접한 그는 곧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 집을(Houses for Korea)'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주민들과 함께 집을 짓고, 우물을 파 식수원을 마련했으며, 길과 관개시설을 보수하고 무료진료소를 운영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총성이 멎자마자 구호의 망치 소리가 시작된 셈이다.
이후 1956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국유화 여파로 포트사이드에서 4천 가구가 삶터를 잃었을 때도 그는 '이집트에 우물을(Wells for Egypt)' 사업을 일으켜 사막에 물 펌프를 설치하고 과수원을 조성했다.
1959년 17년간의 무급 봉사활동을 정리했던 그는 아흔둘이 되던 1987년, 미국 시애틀 워싱턴 대학교 인근에 '시애틀 평화공원' 조성을 시작했다. 1988년 일본 히로시마 평화센터로부터 받은 평화상 상금 5,000달러 전액도 공원 완성에 기부했다. 이 공원은 히로시마 원폭투하 45주기인 1990년 8월 6일에 완공되었으며, 슈모는 2001년 10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플로이드 슈모의 삶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미국 FBI가 슈모에게 붙인 '미친개 같은 평화주의자'라는 딱지처럼, 한국사회 역시 오랜 시간 편 가르기와 이념적 낙인을 남발해 왔다. 상대를 특정 딱지로 규정하는 정치는 그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함을 보여줄 뿐이다.
또한 슈모가 1917년에 이미 선택했던 대체복무는 한국에서 2018년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을 거쳐 2020년에야 뒤늦게 도입되었다. 총을 들지 않고도 국가와 공동체에 헌신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슈모는 일찍이 증명해 보였다.
과거 전쟁직후 이방인의 도움으로 진료소와 집을 얻었던 한국은 이제 원조 공여국이 되었으나, 난민 인정과 인도주의적 지원에는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뀐 만큼 은혜를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태도 전환이 요구된다.
가해국 시민이었음에도 피해국 일본에 건너가 집을 지었던 슈모의 행동은 국가 간 외교적 공방을 넘어선 인도적 실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전쟁 후 슈모가 구호활동을 펼쳤던 경기도 접경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한 구호나 말로만의 평화가 아니라 우물과 도로, 의료 인프라 같은 실질적인 삶의 기반이었다. 슈모는 그런 삶의 기반을 현장에서 뛰면서 직접 몸으로 마련 해 주었던 것이다.
플로이드 슈모는 평화를 말로만 외치기보다 벽돌처럼 한 장씩 직접 쌓아 올렸다. 역사의 기록은 총을 든 자뿐만 아니라 망치를 들고 집을 지은 자의 이름 역시 정확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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