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9일, 영국의 가까운 친구 안띠아 리(Anthea Lee, 1936–2026)가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났다. 1936년 2월 8일에 태어난 그녀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친 학자였고, 일찍 은퇴한 뒤에는 영적 치유 활동에 힘을 쏟았다. 나에게는 36년 동안 삶을 받쳐 준 나이 많은 벗이었다. 이 글은 부고인 동시에, 한 사람의 조용한 선의가 어떻게 역사를 이어 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안띠아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으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늘 따뜻하고 너그러웠다. 사랑을 말로만 두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1990년대 초 그녀는 에식스주 스탠스테드 퀘이커 모임(Stansted Quaker Meeting)의 서기를 맡았다. 오래된 모임집은 목재가 심하게 썩어 무너질 위기였는데, 모임의 통장에는 78파운드뿐이었고 수리비는 6만 2천 파운드에 달했다. 안띠아는 자선 신탁기관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고, 모임집은 1994년까지 복구되어 퀘이커들과 지역주민이 함께 쓰는 공간으로 남았다. 그녀는 친우들의 치유 모임(Friends Fellowship of Healing)에서 부서기와 위원을 맡아 치유 사역의 역사를 알렸고, 퀘이커 국제문제 대표단(Quaker International Affairs Representatives)과 사후세계 연구 퀘이커 모임(Quaker Fellowship for Afterlife Studies)에서도 활동했다.
나는 1989년 2월 4일 스승 함석헌(1901–1989)의 별세를 지켜본 뒤, 8년 일한 철도청에 사직서를 내고 이듬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에식스대학교 역사학과에는 합격했지만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해 8월 셰필드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낯설고 위축된 나에게 오전 회의가 끝난 뒤 한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띠아였다.
차를 마시며 그녀는 내 사정을 듣고 영국의 한 교육재단에서 2만 파운드가 넘는 장학금을 받을 길을 열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1993년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녀의 도움은 돈에 그치지 않았다. 학기 중 주말이면 런던에서 만나 미술관과 화랑을 함께 걸으며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한 번도 후원자처럼 굴지 않았고, 아는 것을 동등한 벗에게 나누듯 건넸다.
그 무렵 나는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났다. 의사였던 잉글 라이트(Ingle Wright, 1923–1997)다. 석사 과정에서는 김동길(1928–2022) 선생이 학비와 생활비를 대 주었고, 박사 과정에서는 잉글이 학비와 생활비를 선뜻 맡아 주었다. 당시 영국 장학 단체 250곳에 지원서를 보내고도 모자라 학업을 접을 처지에 놓였을 때였다. 나는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내 자녀들의 중간 이름을 '잉글'로 지었다.
그러나 첫 문을 연 사람은 안띠아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학부를 마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함석헌으로 학사논문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석사논문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1994)와 박사논문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1998)도, 국영문판 <함석헌 평전>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서양 대학에서 한국의 퀘이커 사상가를 학문으로 정리하려던 작은 시도는 그녀의 미소와 안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내 길을 대신 정해 주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인 10월 5일, 그녀가 있는 요양시설로 찾아갔다. 몸은 몹시 야위어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기억했다. 돌아서며 "나중에 봐요, 안띠아" 하고 말했는데,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목이 메었다. 되돌아가 그를 꽉 안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건넨 마지막 말은 "안녕, 성수"였다. 나흘 뒤인 10월 9일, 한글날 그녀는 조용히 떠났다. 그 짧은 인사는 지금도 마음속에서 울린다. 남편과 세 아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
안띠아의 삶은 개인의 미담으로만 남기기에는 아깝다. 오늘 한국사회에 던지는 물음이 적지 않다.
첫째, 제도가 놓친 자리를 이웃의 선의가 메우는 일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등록금과 생활비, 주거비에 짓눌려 배움을 접곤 한다. 나라와 대학이 장학제도를 넓혀야 하지만, 제도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여전히 필요하다. 정직한 사정을 듣고 길을 안내해 주는 어른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두터워진다.
둘째,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다. 지금 한국에는 수많은 외국인 유학생과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민이 산다. 그들은 대개 1990년 영국의 나처럼 낯설고 외롭다.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작은 환대가 한 사람의 평생을 바꿀 수 있다. 이들을 일손이나 학생 수로만 볼 것인가, 동등한 벗으로 맞을 것인가는 우리 사회의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다.
셋째, 공동체의 공간을 지키는 끈기다. 안띠아가 78파운드로 6만 2천 파운드를 마련한 일은 마을회관, 작은 도서관, 오래된 예배당처럼 사라져 가는 공동의 터전을 어떻게 지킬지 생각하게 한다. 지역이 줄어드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큰 결단보다, 신뢰를 쌓고 여러 곳에 도움을 청하는 꾸준한 발품이다.
넷째, 베풂은 시혜가 아니라 동등함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위아래로 갈리면 도움은 빚이자 굴레가 된다. 안띠아는 배운 사람이 배우는 사람에게, 나이 든 이가 젊은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법을 보여 주었다.
다섯째,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이어 가는 일이다. 잉글의 이름을 자녀에게 물려준 것처럼, 은혜를 이름과 삶에 새겨 다음 세대로 넘기는 문화가 필요하다.
여섯째,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는 돌봄이다. 고령화가 빠른 한국에서 요양시설의 노인은 가족과 이웃에게서 멀어지기 쉽다. 시설을 늘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곳에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이다. 작별의 순간에 곁에 있어 주는 일은 어떤 제도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안띠아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다만 내가 받은 만큼 다른 이에게 건네는 것이 그를 기리는 길이라고 믿는다. 함석헌의 사상이 앞으로도 읽히고 연구되도록 힘쓰는 일, 낯선 땅에서 길을 찾는 젊은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그 시작이다. 조건 없는 너그러움은 국적과 나이와 문화의 벽을 넘는다. 그녀가 내게 가르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띠아,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믿어 주어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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