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Distance made the heart fonder 거리가 멀수록 커지는 그리움
Chapter 7 Capital with a difference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수도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 자리 잡자 나는 중국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을 위협하는 소련 수정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격렬한 반응은 어떤 것인가? 그 질문을 따라 중국과 그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남방 해상세계의 배경을 벗어나 대륙 방면 중국사의 수수께끼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캔버라로 감으로써 거리는 더 멀어졌으나 북쪽을 바라보는 자세는 그대로였다.
캔버라는 난징, 런던과 쿠알라룸푸르(KL)에 이어 내가 네 번째 살아보는 국가 수도였는데, 다른 곳들과 아주 달랐다. 열일곱 살 때 난징에 가서는 한 나라의 수도라도 다른 정권으로 넘어갈 때는 위상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는 오래된 도시 런던의 맛을 즐겼고, 이어 독립 말라야의 수도가 된 지 2년도 안 된 KL과 만났다. 말라야대학 학생으로 싱가포르에서 지낸 5년도 수도의 경험으로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싱가포르는 백년 동안 여러 면에서 해협식민지의 실질적 식민지 수도 노릇을 했고, 50년 동안은 영령 말라야의 권력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이후로는 물론 자기 수도였다. 그러니 나도 일종의 수도 전문가로 행세할 만한 사람이다.
캔버라의 첫 번째 놀라운 점은 그 나라의 중요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생활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본국“인 영국으로부터 먼 거리를 2중으로 체감하게 한다. 나처럼 새로 오는 사람에게 캔버라의 넉넉한 공간은 광대한 대륙에 적은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에 방문했을 때도 ANU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 밖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아시아와 남태평양 지역의 연구자이기 때문일 것이라 여기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번에 와서는 ANU에 외국 출신 학자들이 정말로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고 정부의 행정과 군사 요원 대부분도 국내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삼 놀랐다. 마거릿은 만나는 사람 중 캔버라에 부모님 모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까이 없는 것이 자기들만이 아님을 곧 알아챘다. 덕분에 우리는 이방인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참 주민으로서 신참들을 맞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이 대륙에 여러 대 살아온 사람들과 접촉이 별로 없었다.
이 대륙국가에 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지만, 더 잘 알기 위해 애쓸 필요도 크게 느끼지 않았다. 내게는 이 나라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한 다른 나라에 관한 방대한 문서를 점검하는 학문적 과제가 있었고, 그 과제를 하루빨리 완수하기 바라고 있었다. ANU 밖에서 알 필요가 있는 곳은 캔버라 도시와 그 주변부뿐이었다. 그때 캔버라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인구가 적은 만큼 외국 공관과 외교관들의 존재가 뚜렷했다. 모든 대륙에서 온 외교관들이 있었는데, 그중 유럽과 아시아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도착 신고를 하러 말레이시아 대표부에 들렀을 때 보니 말라야대학의 제자 아짓 싱이 정치 부문을 맡고 있었다. 그가 새 대표 도널드 (푸아드) 스티븐스에게 안내해 주었는데, 사바 주 수상을 지낸 사람이었다. <건국방략>을 편집할 때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여의치 않은 일이 있었다. 그 책이 나온 뒤에 KL에서 만난 일이 있다. 리콴유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구호가 떠올라 있을 때였는데, 스티븐스는 툰쿠 압둘 라만 수상과의 회담에서 사바 주에 유리한 결과를 얻을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캔버라에 와 있던 사실에는 싱가포르 이탈 후 그가 원하던 것을 이뤄내지 못한 결과로 볼 측면이 있었다. 연방 정치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인에서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다. 내 책을 기억한다며, 그 직후 싱가포르의 이탈 때문에 책의 가치가 퇴색한 사실을 아쉬워했다. 자기 주 사바의 장래에 대해 아직도 갖고 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때 나는 열심히 들으면서도, 그가 정치계를 떠난 사정은 언급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했다.
ANU 사람들 모두 연방 수도가 국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에게는 그 거리가 특이한 헌정질서의 척도로 느껴졌다. 공무원, 학자, 외교관들이 넘쳐났다. ANU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강연과 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하는 외교관이 많았고, 나도 그들과 근북(近北) 지역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다. 많은 사람이 민감하게 여기는 하나의 주제가 있었다: 어느 쪽 중국을 중국으로 인정할 것인가?
내 선임자 패트릭 피처럴드 교수는 풍부한 중국 경험과 중화인민공화국에 관한 최근의 저술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중화인민공화국 승인을 지지하고 공산당이 지원하는 호-중(濠-中) 우의협회 회원이기 때문에 꼭대기의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여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직 장제스의 중화민국(타이완)과 국교를 유지하고 있었고, 타이완에서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고위 외교관을 이곳에 보내고 있었다. 타이완 대사관에서는 우리 동료 중에 베이징 편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떤 편인지 궁금해할 것이라고 내가 도착할 때 주의를 준 동료들이 있었다.
나는 말라야(후에는 말레이시아) 국민이지만, 속인주의(jus sanguinis) 원칙을 따르는 중국의 국적법으로는 무시되는 사실이었다. 내 아버지가 중국인이면 나도 중국인이고, 타이완 정부는 나 같은 사람이 국적을 포기하는 길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영국 입장을 물려받아 베이징과 타이완 양쪽과 비공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상관하지 않는 실리적인 상인들은 어떤 때는 베이징과 어울리다가 어떤 때는 타이완과 어울리는 식의 행태가 가능했다.
1968년까지 타이완 대사가 두 번 바뀌었다. 전임자였던 제임스 셴은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장 총통과 가까운 전직 언론인으로 내가 가기 조금 전에 캔버라를 떠나 외교부 부부장에 취임했다. 후임자인 샘슨 C 셴은 고참 외교관으로, 스탈린 시대의 야만성을 폭로한 빅토르 크라프쳉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의 번역자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1964년 프랑스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후 그곳 신생국들이 배를 갈아타는 모습을 본 사람이었다. 베이징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늘어나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지도자들의 태도가 엇갈려 있는 상황을 그는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 관해 대사관에서는 내가 말레이시아 사람으로서 타이완 쪽 초청을 받아들인 일이 없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 봉쇄를 잘못된 일로 여기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ANU 관계 업무에서 나는 신중하고 엄정한 자세를 지켰다. 셴 대사와는 끝까지, 1973년에 대사관을 닫고 부지와 건물을 처분할 때까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25년 전 내가 난징에서 겪은 상황이 떠올라 애틋함을 느꼈다.
도착 후 몇 달 동안 마오쩌둥 중국의 건국 과정과 괴이한 문화혁명에 관한 도서와 문서를 멘지스도서관에서 열심히 찾아보았다. 중국학 동료들이 좋아할 일 같지는 않았으나 각자의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 한 불평은 없었다. 근대사 연구자인 로후이민(駱惠敏, 1925-2006) 한 사람만이 근대사 분야의 교수 초빙과 학생 모집을 도와주었다.
캔버라에서 3년 지내면 중화인민공화국에 관해 충분히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KL을 떠나기 전에 구할 수 있는 대로 언론 보도와 잡지와 책을 훑어보았고 지난 십 년간 만난 시사를 다루는 학자와 활동가들의 업적을 되짚어보았다. 도착 후에는 ANU와 캔버라 국립도서관의 소장 문서를 파악하고 멜버른과 시드니의 도서관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다녔다.
마거릿은 1965년의 방문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쉽게 자리 잡았다. 새로 친구들을 사귀고, 따뜻한 환영을 베푼 내 동료들을 부부동반으로 집에 초대했다. 그곳 생활의 속도와 방식을 쉽게 받아들였다. 20년 넘게 싱가포르와 KL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정규직을 갖고 있었고 집에서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동안은 자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양보해주어서 고마웠다. 열한 살의 밍, 아홉 살의 메이와 일곱 살의 란이 모두 제 앞을 가리고 나아가 집안일도 도와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내가 내 할 일에 시간을 마음껏 쓰기 바라는 마거릿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는 다른 중국계 학생이 없었다. 영어를 제대로 하고 학교공부에 어려움이 없도록 마거릿이 살펴주었다. 아이들도 금세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처음 몇 주일 동안은 그곳 아이들의 노는 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 좀 있었다. 밍의 학교 친구들이 밍을 떠밀어도 밍은 되떠미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거릿은 캔버라가 KL과 어떻게 다른 곳인지 설명해주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떠미는 일이 종족 갈등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밍은 유도를 배우고 친구들을 되떠밀면서 잘 어울려 놀게 되었다.
딸애들은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나무 위에서 사는지 친구들이 묻는다고 했다. 우리가 멋진 새집에서 살고 하녀들도 있다고 대답하면 물은 아이들이 놀랐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았고, 아이들이 새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데 마음을 놓았다.
말레이시아를 떠나기 직전에 구입한 차를 가져와 그것을 몰고 캔버라 교외와 이웃 도시 퀸베이언, 관목지대와 진더바인 너머 구릉과 계곡을 돌아다녔다. 뉴사우스웨일스 해안의 별장으로 초대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북쪽으로 아보커 해변까지 가보기도 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우리가 아주 긴 휴가를 왔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2259 [페리스코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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