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입시 의혹 논란이 온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언론은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촛불집회를 비중 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더 근본적 차원에서 이들 대학생의 분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지난달 25일 대학생인 황운중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한 글을 다듬어 <프레시안> 지면에 다시 소개키로 했다. 편집자.
기성세대가 현 20대의 열패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조국 전 수석을 둘러싼 사태에 20대가 그 어떠한 사건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그러한 답답증과 울분에서 기인했으리라.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런 청년들의 성토에서 나는 가장 암울한 징후를 엿본다.
공정함이 무엇인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럴싸해 보이는가? 그런 와중에 당신도 모르게 그 단어 안에서 당파성은 죽어간다. 공정함이 정의와 등치로 여겨지는 20대의 공허한 담론 속에 정치는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담론에 필수적인 상호투쟁의 장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구시대적 산물로 치부된다. 따라서 그것은 애당초 담론이 될 수도 없다. 공정성 '담론'을 나는 혐오한다. 담론이 아닌 것이 담론 행세를 하는 것은 가장 해악적이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시험과 제도를 통해 입신양명의 출세길을 천편일률적으로 구속해 놓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시스템이 우리 머리 위에 있다. 머리 안에 있다. 공정성을 외치는 자들은 그런 시스템의 항구성을 전제한다. 전후좌우와 내외에 뺑 둘러진 시스템에 압도되어, 그 바깥을 볼 용기를 현실타협주의로 억누른다.
제한된 먹이를 일부가 배불리 독점하는 구조를 지적하지 않고, 나도 좀 먹자고 들러붙어 있는 꼴이다. 언뜻 정의로움을 자처하며 기회의 불균등을 성토하고 피해자 서사를 주섬주섬 차려입지만, 그들에게 먹이 부스러기를 던져주면 (즉 '불공정'한 제도를 개정해 주면) 불만은 쏙 들어간다. 애당초 그들의 불만은 근본적으로 담론화할 수 없는, 범박하고 지독히 한갓된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물론 거대 양당의 어느 편을 막론하고, 기득권층은 너나 할 것 없이 제한된 자원과 기회를 독점하고 저들끼리만 나눠왔다. 이런 작태를 우리가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만 먹냐? 나도 좀 먹자"의 층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정은 평등의 보조를 받지 않고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왜 마주볼 수 없는지를 묻지 않고서 다음 질문을 성급히 던져서는 안 된다. 촛불을 들고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에서 "조국 OUT"을 외치는 이들 중에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탈북민 모자의 죽음을,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의 지성적 퇴락을 똑같이 성토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먼저 짚어 볼 일이다. 왜 청소노동자는 쉼터에서 에어컨을 가질 수 없었는지, 왜 탈북민 모자는 생명을 지속할 수준이나마의 음식조차 가질 수 없었는지, 왜 대학원생들은 기본적인 수준의 인간적 존중을 요구할 수 없었는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 보았는가? 이번 일을 계기로 아니나 다를까 "모든 입시 체제를 정시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불쑥불쑥 온 커뮤니티에서 고개를 내민다. 있는 놈들이 자소서니 생기부니 다 해 먹으므로, 공정한 일괄평가와 점수 줄 세우기로 과정상의 입말들을 막자는 것이다. 평등에 대한 고찰은 없고 공정에 대한 분노만 있다. 소박하고 소박하다.
이번 조국 반대 시위를 최초로 조직한 학생들의 정체를 듣고, 나는 서울대학교 안에서 그간 벌어져 왔던 수많은 투쟁 사례를 떠올렸다. 그들은 시흥캠퍼스, H교수, A교수, 청소노동자 사망, 비학생조교 파업, 서울대 기계·전기노동조합(기전노조) 파업 등등의 그 모든 사태에서 수동적으로 일관하거나, 관조하거나, 가끔은 싸우는 이들의 입을 막으려고 애쓰던 이들이었다. 그 모든 얼굴들이 아른거렸다. 집회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부탁한 발언들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내민 연대의 손은 차갑게 식었다. 기전노조가 파업하자 그들은 본부로 달려가지 않고 노조로 달려갔다. 싸워 온 사람들을 '운동권 정치'로 간편하게 개념화하고, 그들의 방식을 '투쟁을 위한 투쟁'이라고 조소했다. (참 속편히 생각해서 좋겠다)
그들에게 학생사회의 모든 투쟁 사안들은 합리성의 손길을 기다리는 정념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기계의 눈으로 손익계산을 했다. 본부의 지원금이나 표결 결과 정도가 그들의 최고 당위였다. 그것을 '현실투쟁 노선'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덤이었다. 자신들의 범박한 실증주의적 세계관이 권력을 만나면, 실증할 수 없는 인간의 세계에 얼마나 큰 폭력을 유발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적 행보가, 자신들이 구조적 평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영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오해 말아 달라. 그들이 집회에서 외치는 말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조국 사태에 화가 난 심리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점점 좁아져 가는 기회와 암울한 미래에 똑같이 절망하고 있는 20대로서, 기득권과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의 정동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자장을 더욱 확장해 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들 앞에서는 그간 차갑고 도도한 엘리트의 얼굴로 일관해 온 이들이, 이번 일에 유독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서울대, 고려대 등지에서 일어난 모든 집회가, 나는 딱 그 모순만큼 슬프다. 그들에게 매번 내밀었던 손만 따뜻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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