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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1등 자살률, 거대한 질문 앞에 선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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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1등 자살률, 거대한 질문 앞에 선 한국"

[기고] "유명인의 잇따른 자살, 집단적 성찰 계기 삼아야"

죽음의 의미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스스로 생명을 끈을 내려놓고 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이사야; 42). 생명의 고귀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이 세상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는 해마다 1만 2천여 명을 상회한다. 하루 평균 40명을 상회하는 고귀한 생명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도 25.2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2.4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최고로 높은 수치다. 이 수치(數値)는 수치(羞恥)이지 결코 자랑이 아니다.

최근 우리는 여러 죽음을 보았다. 어느 쪽은 병고로 인한 선택한 죽음이고, 다른 쪽은 생활고로 인한 자신의 아들을 위한 선택된 희생적 죽음이었고, 몇몇은 연예인들로서 대중의 인기와 명예를 쫒던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쪽은 유수(有數)의 언론들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널리 알려졌지만, 다른 쪽은 몇몇 인터넷 신문을 통해 알려진 게 전부였다.

한 분은 역설적이지만, 고달픈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전도사'로 희망을 안겨주던 널리 알려진 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의 동반 여행을 선택했다. 참을 수 없는 병고(病苦)가 극단의 선택을 하게 했다. 긍정적 사고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은 육체의 고통 앞에선 무력하게도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주검으로 어느 장애인 아버지는 거룩한 주검과 슬픈 유언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슬픈 인간이, 이 무섭도록 불의한 시대를 온몸으로 비탄에 빠져 고발하면서 죽어갔다. 어찌 생각해 보면, 최후의 몸짓으로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공정한 사회'를 향한 마지막 저항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죽음 앞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슬픈 주검의 유서의 몇 구절이다. "일자리를 못 구해 힘들다. ....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 장애아들의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장애아동부양수당 받기 위해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물로 바쳤다. 고인의 유서 말미에는 "아들아 사랑한다. 내 뼈는 화장해서 그냥 공원에 뿌려달라"는 슬픈 유언을 남겼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구약성서>의 '모든 육은 들의 풀과 같도다'라는 말과 <전도서>의 기자의 말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생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떤 사람의 영혼이든지 값지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굳이 영혼의 몸을 실었던 모든 사람들의 세속적, 육체적 삶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도록 하자.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인간 종만이 유일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경험을 통해서 이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das Sein zum Tode)라고 규정했다. 우리에게 드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살 권리뿐 아니라 자살할 권리도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어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살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자살에 관한 역사적 의미와 윤리적 정당성 여부

인류의 역사만큼 자살의 역사는 길고, 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논쟁을 이끌어왔다. 이 문제만큼 시대에 따라 그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 왔던 문제도 없을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뒤르켐(E. Durkheim)의 자살에 대한 관점으로 '자살은 희생자 자신의 적극적이거나 소극적 행위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초래되는 모든 종류의 죽음으로, 자신만이 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가리킨다.

자살이 철학적 주제가 될 수 있는 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자살의 문제는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 주제일 수는 있으나 철학적 논제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자살은 고개 그리스의 플라톤 이래로 철학의 큰 물음으로 검토되어 왔다. 자살도 나름대로의 어떤 유형이 있다. 배고픔에 의한 것인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질병 때문인가? 자살 폭탄과 같은 어떤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일어났는가? 타인을 위한 희생적 자살인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죽음인가?

자살은 종교와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자살은 신의 의지에 도전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해로운 것이고,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유대 기독교적 전통은 인간 생명에 대한 열렬한 종교적 숭배를 배경으로 자살을 전 사회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자살이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스터톤(Chesterton; 1874-1935)은 자살은 하나의 죄일 뿐만 아니라 '원죄'라고 말한다. 자살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의 인간을 죽인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죽인다'고까지 단언한다. 결국 자살은 이 세상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유태인의 <탈무드>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있다. 자살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한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교부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자살이 불법인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첫째 만물은 본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자살은 이러한 자연적 성향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을 파괴하는 것은 부분을 포함하는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은 그가 속한 전체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종교적 관점에서 생명을 주관하는 것은 신의 권능에 속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신을 거역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철학자 니체는 자살을 인간이란 종이 가진 특권으로 보았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빨리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문화권에 따라 자살을 옹호하기도 하고, 강간과 같은 폭력적 피해를 방어하기 위한 자살은 예외적 경우로 인정하기도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을 인정하기도 해서 더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는 것을 더 고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는 자살을 범한 사람이 가는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다. 마야 문화권에는 밧줄에 목매여 죽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인구 조절을 위해 죽음을 권유하기도 했다. 에우리피데스는 "자, 아이들을 위해 어서 죽으시오"라고 말했다.

칸트의 견해

철학자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야수보다도 더 낮은 단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자살보다 더 끔찍한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까지 말한다. 그래서 칸트는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인격체'라기보다는 사물로서 간주함으로써 인간성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거함으로써 도덕성을 뿌리 채 뽑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각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으므로 자살은 인간의 창조자인 '신의 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칸트에겐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ein guter Wille)뿐이다. 선의지는 의무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칸트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선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의무이고, 누구나 그러려는 직접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인간이 불안해하는 근심은 아무런 내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준칙 역시 아무런 도덕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생명을 보전하는 것은 의무에 맞는 것이긴 하지만 의무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불행한 자기 영혼의 힘이 강해서 운명에 겁먹고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분하여, 죽음을 원하면서도 그의 생명을 보전한다면, 그것도 생명을 사랑해서나 경향성이나 두려움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의무로부터 그러하다면 그의 준칙은 도덕적 가치"(<윤리 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역, 397-398쪽)를 가진다고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위라도 '보편적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행위되어야 한다는 준칙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보편적 자연법칙'은 하나의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다. 가령, 해악이 잇달아 절망에까지 이르러 생에 염증을 느낀 어떤 사람은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가 아직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살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이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의 준칙은 "나는, 만약 생이 연장되는 기간에 쾌적함을 약속하기보다는 오히려 해악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면, 자기사랑에서 차라리 생을 단축하는 것을 나의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사랑의 원리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자기사랑이 생명을 보존하는 것인데, 오히려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자살에 관련된 논증은 이런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목적 그 자체로서 인간성의 이념과 양립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다. 만일 힘겨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인격을 마지못해 생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려는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한낱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며 오히려 모든 행위에서 항상 목적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인간에 대해 아무 것도 처분할 수 없으며, 인간을 불구로 만들거나, 훼손하거나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결국 이 말은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준칙과 일치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에서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직전의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자살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61D-65A). 여기서의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거기에서 자살에 관한 상반되는 두 입장을 다 끄집어 낼 수 있다. 하나의 논증은 특정한 노예를 포함한 소유물 중 어떤 것이 주인 뜻과 무관하게 스스로 자신을 죽였다(heauton apokteinunai)면, 주인은 화를 내고 벌줄 방도가 있다면 벌을 주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제1권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현재 신이 우리에게 강제를 보내는 것처럼, 신이 인간에게 강제를 보내기까지는' 자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곧 철학자는 죽음 뒤에 저승에서 최대의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스스로 추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만이 죽기를 바라고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죽음이란 것이 영혼의 감옥인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몸은 몸대로 있게 되고 혼은 혼대로 몸에서 나와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플라톤의 <법률>(873CD)에는 '스스로 자신의 정해진 운명에서 그 몫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제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해진다. oikeiotaton(가장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죽이는 것은 국가로부터 징벌을 받아야 한다. 국가가 부여하는 벌칙은 비석과 같은 것으로 무덤의 표시를 금하고, 남과 함께 묘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또 잘 알려지지 않는 땅에 매장되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 따르면 나태함이나 게으름, 그리고 생활의 곤핍(困乏)으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죽는 것을 금지했다. 다만 불명예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죽는 것만을 인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1138A6-14)에서 정의와 부정의 관점에서 자살을 논한다. 옳은 행위들은 모든 덕에 따르는 법률에 의해서 규정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법률은 자살을 명령하고 있지 않은데, 명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진해서 법률을 어기고, 가해진 해악에 대하여 해악으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 행위를 하는 바로 그 사람은 자기가 해를 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 그 도구가 어떤 것인지 알면서 자진해서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냄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찔러 죽는 사람'은 옳은 이치를 어기면서 그런 일을 자진해서 하고 있는 셈인데, 법률은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부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살한 사람은 그 사람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 '부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살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그것을 자진해서 겪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도 자진해서 부정의를 겪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도시가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고, 또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도시에 대하여 부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구실로 어떤 '불명예'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받아들여 살인을 부정의의 한 종류로 설명했던 홉스(T. Hobbes)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정의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개념으로 보았다.

자살에 대한 옹호

이런 전통과 달리 헬레니즘기의 스토아 철학과 계몽주의자들은 자살에는 전혀 비도덕적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자살은 때때로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기에 지혜롭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전적으로 이성적이고 영웅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스토아적 현자(sophos)는 적절한 상황에서 자살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적합한 행위(kathekon)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가혹한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스토아적 현자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적합한 것이다.

덕(德)을 가진 현자들만이 이성적 판단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선택해서 신과 같은 지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자는 자신의 덕으로 말미암아 신과 같이 행복하다. 행복은 곧 덕이다. 바른 이성과 덕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죽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늘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한 행위를 선택할 뿐이니까.

현대의 법률적인 판단에는 자살에 대한 법조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살에 대한 세인의 판단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에는 계몽주의적 입장이 더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경향적 추세인 것 같다. 자살도 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고유한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은 예외적으로 자살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높이 찬양하기도 한다. 세네카는 '모든 인생의 고통에 저항해서 나는 항상 죽음의 피난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살은 인간 자유의 궁극적 정당화"이고, 인간에게 유일한 참된 '자유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살의 보편적 권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자유로의 통로'을 막는다는 것이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후기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집안에 연기가 너무 많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난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마르쿠스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 수 없다면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퀴니코스(견유) 학파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죽음이란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분해되는 것이고, 이는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는 죽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쾌락> 오유석 역)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치고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어떤 이유로 해서 조금씩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상처의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본질적으로 '상처의 아픔'이야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상처 입은 영혼을 몸에 걸치고 살아나간다는 점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한결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신심 깊은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열심으로 기도하고, 주를 섬기려 해도 자신을 방해하는 어쩔 수 없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안질이었든, 간질이었든, 아니면 기도할 때마다 눈앞에 얼씬거렸던 벌거벗은 여인이 되었든 간에, 대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가 이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주께 세 번 간구하였을 때, 주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했다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각자의 영혼은 늘 어떤 종류의 '가시'를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다 같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을 뒤로 하고 분신(焚身)으로 쓰러져간 우리 시대의 부정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삶을 살았던 고귀한 주검들을 보아도 이 점은 아주 확연하다.

한쪽은 나라를 떠들썩할 정도로 요란스런 장례 이야기와 남은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사회 저명인사의 주검들과 대조적으로 그저 그런 삶의 이력으로, 또 그 주검의 의미조차 되새길 틈 없이 사라져 갔다.

주검의 사회적 의미와 아름다운 삶

어떤 주검에 대해서도 그 죽음의 '의미'를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자살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게끔 만든다. 어쩌면 이 사회가 자살을 권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살의 미학'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다. 자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고, 실제로 내 자신도 늘 어디서든 그 '죽음의 유혹'에 마주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주검들에 대해서 어떤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 자신, 나아가 우리 자신도 그 주검에 대해서 연민을 넘어 공감을 함께 나누는 시대의식을 공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에 매여 살면서도 정신은 높이 비상하려 한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모조리 무시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앞서면 인생의 심포니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것만으로는 그 심포니가 연주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적인 것 속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고 또 발견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현명한 사람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공자도 죽음에 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죽음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자이거나 불의한 자이거나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찾아온다. 죽음보다 더 공평한 정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가, 아니면 추한 이름을 남기는가가 다를 뿐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앞서, 우리의 삶 자체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되는가 보다 어떤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더 소중한 것이다. 주어진 삶을 더 알차고, 더 아름답고, 더 참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의 삶이 밝아질 때에 이웃의 삶도 밝아지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삶도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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