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은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과 단체교섭 원상 회복을 위해 투쟁한 지 2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탄압받고 억압받는 수많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희망의 준거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재능교육 투쟁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연대가 끊기는 사례로 호명되기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00일을 맞은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마음은 어떨까. 견딘 시간의 무게가 인식의 차로 드러나는 경우를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같은 해고자라도 미뤄 짐작할 순 없을 것 같다.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의 속사정이 복잡한지는 꽤 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종탑 투쟁을 선택한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시청 환구단 농성장과 혜화동 종탑 농성장으로 구분되어 문화제와 집회가 이어진다. 연대하는 이들의 마음 또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디로 연대해야 할지 이 눈치 저 눈치를 보게 된다. 눈치 보는 것조차 이제는 지쳤는지, 연대는 눈에 띄게 뚝 떨어졌다. 이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결해서 재능교육 자본을 향한 싸움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와 중재도 이제는 먹히지 않는다. 평행선만을 달린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다. 타 사업장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거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속한 집단이 갖는 입장이나 평가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지금 재능교육 내부 문제가 곧 내가 속한 집단의 문제로 언제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의 문제는 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의 판단과 결정을 밖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다. 간섭이고 주제넘은 짓이다. 그러나 그동안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투쟁이 투쟁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과 모범을 보여줬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재능교육 문제는 외부와 밖의 문제로 볼 수 없어 보인다. 노조 내부의 판단을 존중하되 그 판단이 상식을 궤도를 이탈할 땐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내부를 들여다봐야 하는 건 아닌지. 지금처럼 놔두고 시간만 흘려보내는 건 모든 이를 위해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주제넘게 재능 문제에 입을 여는 염치없는 이유다.
재능교육지부의 해고자 일부가 종탑 투쟁을 선언한 것을 언론을 통해 처음 알았다.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과 쌍용차, 유성기업 등 고공 농성이 줄을 잇는 시점에 종탑 투쟁은 처음엔 의미 있는 투쟁으로 이해됐다.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을 선호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재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처음엔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종탑 투쟁은 야릇하게 방향을 틀었다. 자본에 대한 투쟁을 전면화하기보다 현 지도부를 제치고 비상대책위를 구성한 것이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종탑까지 올라가 현 지도부를 부인하는 자충수를 두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전개 과정과 전후 사정은 내게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종탑 투쟁과 함께 비대위 구성 문제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기 때문에 재능 문제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종탑과 그 주변 분들은 기존 지도부 임기 만료와 조합 내부 회의의 부재, 독단적인 사업 운영 등의 이유를 들어 재능지부 유명자 지부장과 학습지노조 강종숙 위원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비대위를 구성하고 비대위 명의로 사측에 교섭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점은 이런 문제를 굳이 종탑에 올라서 해야 했냐는 거다. 고공 투쟁을 내부 결속과 단속 차원에서 할 순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럴 땐 그 투쟁의 상대가 어용임이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지금 유명자 지부장과 강종숙 위원장이 어용이며 사측과 놀아난 이들인가. 또한 이런 성격의 고공 투쟁을 벌인다면, 촌각을 다투며 자본과 투쟁 전선을 치고 고공 철탑 농성을 이어가는 동지들의 투쟁을 하찮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심각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봉합은 상처만 덧나게 만든다
꼬인 문제는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결자해지여야 하는데, 그 결자해지의 시점이 종탑에 오른 시점이 아닌가 한다. 우선 자본과 투쟁을 한 이후 내부 문제는 차후에 알아서 정리하라는 주문을 종종 듣게 된다. 이런 낮은 수준의 중재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앙금과 반목이 심화되고 있다.
노동조합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재능지부 내 회의 부재를 반민주의 근거로 삼는 것 또한 앞뒤 자른 맥락 없는 주장이 아닌가 한다. 이런 사실에 기반을 둔 양비론의 칼과 양시론의 방패로는 결코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없어 보인다. 적어도 문제를 봉합하려면 상처 부위는 알아야 하지 않나. 종탑에 올라서 외치는 주장의 울림이 땅에서 외치는 것보다 큰 것은 당연하다. 그 큰 울림을 지금 재능교육지부는 자본을 향해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높이를 앞세운 진실 게임으로 사태를 몰아가는 경향까지 띠고 있다. 울림 소리의 크기가 진실과 정당성의 뒷받침 근거가 될 순 없다고 본다.
우리는 왜 입장을 유보하는가
재능 내부 문제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나머지 발 동동 구르며 속상해 하는 마음 또한 이해가 간다. 그런데 이런 내부 문제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아닌가. 우리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조율하고 풀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다. 각자의 입장을 교묘히 유보한 채, 연대가 끊기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강제로 재갈 물리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문제를 더 키우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어떤 호전된 상황으로 진전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지 않았나.
나는 재능지부 내부가 잘 추슬러지고 조만간 자본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2000일, 이것은 몇몇 개인이 끌고 만들어낸 시간과 노력이 아니지 않은가. 2000일의 투쟁을 독점할 순 없단 얘기다. 그러하기에 2000일을 맞아 따로 집회를 하고 문화제를 달리 기획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순 없다. 이런 과정이 이후 동지들의 단결을 높이는 과정으로 전환된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래서 같은 해고자로서 당부하고 부탁드린다. 지금처럼 나뉜 투쟁으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고 자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인됐지 않은가. 언제까지 한 평 남짓한 좁은 종탑 공간에서 외롭게 투쟁의 아침 이슬을 맞아야 하는가. 환구단 농성장이 털려도 함께 복구하지 못하는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닌데, 그것만을 강조할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하는 이중의 현실을 인정한다.
자 그래서 제안 드린다. 지난 2000일의 투쟁은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 전체의 것이고, 헌신적으로 연대한 공대위 및 연대 단위의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 번 힘 모아 학습지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손잡을 때가 아닌가. 함께 발 딛고 함께 싸우는 방법을 고민하고 머리를 맞댈 때가 된 건 아닌가 말이다. 오수영, 여민희 동지의 종탑 농성 그 자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상상할 수 없을 시간이 지나고 있다. 고공 농성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예측할 수도 없다. 특히 여성 동지들이라 더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본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너무 많다.
종탑 농성이 벌어지고 난 후 시청 재능 환구단 농성장 안 대나무에 감긴 밧줄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유명자 지부장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눈을 본 이후 곧바로 밧줄을 벗겨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내려다보기도 힘든 아찔한 높이에서 손 흔드는 오수영, 여민희 동지의 사진을 보며 아찔함과 어질함을 늘 느낀다.
2000일 재능교육 투쟁이 다른 방법과 해결책을 찾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동지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고 함께 싸우겠다. 풀어보자, 풀기 위한 노력을 해보자. 꼬인 지점부터 다시 의지와 힘을 모아 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건강하셔야 한다.
6월 10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와 재능 환구단 농성장이 중구청과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당했다. 이제는 힘을 한곳으로 모아야 할 객관적 정세가 우리를 더 압박하고 있다. 단결을 도모하자.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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