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앞에 비 몇 방울의 흔적도 없지 않았지만, 곧 개어서 잘 쓸린 마당에 햇살이 밝았다. 화엄사 너른 안마당에 무대가 차려지고, 700여 개의 간이의자가 놓였다. 층계 위 대웅전 앞에도 300여 개가 놓였다. 석탑이며, 석등이며, 대웅전을 기웃거리다가 일찍이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슬며시 눈을 감고 숨결에 마음을 얹어 보았으나, 슬근슬근 졸음이 와서 그대로 맡겨두었다.
언덕 위에서 울려 퍼지는 태평소 소리에 정신 줄이 화들짝 퉁겨졌다. 시나브로 눈을 뜨는 사이 태평소 소리가 화엄사 골짝을 조수처럼 밀려다녔다. 연주자는 층계 위 각황전 앞마당에 서 있었다. 층계를 따라 스님과 연주자들이 합장을 한 채 줄지어 내려왔다. 시작을 알리는 태평소와 행진에서부터 짜임새 있게 기획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 ▲ 국제영성음악제 '화엄제-2011'이 지난달 29일 전라남도 화엄사에서 열렸다. 화엄제 시작을 알리는 원일 음악감독의 태평소 연주 ⓒ임종선 |
첫 연주는 초등학교 저학년, 심지어 유치원생도 끼어 있는 '솔이오카리나앙상블'(광주, 한국)이 맡았다. 가장 기대해 마지 않은 연주. 총감독이면서 사회를 맡고 나선 순천대 박치음 교수가 2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소개하는 데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포카레카레아나'. "비바람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연가'라는 대중가요로 기억되는데, 원래는 뉴질랜드 마오리족 노래지만 지금은 세계의 노래가 되었다. 어설픈 듯한 아이들의 연주에 전 출연진이 호흡을 함께해서 '시나위'가 연상되었다. '화엄'에 어울렸다.
| ▲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솔이오카리나앙상블의 '포카레카레아나' ⓒ이우창 |
오래전, '중생(衆生)'을 '이웃'으로 옮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벌써 20년 저쪽의 일인데도 아직 그 설렘의 여진이 남아 있다. '제도(濟度)'가 아닌 '함께 함'이라니! 그 무렵 '화엄'이라는 것이 모르긴 해도 '서로 기대고 가는 이웃들의 살림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연주자, 연주단의 초등학생을 중심에 둔 협주라! 초장부터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 ▲ 1500여 명의 관객들, 가을에 빠지다. ⓒ임종선 |
범패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비빙'(한국)의 마음 밑바닥에 고인 바람을 깨워내는 연주에 이어, 객석 뒤에서 골짜기를 울리는 선창이 터지면서 입장하는 낯선, 그러나 몸에 익은 울림이 가까워질 때 다시 한번 무장해제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 '신슈국제음악합창단 VPG'(일본)의 일본 미야자키 지방의 추수노래. 그리고 아키타 지방의 결혼 축하 노래. 줄곧 민요풍으로 줄기를 이어갈 모양이었다. 합창단의 몸짓과 함께,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가 슬근슬근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가노 지역의 아마추어 합창단이라는데, 어려서 함께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하고 새참을 먹던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 누나와 형들에 다름없었다. 이번 음악제에 오느라고 처음 여권을 만들어서 처음 온 외국이 한국이요, 구례 화엄사라는 이도 있었다. 조명과 의상과 성형으로 제 얼굴을 지운 가수들이 아닌, 각자의 얼굴과 직업과 나이를 가진 이웃들이 기쁨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이면서, '우리'의 노래를! 그들은 분명 세계적인 노래꾼들이었다. '세계'란 본디 저 바다 건너가 아니라, 나와 내가 숨 쉬는 공기와 그것을 함께 쉬는 이웃 전체가 아니던가. '나'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 그들은 분명 일본 어느 지방의 민요이되 내 마음과 몸에서 피어오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 신슈국제음악합창단 VPG의 결혼축하 전통노래 '나가모치우타' ⓒ이우창 |
비빙의 연주와 구음이 범패로부터 온 것이라면, '바람곶'(한국)의 그것은 '굿'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을 듯했다. 느닷없게도, 음악은 요란한 잡음으로 시작되었다. <9시 뉴스> 앵커와 기자들의 목소리인 듯한 소음들이 뒤섞이고 엉기고 일그러지면서 아수라장이 되는. 고통스럽고, 거슬리는 소음들이 서걱거리며 용광로로 구겨져 들어가는 듯하더니 맑은 소리의 줄기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삶을 벗은 소리가 아니었다. 세속의 소음을 떨치고 산사(山寺)에 머물고, 다시 산사에 고요를 남겨두고 소음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었다. 탁함과 맑음이 둘이라면, 불이(不二)도 화엄도 아니다.
| ▲ 바람곶의 연주 '꼭두-마지막 첫 날' ⓒ이우창 |
매체를 통하지 않고 거문고 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박우재(한국)의 '풍류'. 소리로 빈틈없이 채워진 음악에 익숙한 터라, 어느 순간 가슴이 거문고 줄처럼 퉁겨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줄이 끊길 듯한 쩌렁쩌렁한 울림과 그 사라짐 속에서, 사라짐을 찢고 퉁겨지는 울림 속에서 낯선 것, 그러나 아주 익숙한 것을 감지했다. 거문고 줄이 내지르는 고함과 그 사라짐을 통과하면서 마음에서 흥이, 깊은 흥이 일어난다고 할까? 그러다 어느덧 음악이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할까?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라고 했던가.
| ▲ 박우재의 거문고 독주 '풍류' ⓒ이우창 |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은 슬픔을 건너서, 어두운 밀폐의 시간을 지나서 건져 올린 듯 구슬픈 파리자트(Parijat, 독일)의 기타 연주('영혼의 빛')에 이어,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오른 데바 탄마요(Deva Tanmayo, 영국). 그네는 내게 집시로 다가왔다. 입성이며 기름기 없는 긴 머리카락.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음악을 집 삼아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버드나무 정원에서(Down by Salley Gardens)'. 아일랜드 민요로 알려져 있지만, 예이츠(W. B. Yeats)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나뭇잎 피어나듯 편하게 사랑하라고", "둔덕에 풀 자라듯 편히 살라고 그네는 내게 말했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어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 이제야 비로소 눈물이 넘쳐흐릅니다". 파리자트의 반주에, 데바 탄마요의 음색은 함께 가자고 청하고, 호소하는 듯하다. "기쁘고, 편안하고, 가벼운 세계"('팜플릿')로. 이어서 박치음의 목청이 함께 어우러졌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화엄'과 '기쁨'에 제격이라고 느꼈다. 다시 데바 탄마요와 바람곶이 함께 하는, 그것이 흥이라고 느꼈다. 집요한 연습을 통하여 맞추어진 음이 아니라, 느슨하게 함께 가는 그것이 흥을 돋우었고, 그 느슨한 어우러짐에 객석에 앉은 내 마음도 얹혔다. 그러고 보면, 흥이란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본청'으로 줄기를 뻗어가면서 무정형의 즉흥연주가 어우러지는 시나위와 닿아 있다고 느꼈다. 삶이란 애초에 짜맞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화음'이면서 '화엄'이지 않을까. 각황전 뒷산 능선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구름에 비춰들듯이.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서로 비추어 노을을 이루듯이.
| ▲ 파리자트의 기타 독주 '영혼의 빛' ⓒ이우창 |
| ▲ 파리자트, 데바탄마요, 박치음의 '샐리가든 ⓒ이우창 |
마침내 전 출연진이 무대 위에 올랐다. 솔이오카리나앙상블이 앞에 서고, 신슈국제음악합창단 VPG가 받쳐 서고, 데바 탄마요가 옆에 서고, 바람곶과 비빙과 박우재가 둘러앉아 '님에게로'(박치음 곡)를 협주하고, 합창했다. 내 아이 같고, 조카 같고, 아저씨 같고, 아줌마 같고, 할아버지 같고, 할머니 같고, 삼촌 같고, 누이 같은 전 세계 사람들이 노래하고 있었고, 객석이 함께 어우러지고, 그 노래로 받쳐 올린 연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합장한 손을 거쳐 돌려지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님'은 먼 곳에서가 아니라 내 속에서 피어올라 세계로 펴져 나간다고.
| ▲ 박치음 작곡 '님에게로'를 합창하는 동안 연꽃 회향 ⓒ이우창 |
나는 '영성음악(Spiritual Music)'이 무엇인지 모른다. '음악'도 모르거니와, '영성'은 더더욱 모른다. 추상명사에는 영 취미가 붙지 않는다. 'Spiritual'이 형용사라고 한다면, '몸을 여윈' 음악이란 말일까? 그러나 명년(明年) 화엄제는 놓치지 말자. 노고단이 굽어보는 화엄사에서 시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 어른들이 하는 일은 다 재미없다고 동행을 거절한 딸아이도 잘 좀 구슬려 봐야겠다.
| ▲ 연꽃 회향, 관객들을 하나로 잇다. ⓒ이우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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