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김영삼정부에서 마지막 대변인을 역임한 신우재 전 청와대 공보수석의 글이다. 신 전 대변인은 이 글에서 관행상 장차관급 공직자가 퇴직때 받는 훈장을 5년 늦게, 그것도 택배로 받게 된 사연을 적고 있다. 권력무상보다는,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국가의 공직시스템이 이 정도인가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글은 당초 신 전 대변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www.from60.com의 '귀진재(歸眞齋)통신'란에 지난 18일 실렸던 것으로 한 프레시안 독자의 제보에 따라, 필자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다. 편집자
***택배로 배달된 훈장을 받고**
아침에 한진택배 기사라면서 내가 사는 집의 위치를 묻는 전화가 왔다. 내집으로 오는 길을 자세히 설명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며칠 전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상기하고 배달될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배달된 물건은 짐작대로 훈장이었다. 청와대용 쇼핑백을 두 겹으로 겹쳐서 스테플러로 찍어서 포장한 것을 열어보니 마닐라종이에 싼 갈색 가방이 하나 나왔다. 가방을 열어보니 훈장증과 훈장, 그리고 대통령 문장이 새겨진 시계가 하나 나왔다. 정부의 훈장제도를 설명하는 팜플렛도 하나 들어 있었다.
훈장증을 가만이 읽어 본다.
"훈장증 / 전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신 우 재 / 귀하는 공무원으로서 맡은 바 직무에 진력하여 국가사회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의 훈장을 수여함 / 황조근정훈장 / 2003년 2월3일 / 대통령 김 대 중 (도장 꽝) / 국무총리 김 석 수 / 이 증을 근정훈장부에 기입함 / 행정자치부 장관 이 근 식 (작은 도장 꽝)"
남색 빌로드 천으로 된 훈장함을 열어 본다. 도금한 놋쇠 덩어리가 몇 개 들어있다. 목에 거는 중수장, 오른편 가슴에 다는 부장, 그리고 뱃지처럼 다는 금장, 주머니 위에 다는 약장이 각각 한 개씩 들어있었다.
마음이 착잡하다. 퇴직할 때 의례적으로 주는 훈장을 퇴임 5년만에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그것을 택배로 받는 것도 기상천외한 일이다.
그 사연을 설명해 보련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마지막 청와대 대변인이었다. 정부에서는 관행상 정무직인 장차관급 인사가 퇴임을 하면 장관급에게는 청조근정훈장, 차관급에는 황조근정훈장을 수여한다. 공보수석비서관은 차관급이기 때문에 나의 퇴임 때 황조근정훈장을 상신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는 IMF 외환위기에 정권교체기가 겹쳐 어수선할 때였다.
나와 다른 수석비서관 몇 명에 대한 퇴임 상훈 상신은 당시 서슬이 퍼렇던 인수위원회에 의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환란을 초래한 정부의 공직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의 비서관들에게 훈장은 무슨 훈장이냐는 것이었다.
정부의 상훈을 담당하는 총무처가 새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는지 정권인수위원회에 "훈장을 줘도 좋습니까?" 문의를 했던 듯하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인데 말이다. 대통령 임기 말 레임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이렇게 해서 훈장 건은 한마당 소극(笑劇)으로 끝나고 물건너 가버렸다. 그리고 훈장을 못 받았다고 서운해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정권인수위원회의 처사를 섭섭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시는 청와대 공직자 모두가 큰죄를 지은 참담한 심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초에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가 무슨 직위에 있는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용건인즉, 5년 전 수여가 유보되었던 훈장을 주려고 하는데 받겠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으로 봐서는 거절하는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즉각적인 대답을 못하고 전화를 건 직원에게 이것 저것 건성으로 묻고 그 대답도 건성으로 들으면서 내 뇌리의 다른 모퉁이에서는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굳이 안 받겠다고 할 이유도 없고, 또 선뜻 받겠다고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던 것이다. 15년 공직생활 동안 진을 빼던 그 무수한 야간작업과 밤샘작업, 마음고생의 고비고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갔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속으로 "훈장을 받을 만큼 일했다는 자부심이 있으면 받아야 마땅하다"고 자답을 해보았다. 또 훈장이란 정권이 주는 것이 아니고 법에 따라 국가가 주는 것이므로 그 훈장을 거절할 이유가 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이제 와서 훈장을 주겠다는 속셈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도 퇴직을 하고 그 알량한 관행에 따라 훈장을 하나씩 받아야 하겠는데 5년 전의 일들이 마음에 걸렸을지 모른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프로토콜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직원이 전화를 걸어서 훈장을 받겠느냐, 안 받겠느냐는 식으로 묻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도 안 지킨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훈장은 기념품이나 사은품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아주 짧은 순간에 뇌리에 스쳐간 이런 생각을 대충 수습 정리하여 나는 "받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 잊어버리고 해를 넘겼다.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 2월초였다. 직원은 훈장이 나왔는데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 직원은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번 들리시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뒤늦게 훈장을 받겠다고 넥타이를 매고 청와대 면회실에 가서 면회신청서에 글자를 채워 넣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총무비서실 담당직원을 찾아가서 "나 여기 훈장 가질러 왔소" 라고 신고를 하는 내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그럴 순 없다
나는 그 직원에게 "결례는 이미 많이 했으니 그냥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 직원은 "윗분께 여쭈어 보고 지시를 받아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 직원이 말하는 그 윗분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제 방에서 차나 한잔 대접하면서 훈장을 전해드리면 어떨까요?"하고 제안을 했다면 두말 안하고 청와대에 갔을 것이다. 프로토콜은 한 조직의 수준을 말해주는 바로메터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 후 "훈장을 택배로 부쳤다"는 전화 통보가 있은 후 한참 지나 오늘 문제의 물건이 배달된 것이다.
5년 연착한 훈장, 택배로 전해 받은 훈장 모두가 비정상적이지만, 국가가 주는 상훈을 받고도 이렇게 우울해지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비정상적인 시대 탓일까, 나의 과민성 탓일까.
박수 받으며 웃는 얼굴로 청와대를 떠나는 대통령을 본 적도 없고, 전 정권을 비난하지 않는 새 정권도 보지 못한 것이 우리네 최근세사의 경험이다.
이제 다시 새 정부가 출범한다. 과거와는 많이 다른 새세대의 "젊은 그들"이 조타실을 맡았다. 전 정권의 거추장 스런 유산을 정리해야 하는 사정은 5년전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 모든 걸림돌을 말끔히 정리하고 눈부신 치적을 쌓아서 5년후 박수를 받으며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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