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 풍경'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김기찬씨가 지난 2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TBC·KBS 영상 제작부장을 지낸 고인은 30여 년간 서울의 골목골목을 찾아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1988년 이후 '골목 안 풍경'을 테마로 사진집 시리즈를 6집까지 출간한 고인은 사진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2002년 이명동 사진상에 이어 2004년 동강사진상과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골목길' 사진은 9월 30일까지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서울의 골목을 프레임에 담기 시작한 것은 서울을 고향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다.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가 된 서울을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소회는 단순할 수 없다. 나는 고향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고향이 점점 더 나로부터 떠나고 있다는 느낌은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그 때마다 느끼는 자괴감과 아쉬움이 골목을 누비는 내 발걸음과 셔터를 누르는 내 손을 바쁘게 움직였던 것 같다.(…)
골목의 세계는 결코 변방의 세계가 아니다. 골목 안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언니, 동생과 집과 담장이 있으며 기쁨과 슬픔이 상존한다. 골목 안에서 사람들은 꽃을 가꾸고 짐승을 키우기도 한다. 이런 작지만 애잔한 풍경들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의 저자의 말 중에서)
지난 달 고인이 마지막으로 펴낸 작품집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샘터)> 작업을 함께했던 샘터사의 소설가 김도언씨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보내 왔다. <편집자>
***자신이 찍은 사진을 닮아 한없이 정겨운 선생님**
'골목 안 풍경'의 사진작가 김기찬 선생님이 지난 토요일 밤 유명을 달리 하셨다. 사모님께서 전화로 그 소식을 알려주셨을 때, 나는 뒤통수를 둔탁한 흉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격통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열정적이시던 선생님이 이토록 허망하게 가시다니.
나는 선생님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실 때에도 다시 일어서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말하면 나는 선생님을 결코 저쪽 피안 너머의 세계로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바람이 어찌 나 하나뿐만의 것이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선생은 산자들의 소망엔 아랑곳없이 이제 모든 것을 다 벗어놓으시고 저 생으로 건너가셨다. 골목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셨다.
나는 선생님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몇 개월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그것이 개인적으로 불운이었는지 아니면 축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을 운명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작품은 젊은 날의 한심한 나를 감화시키고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졸업하던 해인 1997년 나는 세상에 대한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매사에 호전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IMF의 영향으로 취직은 안됐고, 개인적으로 품었던 희망들은 절망이라는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나는 독이 오른 사람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시비를 걸어댔다. 그 무렵 시를 쓰던 선배가 졸업선물이라며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넸다. 열화당에서 나온 김기찬 선생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이었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였지만 선생과 첫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김기찬이라는 사진작가가 렌즈에 담아놓은 골목안 풍경에 속절없이 매료됐다.
***"누추하고 옹색해 보이는 골목이 이렇게 풍성할 수 있다니…"**
아, 이런 곳을 이렇게 찍는 사람도 있구나. 그가 렌즈에 담아놓은 골목안 풍경은 따뜻하고 한없이 애틋했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하얀 런닝셔츠 차림의 사내는 마당에서 면도를 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 날 할아버지는 수박 한 덩이를 들고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오른다. 나는 그 안, 골목 사람들에게서 아주 장엄한 용서의 세계, 화엄의 세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누추하고 옹색해 보이는 골목 안 풍경이 이처럼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비로소 나는 세상과 타자에 대한 오랜 불안과 적의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사진은 내게 세상을 껴안고 품으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기찬이라는 이름을 내 기억 속에 '즐겨찾기'로 저장했다.
그 뒤 여러 날이 흘렀고, 나는 출판사의 기획자로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일처럼 김기찬 선생님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로 인사를 드렸다. 오래 전부터 출판 기획자가 되면 꼭 선생님의 사진을 책으로 묶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지로의 커피숍에서 처음 뵌 선생님은 자상한 아버지와 같았다. 풍채도 아주 좋으셔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왕성한 창작열을 이해할 만했다. 그 무렵 아버지를 여읜 나는 아버지와 연세가 같은 선생님께 부정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상냥하게 나를 맞아주시면서 내가 조촐하게 마련해 간 출간기획안을 칭찬하시고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김 차장, 나같은 사람의 책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그 뒤로도 나는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다. 커피숍에서도 뵙고 식당에서도 뵙고 자택에서도 뵈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찍어 온 사진 원본들을 보여주시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당신의 사진작품을 설명하는 선생님은 아이처럼, 그러니까 골목 안에서 뛰놀던 코흘리개 아이의 것과 다름없는 천진성을 보여주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선생님은 병원으로부터 위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다. 청천벽력 같은 선고 앞에서도 선생님은 결코 여유와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자택에 성모상을 마련해놓고 기도를 하는 일에 열중하셨을 뿐이다. 이미 생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촌각을 다퉈가며 선생님의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책을 만들어나갔다. 목이 탔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책이 나왔을 때 이미 선생님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계셨다. 막 출간된 책을 들고 선생님이 누워 계신 호스피스 병동으로 찾아뵈었을 때 그 구수한 목소리로 들려주신 말씀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김 차장, 나 같은 사람의 책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내 나머지 사진들도 잘 부탁하네."
아, 그 마지막 순간의 겸허라니. 자분자분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사진집을 펼쳐 보이시던 선생님, 스타벅스에서 코코아를 마시던 선생님, 자택에서 포도 송이를 손수 내놓으시던 선생님,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자원봉사자들의 안마를 받고 있던 선생님. 이 모든 모습 속에서 선생님은 한결같이 정겹다. 당신이 찍은 골목 안 풍경처럼 말이다. 암세포는 왕성한 혈기로 골목길을 누비던 선생님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갔다.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14호실. 선생님의 빈소 앞에 서서 영정에 모셔진 선생님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봤다. 스러져가는 골목 안 풍경으로 선생님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선생님, 골목안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목소리를 선생님은 사랑과 용서의 소리라고 들려주셨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편히 잠드십시오.
김도언
1972년생,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펴낸 책으로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평전 <검은 혁명가 말콤엑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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