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6자회담이 타결된 후 동북아 국제정세는 본격적으로 고위급 회담의 시즌이 찾아온 것 같다. 이번 협상 타결의 주역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이 미국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으며 북한 또한 이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남북 정상회담, 북일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다.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이러한 회담들은 아직 핵심 이슈들이 구체적으로 타결되었다기 보다는 '향후의 타결 논의를 시작하기'로 타결한 것에 불과한 이번 6자회담의 한계를 보완하고 향후 생산적 회담을 준비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리라 예상된다. 아마 크리스토퍼 힐을 비롯하여 의욕적으로 방북을 준비하는 정치인들은 향후 고위급 회담에서 일거에 상호간의 불신과 오인을 제거할 의욕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신과 오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합리적 선택이론(인간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가정을 말한다)의 분석법에는 '문제의 대리 해결(vicarious problem solving)'이라는 방법론이 있다. 말하자면 상대 정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면 분석가가 자신을 그 나라의 입장에 놓고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엘리슨 & 젤리코우 2005, 67-68).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역지사지의 입장을 취하면 상대의 전략적 행동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셈이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오랜 기간 합리적 선택 이론에 대한 체계적 훈련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의 대리 해결'에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측면에 대해 과도히 강조하는 문화 때문인지 이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국가 관리들에 깊숙이 내재한 미묘한 감정, 욕망, 공포, 선입관 등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한 경향이 있다.
요즘 미국의 첨단 여론조사 기법으로 가수면 상태에서의 무의식 조사까지 등장한 것도 이러한 반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힐 차관보는 과거 데이튼 협정에서 유연한 태도와 치밀한 협상력으로 놀라운 성과를 보였기에 자신의 '문제의 대리해결' 능력에 대해 꽤 자신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이해해야 할 것은 과거 데이튼 협정에서 그가 상대하던 독재자 밀로세비치는 나토의 폭격이 동반된 강압적 외교에 쉽게 굴복한 자라는 사실이다. 반면에 북한은 강압적 외교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쉽게 굴복한 유고보다는 미국의 악몽인 베트남에 더 가깝다. 더구나 맹폭을 견디기 위한 베트남의 지하 땅굴도 평양의 북한의 지하 요새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아닌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이뤄진 '케네디-후르시초프' 정상회담**
어쩌면 크리스토퍼 힐처럼 고위급 회담을 준비하는 이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서로 간에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만난 고위급 회담이 오히려 거꾸로 오인을 악화시킨 역사들에 대한 연구와 성찰일 것이다. 지금 이 연재물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는 위기 직전에 케네디와 후르시초프가 만났던 비엔나 정상회담이 바로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역사는 과거 케네디가 집권하자마자 용병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쿠바를 침공한 피그스만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케네디가 과거 공화당 정권과 다를 바 없는 피그스만 작전이라는 강경한 군사주의적 태도를 취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한편으로는 케네디의 호전성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선거 직전 소련 외무성이 케네디를 가리켜 '철저한 실용주의자(complete pragmatist)'라고 규정한 바 있듯이 후르시초프 또한 케네디는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후르시초프의 당면한 관심사는 미소 냉전의 주요 대결장인 베를린이었다. 후르시초프가 보기에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철수는 그다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지 않는 사안이었다. 반면에 소련은 베를린이 서방 세계를 동경한 이들이 탈출하는 루트로서 작용하기에 목에 가시와도 같았다. 따라서 후르시초프는 직접 일 대 일 만남을 통해 강력하게 외교적으로 공세를 펼친다면 케네디도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어려운 입장을 납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소련의 강경파들은 그의 평화주의적 발상에 냉소를 보냈지만 후르시초프는 케네디와의 정상회담 성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Fursenko and Naftali 1997, 105).
하지만 후르시초프는 당시 베를린 문제가 갖는 성격 및 케네디가 갖고 있는 곤혹스러운 심적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진영에게 베를린은 파시즘 패배의 상징과 같은 도시였다(ibid., 104). 따라서 베를린에서의 철수가 미국의 국익과 양립 가능하다고 본 후르시초프의 계산은 이러한 정신적 의미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케네디로서는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하나는 피그스만 사건에서 케네디의 중도 포기 이후 미국의 강경파들로부터 케네디의 유약함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회담에서 후르시초프에게 사소한 양보라도 하면 이것은 케네디 행정부로서는 큰 부담이 될 상황이었다(ibid., 105).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상회담을 기피한다면 그것도 후르시초프가 자신의 유약함의 증거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케네디는 후르시초프가 그러하듯이, 국내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넘어선 평화공존의 영구적 구축에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가 신뢰하는 톰슨 소련 대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후르시초프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소련의 패권주의적 태도를 완화시키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결심의 배경에는 마치 후르시초프가 케네디를 외교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듯이 케네디 또한 자신의 외교적 설득력을 믿었던 점도 작용하고 있다. 사실 케네디는 과거 아이젠하워 등의 공화당 정권이 외교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창조적 해법을 마련하는 외교적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고, 자신들은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믿었다. 그는 베를린 문제조차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이를 주도한 덜레스 등이 보다 창조적이었으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고 보았다(ibid., 107). 베를린 문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적 태도에서 그는 후르시초프와 정확히 일치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 두 정상의 이러한 오인은 결국 비엔나 회담에서 그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게 된다.
***"'창조적 해법'이라고 해서 꼭 '신뢰'를 주는 건 아니더라"**
사실 후르시초프의 긍정적 평가처럼 케네디는 비엔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실용주의자로서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상호간에 합의가 어려운 베를린, 쿠바 문제 등을 아젠다에서 배제하고 핵실험 금지 등 우선 합의가 가능한 사안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하지만 케네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후르시초프 또한 핵실험 금지 조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의 진전을 미-소 상호간의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군사력 제거라는 다소 유토피아적인 목표와 연계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소련은 핵실험 금지 조치 실행을 확인하기 위한 유엔 주도의 사찰이 미국의 스파이 행위의 구실이 될 수 있음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유엔 대신에 공산 진영, 미국이나 영국 등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중립 국가의 3자 위원회로 구성되는 새로운 사찰기구의 창설을 제안해 유엔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외교팀의 무능력을 비판한 데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태를 돌파하기 위한 창조적 해법을 내놓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케네디는 동생 로버트를 비밀 특사로 임명하고, 핵실험 금지 프로포절을 다시 가다듬어 소련과의 합의점을 찾고자 했다. 그 결과로 그는 소련의 새로운 사찰기구안을 비토권을 갖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수락하고, 미국이 우주 개발에서 선취권을 갖는 대신 소련과의 합동 우주 프로그램을 제안해 평화공존의 초석을 놓고자 했다(ibid., 121).
하지만 케네디의 낙관론과 달리 여전히 상호간의 인식의 차는 컸다. 소련은 핵실험 금지를 위한 상호사찰의 경우처럼 미국의 합동 우주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미국의 스파이 행위의 구실이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케네디가 실용주의적인 자세로 점진적인 해법을 내놓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불신은 깊어갔다고도 할 수 있다.
소련 측에서 볼 때 미국과의 공존의 근본 열쇠는 상호간의 전면적인 군축 노력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근본적 전제조건 대신에 핵실험의 몇 차례 금지나 합동 우주 프로그램 등의 지엽적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미국이 과연 근본적 평화 구축에의 의지를 가졌는지 의구심을 가졌다. 이는 마치 과거 남북관계에서 부분적 합의를 순차적으로 높여가는 기능주의적 관점을 선호하는 남한의 통일 방안에 대해 북한이 미군 철수, 연방제 등의 근본주의적 태도로 대립해 온 것과도 유사하다.
***'추운 겨울'로 귀결된 회담**
결국 사전에 신임하는 동생 로버트를 비밀 특사로 임명해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에 올인 하던 케네디는 어떠한 사전 합의도 없이 정상회담에서 후르시초프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정상회담 초반에 케네디는 "저의 야심은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라고 선언하며 미-소 상호간에 오산(miscalculation)을 피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했다 (Schlesinger, Jr., 2002, 360).
케네디의 이러한 지적은 그간 미-소가 무수히 많은 오인들을 거듭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켜 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오인의 지적 자체가 후르시초프의 오인을 불러왔다. 케네디의 '오산'이란 말에 기분이 상한 후르시초프는 그러면 소련은 책상에 그저 손 올려놓은 학생처럼 앉아 있기만 해야 되냐고 반문했다 (ibid., 361). 이러한 회담 초기의 어긋남은 이미 회담의 결과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뒤 예상대로 후르시초프는 그토록 케네디 팀이 공들여 준비한 핵 실험 금지안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정상은 결국 케네디가 최소한의 외교적 성과를 위해 아젠다에서 신중하게 제외하려고 했던 두 쟁점인 쿠바와 베를린 문제로 충돌하게 된다.
먼저 쿠바 문제에서 후르시초프는 강경하게 케네디를 몰아붙였다. 그는 피그스만에서의 케네디의 실패를 약점으로 삼아 케네디의 강경 노선이 카스트로를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마치 설교하듯이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물론 후르시초프는 이미 피그스만 사건 오래 전에 비밀리에 쿠바를 소련의 전초기지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이어 베를린 문제에서도 후르시초프는 공세를 취했다. 그는 베를린에서의 연합군의 철수가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되지 않음을 설교한 데 이어 동독과의 일방적인 조약 체결 및 61년 말까지 일방적으로 연합군 철수 시한을 통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랜 지루한 회담 끝에 마지막으로 점심 식사 후 열린 회의에서 케네디는 베를린같이 미국의 국익이 깊게 연루된 곳에서 위기를 조장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물론 후르시초프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그는 미국이 소련을 모욕하려 한다고 비난한 후 "나는 평화를 원하지만 당신이 전쟁을 원한다면 그건 당신 문제"라고 쏘아붙였다. 이에 케네디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신이지 내가 아니오"라고 냉소적으로 응답하고 자리를 일어나면서 "추운 겨울이 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Schlesinger, Jr. 2002, 374).
***정상회담 결렬 이후의 상호비방전**
비엔나 정상회담이 케네디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리버럴로서 합리적 토론의 문화에 깊숙이 젖어 있고 스스로 누구와도 토론을 통해 이성적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자신해 온 그로서는, 생애 최초로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슐레진저에 따르면 케네디의 측근인 톰슨 대사 등은 케네디의 충격적 반응이 지나치다고 염려하기도 했다(ibid., 374). 사실 지금까지 외교에 있어 경험이 부족한 케네디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스타일을 직접 체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혹은 역사책을 통해 이해했던 그로서는 거칠고 강압적으로 건달처럼 밀어붙이는 후르시초프를 통해 비로소 공산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뼈저린 현실 체험을 한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엔나 회의는 동생 로버트가 훗날 회고하듯이 케네디의 인지 프레임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Fursenko and Naftali 1997, 131). 사실 2회째 연재물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미 그는 2차대전 당시 서방세계가 팽창주의자인 히틀러에게 속은 뮨헨 사태 등의 역사적 기억을 통해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강압적 외교의 중요성을 신화처럼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로서는 정상회담에서의 충격적 경험이 뮨헨의 외상을 더욱 굳게 강화했으리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케네디는 그 뒤 영국의 맥밀런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후르시초프의 야만성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를 듣고 있던 수상은 "그건 마치 핼리팩스 경이나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대화하려 했던 것을 연상시킨다"고 증언했다(May and Zelikow 1997,30). 그 뒤 그는 비엔나 회의에서 지나치게 유약하게 반응한 것이 아닌가하는 자기 회의 속에 10월 위기를 맞게 되고, 그럼 점에서 그의 강경한 행보는 이미 비엔나 회의의 결렬로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비엔나 회의에서의 강압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은 케네디만 얻은 것은 아니었다. 후르시초프는 회담 한 달 뒤 열린 회의에서 핵실험 재개를 결정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하로프 박사의 온건한 견해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폭발했다(Fursenko and Naftali 1997, 134).
"(…)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책을 강한 입장에 근거하여 수행해야 함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그걸 광고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다른 정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적은 어떤 다른 언어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보세요. 우리는 작년에 케네디의 당선을 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엔나에서 그와 만났습니다. 이 회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했죠? '너무 많이 요구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를 구속하지는 말아주세요. 내가 너무 많이 양보하면 나는 쫓겨납니다.' 대단한 친구죠? 그는 회의에는 왔지만 실행력은 없습니다. 도대체 제기랄 그런 자가 뭐에 필요합니까? 왜 그와 대화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까? "
***'오해'와 '불신'을 넘어서는 길**
결국 상호간의 오인을 줄이기 위해 창조적 해법을 준비하는 등 야심차게 열린 회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간에 강압의 중요성에 대한 인지 프레임만 고착화시키고 3차대전 직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시킨 셈이다. 왜냐하면 비엔나 회담 후 미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카스트로 제거 및 정권 교체 작업에 돌입했고 소련은 마침내 10월 위기를 촉발한 미사일 반입을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위기가 극적으로 종료된 후 미소 양국은 핫라인 설치 등을 통해 어처구니없는 오인의 가능성을 줄여나갔다.
하지만 냉전이 종료되고 인터넷 등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극도로 발전된 포스트모던한 현실에서도 적대적 국가들 간의 오인은 빈번히 발생한다. 이번 한반도의 고위급 회담들은 케네디와 후르시초프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달리 지혜로운 '문제의 대리해결'의 관점이 전면화돼 획기적 열매를 맺기를 절실하게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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