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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보다는 평화를, 격보다는 신뢰를…

[기고]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

올해는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전체제 60년의 역사는 동족 간에 불신, 증오, 적개심을 지속시키고 안보불안을 증가시켜 군사적 대결을 강화시켜온 역사이기도 하다. 분단과 정전체제가 60년 동안 지속되다보니 이것이 일상화되어 마치 이런 체제가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젊은 세대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과 삶의 현실을 좀 더 깊이 투시하면 이런 체제와 삶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 낡은 이념의 노예가 되어있고, 신뢰, 관용, 포용, 평화보다 불신, 배타, 미움, 불안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웃나라 및 세계와도 당당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마음 편히 살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 시대에 세계를 향해 마음껏 뻗어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와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2차 대전 이후 냉전체제 시대에는 한반도 분단이 미국과 구소련의 세력 확대 대결의 산물로 강제되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한반도 분단으로 인한 남북간, 미북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미국과 러시아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지역의 평화안보에 큰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 남북한은 물론 주변 4대강국과 동아시아 평화안보를 위해서도 더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인식에서 6.15 13주년을 맞아 독일통일의 교훈, 곧 통일정책이 아니라 신뢰와 평화의 노력 결과로 통일을 이룬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정전체제를 넘어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1. 구서독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 및 관계정상화 정책을 추진했다.

1-1. 독일은 2차 대전 나치 전범 국가이기 때문에 종전 후 미, 영, 불, 소 4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해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독일이 통일한다는 것은 전범의 죄과를 벗어나 과거 나치의 부활을 의미하고, 동시에 이것은 유럽 국가들에게 안보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기에 구서독에서 통일이란 말은 금기시 되었다. 구서독은 구동독과 통일이 아니라 평화적인 관계정상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구서독은 구동독과의 평화적 관계정상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주변 유럽국가들과도 신뢰와 평화적 안보환경을 조성했다.

1-2. 이렇게 구서독은 통일 대신 평화정책을 철저히 추구했다. 브란트 내각부터 동방정책을 통해 구동독과 동유럽국가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 동방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되었다. 독일통일은 19년간 관계정상화를 지속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브란트 수상은 1988년 '세기의 증언'이란 TV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최대 업적을 묻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독일의 이름과 평화라는 개념이 다시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1-3. 구서독은 평화연구 및 평화교육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했고,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각 지역과 국가들의 평화연구 및 평화정착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했다. 이런 평화적 노력이 유럽국가들에게 신뢰를 주었고, 결과적으로 통일을 용납하는 환경조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 구서독은 철저한 사죄, 신뢰, 협력, 평화 정책을 수행했다.

2-1. 구서독은 아데나워 내각 출범부터 학교와 시민사회교육을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나치 및 식민지 죄과에 대한 정치, 역사적 교육 그리고 민주평화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다.

2-2. 구서독은 2차 대전 종전 직후부터 나치전쟁 범죄와 식민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법적 사죄 및 배상과 인도적 보상 등을 통해 신뢰를 쌓고 협력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2-3. 또한 구서독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3/4세계에 대해서도 인도적 차원의 경제 및 사회개발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3.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국제 외교적 요인에서 중요한 것은 1975년 헬싱키 유럽안보정상회의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다.

3-1. 1975년 헬싱키에서 '안보와 평화'를 주제로 개최된 유럽안보정상회의는 '헬싱키 선언'을 통해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화해와 협력의 데탕트 시대를 열었다.

3-2.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은 1985년 집권 이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1989년 구동독에 주둔하던 구소련군을 철수시켰고,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3-3. 독일통일은 미, 영, 불, 소 4대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서독의 콜 수상은 시대의 변화와 미래를 예측하고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영국의 대처 수상,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협의하여 독일통일을 이루어냈다. 독일통일은 미영불소 4대국과 유럽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번영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독일통일은 지속적인 신뢰관계 형성과 평화외교의 결실로 이루어졌다.

4. 독일통일은 통일정책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평화 노력의 결실로 갑자기 이루어졌다.

4-1.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구서독시민들도 놀랐고, 세계도 놀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이 이렇게 갑자기 이루어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소련군이 구동독에서 철수한 이후 10월 9일 구동독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개최된 10만 명이 참여한 촛불기도회는 통일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기도회였다.

4-2. 구동독은 1989년 구소련군 철수 이후 자유선거를 실시했다. 이 때 사회민주당(SPD)은 구서독과 단계적 통일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기독교민주당(CDU)은 즉각적인 통일을 제시했다. 구동독주민은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을 선택해서 기독교민주당이 의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기독교민주당은 공약대로 구서독 연방헌법에 통합하는 결의를 해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독일 통일은 신속이 이루어졌는데, 1990년 동독에서 3월 8일 자유선거를 했고, 7월 1일 동서독 통화통합을 했다. 당시 동독의 마르크 가치는 서독의 1/4이었지만 서독은 1:1로 통화통합을 했다. 이로써 통일은 시작되었고,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4-3. 사회주의 국가인 구동독에서 주민들이 사회민주당을 선택하지 않고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을 선택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평등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구동독 지배체제는 평등하지도 않고 구서독보다 더 부패했다. 그리고 구동독이 구서독보다 더 잘산다고 했는데 이것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둘째는, 구서독이 지속적으로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이에 따른 다양한 사회문화교류협력 사업을 한 것이 구동독주민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은 것이다.

5. 우리는 독일통일에서 우리와 다른 지리적 여건, 역사, 국가특성, 열강의 간섭, 변화하는 국제환경의 차이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5-1. 독일은 이념 대결과 통일을 목적한 전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서독의 주민사이에는 우리와 같은 적대감과 증오심이 없었다. 특히 교회가 분열되지 않았다. 서베를린 주교가 동베를린도 관장했다. 정보교류 차원에서 동독은 라디오, TV시청을 허용했다.

5-2. 구서독은 통일정책이 아니라 평화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통일 방안 때문에 빌미로 동서독 간에 체제대결과 어느 한편으로의 통합에 대한 체제안보 불안이 없었다.

5-3. 구서독의 평화적인 동방정책으로 동서독간에 사회문화교류와 편지 왕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구동독의 60세 이상 주민은 구서독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다. 1949년 국가수립부터 1990년 통일 때까지 동독인의 1/4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열리자 매일 2-3천 명씩 동독을 떠났다. 구서독은 동방정책으로 매년 약 32억 달러씩 20년간 지원했다.

5-4. 구서독은 미영불소 4대국에 분할 점령되었지만 연방헌법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독일통일은 구동독이 구서독의 독일연방헌법에 통합함으로서 이루어졌다.

6. 통일 이전에 평화공존과 평화교류를 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통합 평화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6-1. 우리는 독일과 달리 동족 간에 이념대결과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적대감이 온존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의 도덕성이 있어야 남북의 관계회복이 가능하다. 우리는 미국과 구소련에 분할 점령당한 것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적으로 이념과 체제 대결로 갈등하고 동족 전쟁을 해서 분단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독일처럼 외세 극복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

6-2. 또한 우리는 통일을 명분으로 한 전쟁을 했기 때문에, 북의 적화통일도 남의 흡수통일도 적대적으로 상대편 체제 붕괴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일이 민족 지상과제이지만 통일을 먼저 말하게 되면 남북 대결과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통일보다 평화, 곧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평화공존의 원칙에서 평화 교류 및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6-3. 민족의 통일은 어느 한편의 승리나, 한편에 예속 당하는 제로섬(zero-sum) 정책 아니라 남북이 윈-윈(win-win)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통일은 독일처럼 남북의 평화관계 정상화를 통해 주변국 및 동아시아와 세계에 신뢰를 주고, 평화안보에 기여하는 plus-sum 원칙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만이 아니라 아시아 가난한 국가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을 통해 이들 나라들과도 신뢰와 평화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 특히 이미 우리나라에 와있는 조선족, 새터민, 아시아 가난한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을 포용하는 정책 및 함께 사는 사회문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사회 안에 신뢰, 포용, 관용의 평화문화가 있어야 북한과도, 이웃나라와 민족과도 평화공존하며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7. 정전체제를 넘어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는 도덕적,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7-1. 우리민족,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려면 과거에 전쟁을 했기 때문에 과거를 용서, 화해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도덕적 결단이 필요하다.

7-2. 6.15남북정상회담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에 근거한 햇볕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햇볕정책은 화해협력 하는 평화정책이다.

7-3. 6.15정상회담에서 합의, 공동선언한 내용은 5가지이다. 첫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둘째, 통일방안은 남의 국가연합과 북의 낮은 단계 연방제로 합의, 셋째, 이산가족과 인도적 문제 해결, 넷째, 경제협력을 통한 남북 경제균형발전과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교류 활성화와 신뢰구축, 다섯째, 이 합의 이행을 위한 실무회담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답방 등이다.

7-4. 이 공동선언에서 2항의 통일방안 합의는 통일 이전에 먼저 평화공존과 평화교류의 과정을 거쳐 남과 북이 용서 화해하고 상호신뢰하고 균형 발전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함께 사는 평화관계를 만들어 통일하자는 것이다.

7-5.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남과 북은 평화공존과 평화교류의 원칙에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분단 반세기의 적대화를 넘어 다시 동족이 되었고, 땅길, 바닷길, 하늘 길을 열고 다방면의 사회문화교류와 이산가족 정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했다. 또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등 경제협력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경의선과 경원선 철도의 연결을 통해 우리나라는 인공섬 같은 처지와 반도국가의 한계를 넘어 유럽까지 뻗어가는, 대륙과 대양의 중심국가가 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철의 실크로드, 평화의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7-6.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남북관계를 대결국민으로 전환시켜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고, 남북은 다시 과거 적대화로 돌아가게 되었다. 박근혜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책으로 이명박정부 보다 진일보한 대북정책을 시사했지만 북핵문제와 군사훈련관계로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개성공단까지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도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독일처럼 정당의 이념차이나 집권 여부에 상관없이 평화의 원칙에서 북한과 지속적으로 교류협력하며 관계정상화를 추진해야 한다. 사실 전두환정권도 버마 아웅산 테러 참사사건이 있었지만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했고, 노태우정권도 KAL기 납치 사건이 있었지만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합의를 도출해 내었다. 그러므로 분단을 정권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의 볼모로 삼는 소탐대실의 소아병적 행태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7-7.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북핵 문제 해결은 북한체제 인정과 인도적, 경제적 지원이 관건인데, 이것은 이미 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6개국이 참여한 6자회담에서 합의했다. 북한 핵 개발은 이 6자회담 합의가 이행되지 않은 결과이다. 따라서 박근혜정부는 6자회담 참여국들과의 적극적인 평화외교를 통해 6자회담 합의 이행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 관계정상화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서 미북간 주도권 갈등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북한체제를 보장하고 경제협력 하는 방안을 세우고 미중일러 4자의 동의를 얻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자주적 평화외교정책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6자 공동평화안보체제로 나아가는 큰 평화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7-8.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통한 지속적인 관계정상화는 코리아 리스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할 뿐 아니라 북한과의 경제협력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한 북한과의 교류협력 및 관계정상화는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통일 후 남북 사회통합에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에 통일비용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남한은 상호주의를 넘어서서 생존이 어려운 북한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계속해야 하며 이를 통해 북한주민의 마음을 얻도록 해야 한다. 북한 인권문제도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평화와 인도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7-9. 역사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는 서방세계의 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군사력을 가졌지만 소련과 중국을 이기지 못했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패했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막대한 희생을 당하면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현재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소련,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할 때 군사력이 아니라 수십차례 걸친 다방면의 문화, 경제외교를 했다. 우리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나라도 주변국과 문화, 경제, 평화외교의 역량을 키워가야 한다.

7-10.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세계 역사상 60년간 휴전상태가 지속된 유일한 나라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는 대량살상 무기가 가장 많이 밀집해있고, 전쟁 도발 위험이 항상 존재에 전문가들도 한반도가 세계 제3차 대전의 화약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국방장관 페리가 쓴 페리 프로세스를 보면,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북한을 선제 폭격하는 전쟁을 실행하려고 했다. 미국은 북한 폭격으로 미북간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한은 괴멸되고 남한도 파멸되어 한민족이 한반도 땅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결과를 예측하고도 폭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60년 전 미, 소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의 운명이 우리도 모르게 외세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카터와 김일성 회담의 성사로 전쟁은 미연에 방지되었다. 남북의 계속된 적대적 대결과 갈등은 어느 한편의 승리가 아니라 결국 민족의 파멸로 귀결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7-11. 갈등과 분열 및 적대적 분단과 정전체제의 장기화는 과거 이념의 노예가 되고 주변 강대국에 의존 및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분단으로 인해 세계를 반쪽 편향적으로만 인식하고, 남한은 미국과 일본에,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외적, 내적(심리적)으로 자주적 권리와 삶을 상실해 가고 있다. 특히 분단은 외세, 지배집단, 군, 관료 등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다수의 국민을 희생시킨다. 또한 국민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생활해야 하고, 분단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사회 내부적으로 이념 갈등이 계속되고, 사회적 분열도 가중된다. 지난 70년의 남북 분단은 북한과의 갈등과 적대감만이 아니라 남한사회 내부의 갈등과 증오 및 적대감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7-12. 지나 온 남북 관계의 역사를 볼 때 대결과 갈등도 있었지만 수십 차례 공식, 비공식적 만남과 대화를 했다. 이를 통해 조금씩 신뢰를 쌓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합의도 했다. 사실 남북이 지금까지 합의한 내용들을 착실히 실천했더라면 이미 평화공존의 단계를 넘어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국제적 외교 관계관례로 보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민족 갈등과 외세의 이익이 겹쳐있기 때문에 굴곡과 후퇴가 반복되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는 일반적인 국제외교관례로 해결해 갈 수 없다. 특히 북은 자존심이 매우 강해 남북의 만남에서 이것이 항상 걸림돌로 작용했다. 북미회담에서도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대화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북을 이해하며 대화해야 한다. 중국의 등소평이 '고양이를 잡는데 검은 쥐면 어떻고 흰 쥐면 어떻냐'는 흑묘백묘(黑猫白猫)의 철학으로 오늘의 중국 개방과 발전을 이루어낸 지혜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관계정상화가 중요하다면 자존심과 격식은 양보하는 큰 자세가 있어야 한다.

김대중대통령이 6.15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의제도, 격식도 그 어떤 사전 프로토콜도 없었다. 평양 순안공항에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영접 나오는지, 정상회담과 실무회담 당사자는 누구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국제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철저히 준비하고 평양을 방문했다. 6.15정상회담 성과는 김대중대통령의 이런 철저한 준비와 열린 통큰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정부는 지나온 남북 만남과 대화과정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생산적인 결과들의 토대위에서, 또한 합의가 가능한 것부터 북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 속담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며 관계정상화 노력을 해야 한다.

박근혜대통령이 천명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가 60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고, 동아시아에 공동평화안보체제를 형성하는 '서울 평화안보 신뢰프로세스'로 발전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 위 글은 지난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민족미래연구소가 주최한 6.15 13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강연 원고입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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