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이다. 책을 쓰려면 강하고 힘 있는 주제를 택해야한다. 그래서 멜빌도 수많은 포경선과 선원을 집어삼킨 흰 고래를 주인공 삼아 소설을 썼을 것이다.
동물에 관해 책을 쓴다면 고래만큼 매력적인 소재도 없다. 일단 고래는 거대하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명체 중 가장 큰 생물이다. 고래 중에서 가장 큰 대왕고래는 무려 무게 200톤에 길이는 33미터에 달한다. 그러니 고래에 관해 책을 쓴다고 하면 일단 크게 한번 먹고 들어간다.
게다가 고래는 신비하기까지 하다. 쇼를 하는 돌고래나 범고래 빼놓고 어찌 그 큰 고래를 수족관에 가둬 놓고 심심풀이 구경거리로 삼을 수 있겠는가? 고래는 그런 옹색한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유유히 심연을 가로지르는 그 붕정(鵬程)의 광대함은 동물원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우리의 배좁은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해 자폭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고래에 관한 소설이 아니고 논픽션을 쓴다면 어떠해야 할까? 매일 고래의 회유로(回遊路)를 따라 다니며 관찰·기록·분석하는 고래 생태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고래의 일생'이나 '고래의 사생활' 같은 책을 쓰기는 어렵다. 고래를 사랑하지만 전업 연구자가 아닌 애호가의 입장에서 고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인간의 욕심을 길잡이로 삼는 수밖에 없다.
희생물로서의 동물
대체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란 '사냥꾼-사냥감', '죽임-희생' 인 경우가 많다. 동서양의 고대 신화나 동굴 벽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모두 수렵민의 공격 목표물에 해당했다.
근대 이후 저술 활동의 영역에서도 동물은 마찬가지 위치를 점한다. <시튼 동물기> 같은 생태 관찰 유의 책이 아닌 다음에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 중심의 관점에서 다른 동물에 관해 흥미진진한 책을 쓴다면 바로 그 동물에 대한 약탈기가 될 것이다. 인간이 그 생물을 생존의 영양분, 기호(嗜好)로 섭취하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해온 가해-피해의 과정과 흐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얘깃거리가 된다.
우리 독서계에서 구할 수 있는 그런 유의 뛰어난 책이 몇 권 있다. 해삼 채취, 유통, 소비를 통해 아시아와 태평양의 문명 교류사를 탁월하게 펼쳐낸 쓰루미 요시유키의 <해삼의 눈>(이경덕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9세기 바이킹 시대부터 유럽의 무역 품목이었던 북해의 물고기 대구에 얽힌 분쟁사를 다룬 마크 쿨란스키의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박광순 옮김, 미래인 펴냄) 등이 그것이다.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세계 3대 진미라는 자신의 알젓 캐비아 때문에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 철갑상어의 아이러니한 운명을 그린 잉가 새프런의 <캐비아(caviar)>도 박물학적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훌륭한 읽을거리다. 국내 저자의 것으로는 주강현의 <조기에 관한 명상>(한겨레출판 펴냄)이 그런대로 이 분야에 명함을 내밀 만한 저작.
앞에서 언급한 책의 주인공이 된 동물의 공통점은 모두 대량 포획이 가능한 수중 생물. 인간은 영리하게도 단백질 공급원으로 지속적인 약취 대상이 될 육상 동물은 이미 가축으로 전환해 놓았다. 그런데 인간의 남획 욕망에 노출된 수중 동물 중, 거대한 규모와 심해의 은둔으로 상상력을 한껏 자극해온 고래의 한국어판 수난사는 지금껏 없었다.
유사 이래로 고래가 이끌고 다닌 '사실(fact)'의 스펙트럼은 생물학, 생태학의 제한된 시각으로만 서술하기엔 그 범람의 넓이와 깊이가 크고 심했다.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보통의 책 쓰기와는 달리 다양한 분야로 퍼진 관심의 그물망을 가진 저자를 만나야 비로소 형체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래를 향한 오랜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취재하고 연구해온 남종영이 세상에 선보인 <고래의 노래>(궁리 펴냄)는 우리 독서계가 가진 고래에 관한 인문학적 목마름, 호기심을 해소하고 만족시킬 만한 저작이다.
수수께끼의 동물, 고래
| ▲ <고래의 노래>(남종영 지음, 궁리 펴냄). ⓒ궁리 |
<고래의 노래> 전반부는 수중 관찰과 추적이 가능해진 이후 인간이 축적한 고래에 관한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수염과 이빨의 유무에 따른 고래의 분류로 시작, 공기방울인 '버블 클라우드'를 띄워 물고기를 잡아먹는 사냥 기술, 해안가로 몰려와 죽음을 택하는 '스트랜딩' 같은 고래의 특이한 생태를 들려준다. 인간과 돌고래가 역할을 나눠 함께 물고기를 잡는 브라질의 공동 어업, 수십 년째 해변 마을을 찾아와 인간과 교감하는 호주의 돌고래 떼 이야기 등 고래가 지능이 뛰어나다는 사례도 흥미롭다.
후반부는 바다의 괴물로 묘사된 신화와 역사, 회화 속의 고래를 통해 인간이 이 거대한 동물에 관해 형성한 관념의 줄기를 더듬어 간다. 비잔틴 사서에 등장하는 괴물 고래는 6세기 지중해에 50년간 출몰하며 고깃배를 뒤엎고 해변 마을을 괴롭혔다. 고래의 등을 육지로 착각하고 상륙했던 아일랜드 수도사의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이야기책의 소재가 됐다. 기원전 2000년 크레타 인은 궁전에 돌고래를 그렸고,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해안에 좌초한 고래를 판화로 제작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고래 수난사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힘을 줬고 독자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고래 사냥 '포경'으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고래 집단의 생명 풀(pool)을 고갈시켜 왔는지다.
17세기 북극 항로가 열리면서 북극해의 고래 학살이 시작됐다. 이전에 인간의 포악함을 경험하지 못했던 북극 고래들은 작살에 꽂혀 죽어갔다. 북극해, 북미 연안의 고래가 줄어들자 이번에는 남반구로 기수를 돌렸다. 포경 산업은 "한 지역의 고래가 소멸되면 이내 다른 곳을 찾아냈다."
식물성 기름보다 쌌던 고래 기름은 비누의 원료, 등잔불의 연료로 수요가 계속 늘어났다.
그을음과 냄새가 없는 고래 기름이 유럽과 북미의 밤을 밝혔다.
19세기 중반엔 고래의 몸에 꽂히면 폭발하는 폭약 작살까지 개발됐다. 이전까진 너무 커서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길이 30미터의 대왕고래마저 학살 목록에 올랐다. 무차별 포획을 견디지 못한 각 종 별 고래의 개체 수는 급감했다. 학자들의 유전자 다양성 분석에 따르면 근대적 포경이 시작된 17세기 이전의 혹등고래 개체 수는 최대 40만 마리로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개체 수는 기껏해야 1만 마리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1960년 이후 포경 산업이 주춤해진 이유도 고래 찾기가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
거물의 운명
1986년 포경을 금지하는 포경 모라토리엄이 몇 나라의 거센 반대를 뚫고 통과됐다. 전통적인 포경 도시와 마을은 고래 생태 투어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옛 포경 국가 아이슬란드의 고래 관광 산업은 이제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죽은 고래보다 산 고래가 인간에게 이득이 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
고래는 바다에서, 고래 쇼에서 구경거리로 생존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몇 년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책의 유용성을 이런 식으로 따지는 일은 불경스럽겠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직업의 관점에서 괜찮은 책이란 곧 체계적인 '비쥬얼(Visual)'의 구축이 가능한, 괜찮은 다큐멘터리로 빠질 것 같은 책이다. 이 책이 잘 정리해 놓은 근대 이후 고래의 수난사는 훌륭한 다큐멘터리 소재다.
<모비 딕>을 읽은 뒤, 돌고래 쇼를 본 뒤, 아니면 우연히 바다에서 고래의 등판을 잠시라도 목격한 뒤 고래에 대한 관심이 불현듯 일었다면, 고래에 관한 입문서로 더할 나위없는 책이다. 색인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고래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들춰볼 수 있는 작은 백과사전으로도 추천할 만하다.
그리고 평생 고래와 마주치지 못할 운명일지라도, 심연에서 울리는 거물의 음파, 그 떨림의 파장 속에 잠시 자신의 영혼을 적시고 싶다면 펼쳐볼 만한 책이다. 벼룩처럼 하찮은 소재로 어찌 무기력해진 상상력을 깨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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