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딱 1년이 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의 전환점으로 기록될지 모르는 후쿠시마 사고, 그 1년을 맞아서 '프레시안 books'는 특집호 '후쿠시마 그리고 1년'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후쿠시마 사고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책과 함께 선보입니다. <편집자> |
북핵 문제 해결의 유일한 대안이자 해결의 장으로 간주되고 있는 6자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2005년 9월 19일 9·19 공동 성명일 것이다. 핵문제 해결의 포괄적인 로드맵으로서 9·19 공동 성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6자 회담은 2008년 12월 이래 문을 열지 못하는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 2월 23~24일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 3차 고위급 회담을 마치고 25일 한국에 온 미 국무부 대북 정책 특별 대표 글린 데이비스는 6자 회담 재개 문제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북미가 2월 29일 대북 식량 지원과 우라늄 농축 일시 중지에 합의했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남북한과 미·중·일·러 4개국이 한자리에 모여 그것도 북핵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6자 회담은 이미 그 출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망 또한 어두웠다. 6자 회담이 열리게 된 과정이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같은 직접 양자 협상을 거부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가 관철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라고 해서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무조건 거부하고 부정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편협한 태도는, 그의 선악 이분법의 조악한 종교적 세계관과 함께 북핵 문제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북핵 6자 회담 지체의 진짜 이유는?
그런 점에서 첫 6자 회담이 열린 2개월 뒤인 2003년 10월 영국의 권위 있는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내놓은 연차 보고서 〈군사력 균형(Military Balance)>은 지금 다시 봐도 6자 회담에 대한 매우 탁월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보고서는 6자 회담이 표류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워싱턴의 분열'이다. 핵 동결과 안전 보장을 맞바꾸는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온건파와 북한이 먼저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핵을 폐기해야 한다'는 강경파 간의 분열을 부시 대통령이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라크 문제와 2004년 대통령 선거라는 이중의 부담에 직면한 부시 대통령의 태도였다. 백악관은 북한이 핵실험 등 이른바 '금지선(레드 라인)'을 넘지 않는다면 평양과 정면대결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고 IISS 보고서는 전망했다. 아니 부시 행정부는 북이 긴장과 위협에 이용할까봐 아예 레드 라인을 설정하지 않았다. 이른바 '적대적 무시'다.
그렇다면 6자 회담이 표류하는 상태가 지속될 텐데 평양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IISS 보고서는 결국 평양의 대응 방식이 북핵 문제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외교 전문 기자 글렌 케슬러는 이 '워싱턴의 분열'을 대북 정책의 이중적 접근이라고 표현했다. 한쪽에선 북한과의 대화를, 다른 한쪽에선 마약 및 위조지폐 밀매 등 불법 행위와 미사일 판매 등을 문제 삼아 압력을 가하는 이중적 접근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이중적 접근이지, 대화와 압력의 병행은 분열, 충돌, 혼선만을 낳았다. 부시 행정부 내 온건파에게 압력은 대화를 위한 수단일 수 있었지만, 체제 전환론을 주장한 강경파들에게 대화는 압력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대화와 제재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맞서면 주도권은 강경파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선(先) 핵 폐기를 고수하며 양자 대화를 거부했다. 대화는 없고 압력만 있는 일방주의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가만히 앉아서 제재와 봉쇄를 받고 있으리라고 보는 건 순진한 것이었다. 적대적 무시 정책 또한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다. 레드 라인은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 양쪽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계선을 두지 않자 북한은 아무런 제약도 없다는 듯 핵실험이라는 극한적인 수단과 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개발 및 발사 등 모든 최악의 수단을 다 동원했다.
실제로 IISS가 예견했듯이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을 바꾸고 6자 회담을 통해 1단계인 핵시설의 폐쇄와 2단계 조처인 핵 불능화의 합의를 담은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를 이끌어 낸 결정적 계기는 2006년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었다.
럼스펠드·라이스의 '선방'과 라이스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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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문을 연 것은 럼스펠드였다. 2011년 2월 발간된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따르면 부시 1기의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부하들 관리를 잘못한 무능한 장관이며, 2기 라이스는 회의를 좋아하는, 경험이 부족한 학자에 불과하다. 럼스펠드는 파월이 수장으로 있는 국무부는 언론에 흘리는 것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국무부를 좋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펜타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책에 대해 "복수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8월 말엔 체니가 나섰다. "라이스의 결정은 대부분 미숙했다. 파월은 일찍 그만두길 잘했다" 체니의 회고록 <나의 시대 : 사적이고 정치적인 회고록>의 한 대목이다. 그러자 두 달 뒤인 11월 라이스가 <최고의 영예, 워싱턴 시절의 회고>로 반격을 가했다. 럼스펠드는 파월이 정보를 흘렸다고 비난했지만, 라이스는 "2002년 10월 북핵 기밀 정보를 언론에 흘린 것은 딕 체니 당시 부통령실이었다"고 주장했다. 체니와 그 보좌관들이 국가 기밀을 누설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책 방향을 관철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2002년 10월 대북 정책 특사 제임스 켈리의 방북 때 북이 우라늄 농축을 시인했다는 발표와 그로 인한 2차 핵 위기는 체니 부통령실이 그 정보를 언론에 흘렸기 때문에 공론화됐다는 것이다.
라이스의 주장은 일본 <아사히신문> 대기자인 후나바시 요이치가 쓴 <김정일 최후의 도박(The Peninsula Question)>(오영환 옮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펴냄)이 전하는 당시의 상황과 일치한다. 후나바시에 따르면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의 문제가 있는 시기에 다른 일로 손발이 묶이고 싶지 않았다"고 증언했다면서 북한 문제는 덮어두거나 뒤로 미루고 시간을 벌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라이스는 이밖에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에 대해서도 체니가 막후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등 부시를 전쟁과 대결로 몰아간 주역이 바로 체니였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당사자인 파월은 체니의 자서전이 부시 대통령은 물론 당시 행정부에서 일한 다른 주요 인사들과 관련된 일을 폭로(disclosures)한데 대해 "비열한 언동(cheap shots)"이라고만 쏘아 붙였다. 파월은 이미 1995년에 자서전적인 회고록 <나의 미국 여행기(My American Journey)>를 펴낸 바 있다. 체니의 이 회고록에 대한 비판은 파월 측근이자 장관 비서실장이었던 로렌스 윌커슨이 맡았다. 월커슨에 따르면, 체니는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며 그가 회고록에서 자기 정당화에 애쓰는 데는 부시 1기에서 사실상의 대통령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전범으로 기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에게 체니의 회고록은 "부시는 북에 이렇게 당했다"는 체니의 고백으로 읽히고 있다. 체니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북한 정권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까지 추진했으나 임기 말엔 핵시설 검증 약속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빼줌으로써 '부시 독트린'을 스스로 부정했다. 체니는 이를 "좌절(Setback)"로 표현 하면서 그 책임을 라이스 장관과 심지어 부시 대통령에게 돌렸다.
사실 회고록을 통한 이런 '난타전'은 절제되고 점잖은 것이다. 현실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은 훨씬 더 심각했고 매우 격렬했다. 예컨대 2003년 10월 2일치 미국의 <뉴스위크>에 따르면 아미티지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을 박쥐로 비유할 정도였다.
"우리 조직 안에 박쥐들이 있다. 온종일 거꾸로 매달려 날개로 눈을 가린 채 아무 것도 안보는 척한다. 그러다 밤만 되면 저쪽(부통령, 국방장관, 국가안보회의 등에 포진한 네오콘)으로 날아가 모조리 고해 바친다."
부시 대통령의 <결단의 순간들>을 포함해 이 회고록들은 북핵과 주한미군 재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 한미 관계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관타나모 기지의 추악한 고문, 월스트리트 발 금융 위기 등 21세기 첫 10년 격동기의 주요 사건을 보여준다. 게다가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의 핵심 당사자들의 갈등과 이견이라는 프리즘은 이 사건들의 속살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런 이견과 갈등은 2001~2008년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뿐만 아니라 한미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의 사람들과 국내 수구 언론들에게는 한미 동맹이 훼손되고 균열을 보인 건 노무현 정부의 자주파 때문이고 노 대통령의 대북 정책 때문이었다. 그들은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는 이런 부시 행정부 내부의 혼란과 분열은 보려하지 않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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