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하루아침의 얄팍한 착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재치가 예술일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참으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 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이 된다."
누구 글이냐고 물었더니, 혜곡 최순우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을 당시 뵙고 전해들은 말씀을 자기가 옮겨 적은 것이란다. 그는 끝이 안 보이는 전통염색의 앞날이 막막했고, 당장이라도 걷어치우겠다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있을 때 혜곡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다. 종이에 받아 적은 그 말씀은 30년 넘게 그의 지갑 속에 들어있다.
그는 말했다. "내가 굽은 나무라서 선산을 지키는 게 아니다. 혜곡 선생의 말씀이 나에게 불도장이 됐기 때문이다." 혜곡은 한 인간이 걸어갈 길을 한 말씀으로 열어주었다.
1990년 초, 나는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아리미쓰는 해방 이후 한국의 발굴사 초기에 큰 영향을 미친 고고학계의 거목이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을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그를 우리 박물관 측 인사들이 붙들어 앉힌 친한파 학자이기도 하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의 차림은 단출했고 기억력은 야무졌다.
그에게 혜곡에 대한 추억을 물었다. "아, 최순우 선생…." 외마디만 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개성박물관에 계실 무렵 처음 만났지요. 동분서주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아리미쓰는 호우총을 발굴하던 시절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자기 공로를 결코 들먹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인 뒤에야 혜곡의 얘기로 되돌아갔다. "나중에야 알았소. 나는 캐내는 사람이었지요. 최 선생은 퍼뜨린 분입니다. 한국의 전통미술이 아름다운 건 그분의 글에 전통미술이 얹혀갈 때였지요." 혜곡은 이제 가고 없다. 아리미쓰도 백수를 누리고 떠났다. 혜곡은 일본 노학자의 늙은 추억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전통미술을 아름답게 만든 글쟁이로 말이다.
▲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이충렬 지음, 김영사 펴냄). ⓒ김영사 |
어디 사람뿐이랴. 혜곡은 심지어 자기가 키우던 바둑이와도 살가운 인연을 맺었다. 피난길에 집에 두고 온 바둑이와 재회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의 수필은 읽노라면 눈시울이 더워진다. 그의 타고난 마음결이 그 글에 고스란하다. 그렇다. 혜곡의 글은 그의 결곡한 마음씨와 결합할 때 가장 미덥다. 독자의 마음도 덩달아 동심원을 그리게 된다.
이 책에 인용된 혜곡의 글 몇 토막을 읽어보자. 거기에 혜곡의 마음자락이 엿보인다. 먼저 부석사에 대한 글.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은 건축물인데, 거드름이 없어 좋단다. 다음, 고려청자를 시처럼 읊은 글이다.
"으스댈 줄도 빈정댈 줄도 모르는/ 그리고 때로는 미소하고 때로는 속삭이는/ 또 때로는 깊은 생각에 호젓이 잠겨있는 이 푸른빛이/ 자랑스러워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청자는 그릇인데, 으스대지 않아서 자랑스럽다는 얘기다. 도자기로 만든 주전자를 보고 쓴 글은 이렇다.
"마치 잘생긴 어미닭이 양지바른 처마 밑에 둥우리를 치고 앉은 자세라고나 할까. 조금도 도도해 보이거나 거드름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마지막으로 한국미(韓國美)에 대한 글이다.
"초가지붕과 기와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곳, 여기엔 시새움과 허세도 가식도 없다. (…) 헤벌어지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고 번쩍이지도 않는, 그리고 호들갑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아름다움이 바로 은근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눈썰미 있는 독자는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저 글들에 담겨있는 혜곡의 입버릇을 말이다. 그것은 곧 '거드름이 없다' '으스대지 않는다' '뽐내지 않는다'로 모아진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태어난 핏줄과 자라난 자리에서 찾을 수 있고, 뻐기지도 아첨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혜곡의 삶이 그랬다. 그는 허세와 가식이 싫었다. 뒷짐을 진 거드름과 어깨가 올라간 으스댐이 못마땅했다.
어찌 이것이 미술에 국한되는 얘기겠는가. 그의 미술은 인생을 품에 안는다. 혜곡의 됨됨이와 뱀뱀이 또한 그러했음은 불문가지다. '글이 곧 사람'이란 옛말은 그르지 않다.
혜곡은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분이다.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다 순직했다. 일제 때 개성박물관 말단으로 들어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혜곡의 여로는 이 책의 연대기에 자세하다. 저자 이충걸은 고인이 남긴 600여 편의 글을 읽었고, 그 밖의 문헌 자료를 뒤지거나 사승(師承) 관계를 일일이 취재했고,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밑받침해 전기를 썼다.
이미 간송 전형필의 일생을 엮어낸 바 있는 저자라서 간송의 지우를 얻은 혜곡의 전기에 애정이 듬뿍 실렸다. 그 애정은 꼼꼼한 취재로 연결돼 아슴아슴한 혜곡의 자취가 눈앞에 확연하도록 되살아났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지음, 학고재 펴냄)의 지은이이자 '미문(美文)의 한국미 전도사'로만 혜곡을 알았던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혜곡이 걸어간 길이 고투의 나날이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도 시대의 척박함과 곤고함 속에서는 단지 헛것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에 눈떠가는 젊은 날의 혜곡의 도정은 뭐랄까, 될성부른 떡잎의 예지를 넘어선 일종의 운명적 불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저자도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런 시대에 그는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에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 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입지전적인 노력과 뚝심 또한 시대를 초월해 본받을 만한 삶의 자세였다."
이 책에는 그 고단한 시절의 그늘에 숨겨졌던, 때로 슬프고 아픈, 때로 통탄하고 찬탄할, 갖가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전란의 와중에 다른 사람은 피난 보따리를 싸는데 혜곡은 밤을 세워 박물관의 서류와 국보를 포장했던 사람이다. 군사정부 시절,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지적했다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던 혜곡이다.
우리 미술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경이로운 전시 기획은 혜곡의 추진력에서 나왔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한 우리 것의 천덕스러움에 귀한 태깔을 입혀 보란 듯이 내세운 자신감은 혜곡의 너름새에서 꽃폈다. 이처럼 고루 미친 혜곡의 행보는 이 책의 줄거리에서 하나하나가 도드라지게 묘사돼 있다.
혜곡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 정이 깊은 줄 진작 알았다. 우리는 지금도 그 정을 제대로 못 느끼며 산다. 어찌해야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 내 것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 혜곡은 그 정을 알기 위해 마음 속 깊이 앓았던 사람이다. 아픔도 나누고, 아름다움도 나눠야 한다. 혜곡은 "함께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덧붙였다.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롭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혜곡의 글이 아름다운 것은 같이 앓고 같이 나누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공감하는 반려자'를 그리워했다.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가 그의 숨어있는 짝들을 불러내 주면 참 반갑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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