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하겠지만, 읽을 작정으로 일부러 주문까지 해서 손에 넣고도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애서가와 활자 중독자들이 많은 옆 나라 일본에서는 마냥 쌓아만 두고 읽지 않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자조적으로 '쓰미혼(積み本)'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런 상태의 책들이다. 몇 십권 정도라면 짬짬이 시간을 내서 소화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언젠가 읽으려고 쟁여둔 책이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릿수에 육박하기 시작하면 자주 쓰는 서가 이외의 장소에 쌓아두는 수밖에 없으므로, 정작 읽으려고 하면 보물찾기를 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물론 우선순위를 매겨 차곡차곡 보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조차도 흐릿해지면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일종의 연옥(煉獄)과도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갑작스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 읽겠고, 갑작스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전기가 끊기고 문화적으로 장기간 고립되는 상황이 온다면 선견지명을 자화자찬하며 더더욱 열심히 읽을 것이 뻔한 사랑스러운 책들이지만, 예의 우선순위가 결코 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안 읽게 되는 책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원한다면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안심감 때문인지, 아니면 문제의 책 자체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모종의 아우라를 두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하여튼 이 글을 쓰면서 무작위로 '그럴듯해' 보이는 책을 찾아보다가….
1. <니콜라 테슬라>(마거릿 체니 지음, 이경복 옮김, 양문 펴냄)
원제는 1981년에 처음 출간된
| ▲ <니콜라 테슬라>(마거릿 체니 지음, 이경복 옮김, 양문 펴냄). ⓒ양문 |
집어들고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안 읽었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번역된 문장 몇 줄을 읽고 여러 모로 감명(?)을 받아 영어판을 주문하려고 하다가 깜박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혹자가 평했듯이 이제는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너무나도 인지도가 낮은 이 위대한 인물의 전체상을 파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입문서일 것이다.
2. <파운데이션> 시리즈(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최서래 옮김, 현대정보문화사 펴냄)
소싯적에 아동판으로 시리즈 첫 작품인 <파운데이션>(1942)과 중편 몇 편을 읽은 기억이 있지만, 성인이 된 뒤로는 전성기에서 반세기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영어권 과학소설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회자되고 있는 아시모프의 이 대표 시리즈를 여지껏 완독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영원의 끝>(김창규 옮김, 뿔 펴냄)이나 <신들 자신(The Gods Themselves)>(1972) 등 아시모프의 강점으로 간주되는 아이디어의 참신함 쪽에 무게가 실린 단독 장편들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대표작인 <로봇>(정철호 옮김, 현대정보문화사 펴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오랜 기간에 걸쳐 쓰인 탓에 작가 본인의 사상적, 창작적 변천이 여과없이 드러나서 작품의 완성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선입견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취향과는 별도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데로 손더스 엮음, 황건 옮김, 까치글방 펴냄)에서 힌트를 얻어 몇 만년에 걸친 은하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시리즈는 SF를 탐구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봉(巨峰)으로 남아 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필자의 "언젠가 시간이 날 때 읽을 고전" 목록의 필두를 차지하는 책들이고, 바로 그 이유에서 10여 년 전에 자리를 덜 차지하는 페이퍼백판으로 구입했다. 미국 최고의 SF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마이클 웰런의 커버아트가 인상적이다.
3. <아빌리온(Avilion)>(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Gollancz 펴냄)
필자가 번역하고 2001년에 열린책들 경계소설선의 일환으로 출간된 세계 환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미사고의 숲>(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직접적인 속편이다. 작가 로버트 홀드스톡은 <아빌리온>을 출간하고 나서 불과 4개월 뒤인 2009년 11월에 61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북 웨일즈에서 별세했고, 전세계 팬들의 추모를 받았다.
<미사고의 숲>은 신화(myth)의 심상(imago)이 현대인의 마음에 반응해서 물리적으로 형상화하는 영국의 원시림 라이호프 숲을 무대로 한 환상소설이다. 홀드스톡은 그 뒤로 〈미사고 사이클〉로 명명된 다섯 권의 소설을 썼고 문단 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빌리온>은 <미사고의 숲>의 직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스티븐과 귀네스를 위시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팬들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책이지만, 더 이상 홀드스톡이라는 탁월한 작가의 신작에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의 경우는 입수하고도 미처 읽지 못했다기보다는 읽는 것을 의식적으로 미루고 있었을 공산이 커 보인다. 적극적으로 번역 출간을 추진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진작 읽었어야 마땅한 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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