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벼랑 위의 꿈들>(정지아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을 막 집어 들었을 때 내 생각은 '안 팔리는 책을 참 어렵게 만드는군…'이라는 정도에 그쳤다. 목차로 보건대 오늘날 치열한 계급투쟁의 전선에 있는 다양한 삶에 관한 내용이 이 책의 전부일 거라고 추측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실제로 그러한 추측은 최소한 사실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내가 이 책에 가졌던 느낌이 다소 안이한 것이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역시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책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 <벼랑 위의 꿈들>(정지아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
보통 운동권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환상을 일정 정도 갖고 있는데, 나의 경우는 그런 증세(?)가 좀 덜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투쟁을 전 국민이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위대한 노동이니 역사의 투쟁이니 하는 말들을 믿지도 않았다. 다만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이익 단체인데 이들의 요구가 정당한 것임에도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 묵살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부당함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계급의식'이라 부르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사회의식이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운동권들이 짊어진 사명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머리로 하는 생각에 불과했다. 정작 노동조합에 입사(?)를 하고 나니 모든 게 다 부당해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덤프트럭 기사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님이 돼있었고 일거리를 얻기 위해 자기 임금을 스스로 깎아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현장에서는 이름이 아닌 '야!'로 불리며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집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으며 임금은 제 때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고 중간업자가 임금을 싸들고 외국으로 도망을 가는 일도 빈번했다. 덤프트럭이 공급 과잉인 상황이라 한 달에 15일도 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일감을 찾게 되면 그동안 벌지 못한 몫까지 충당하기 위해 소위 '탕뛰기'(운송 횟수에 비례하여 임금을 받는 것)를 하느라 하루에 4시간 밖에 잠을 못자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졸음 운전으로 사고가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과적 단속'에 걸려 벌금형을 받는 것 역시 덤프기사들의 일상이었다. 짐을 싣는 양을 조절하는 것은 굴삭기이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운송 단가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한 번에 최대한의 양을 실을 것을 굴삭기 기사에게 주문한다. 덤프기사는 자신의 덤프트럭에 어느 정도 무게의 짐이 실렸는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과적 여부를 판별할 계측기마저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 벌금형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그야말로 '복불복'의 문제였다. 물론 벌금이 나오면 전액 덤프기사가 이를 부담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선배 운동권들에게 말하며 분개했다. 건설노조 등에서 이리 저리 주워 모은 지식을 통해 건설 산업 전반에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호들갑을 떨며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멀뚱멀뚱 날 바라보며 '세상이 그렇게 부조리로 가득 찼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고 반문했다.
그 때는 선배 운동권들에게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애초에 갖고 있던 알량한 지식들에 의하면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것들은 대개 법을 지키라거나, 임금을 인상하라거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식의 것들이었는데, 덤프연대가 요구하는 건 기본적인 인간의 상식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달라는, 그야말로 소박해 보이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힘 센 노동조합들의 투쟁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정말로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고 본다. 그 시절 그렇게 힘이 세보였던 노동조합들도 과거에는 덤프연대와 비슷한 처지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 운동가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온 몸에 기름을 묻히고 쇳가루 섞인 밥을 먹었다든지 하는 얘기들 말이다.
이 책을 읽으니 당시의 기억이 새롭다. 막연히 누군가가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과 직접 개별 노동자 또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책에서 건조하게 기록해놓은 이주 노동자, 콜센터 상담원, 활동 보조인, 재래시장 상인, 철도 노동자, 위안부 피해자, 배달원, 방송 보조 작가, 간호원, 운송 노동자 등의 구체적인 삶은 우리의 가슴을 자꾸만 아프게 한다. 그들이 정말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지경에서 고생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게 끔찍한 것일지언정 '일상'에 살고 있다. 그들의, 우리의 일상이 세상의 어떤 특이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이자 전부라는 것이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한다.
이러한 일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미처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내고 필요한 것은 그저 몸의 휴식과 정신의 안정이다. 자신이 어떤 부당함을 겪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침대에 쓰러져 누워 매 순간마다 떠오르는 불안한 미래를 한시라도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다음 날에도 다름없이 이어질 자신의 삶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계를 이어갈 수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손쉽게 우리 모두가 손을 잡고 '투쟁'을 하자는 말을 꺼낼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각각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는 조직을 찾을 수 있다. 노동조합이 이미 있는 경우도 있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단체들의 공동 대책 위원회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에 다루는 몇몇의 경우에는 등장인물이 실제 그러한 조직에서 활동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르포르타주를 통해 더 잘 그려낼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덤프연대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미처 상상해보지 않은 범세계적(?) 부조리에 놀라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서두에 말한 르포르타주라는 형식은 이러한 경험을 사람들 사이에 확산시키기에 매우 좋은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끝내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기득권에 함께 저항을 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그저 낭만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책으로, 글로 그 정도의 위업을 달성한 위인의 수를 인류 역사를 돌아보며 세어보기 위해서는 손가락 열 개면 충분할 것이다. 또 기적적으로 그러한 낭만이 실현되더라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가 없다면 사람들의 희망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또한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다. 또 다시 보수 정부가 들어섰고 제1야당은 패배의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다. 노동자·서민의 삶을 대변하겠다며 야심차게 등장했던 진보 정치는 차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어제는 오랫동안 진보 정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던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은 권력과 기업의 유착 관계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좌절을 딛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진보 정치의 숙명일 것이다. 그러한 숙명을 다시 떠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고 이웃들의 처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보고 자꾸 눈물이 났다. 무언가에 감동해서도 아니고 누군가를 동정하게 돼서도 아니다. 우리 처지가 갑갑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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