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다거나, 새롭다거나 하는 말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존 버거의 감상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존 버거가 허튼 말할 사람은 아니지만, 삶이 더 크게 보이는 경험은 생각보다 흔한 것 같다. 그게 꼭 책에 관한 것일 필요도 없어서 역시 이 한 문장으로는 다이어의 작업을 이해하는 실마리일 것 같지 않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커진 삶을 어떻게 대하고 유지할 것이냐 일 텐데, 작가의 답을 들어보기 위해서는 <지속의 순간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한다.
▲ <지속의 순간들>(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사흘 펴냄). ⓒ사흘 |
바로 이런 방식 때문에 책의 첫 인상은 여행 가이드 같다. ("이쪽을 보시면 워커 에반스가 사진을 찍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던 길이 있습니다. 그는 농업안전국의 의뢰를 받아 이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는 좀 불량한 직원이었죠.") 때로는 냉소적인 연구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진을 꼭 이런 방식으로 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 방식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얼마간은 '약을 파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도로시아 랭이 찍었지만, 실은 유진 스미스가 찍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사진들 사이에는 40여 년의 간극이 있는데, 여기 중절모 쓴 남자가 보이시죠? 놀랍게도 이 두 사진의 모자 쓴 남자는 동일인물입니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사기꾼 중에 '내가 약에 정통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건 나뿐일까? 다이어는 마치 사진의 '사'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내가 사진을 좀 찍어 봐서 아는데. 이런 말은 무용합니다. 나는 카메라조차 없어요. 사진을 찍는 건 관광객들이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할 때뿐이죠. 그것도 그들의 카메라로. 내가 찍은 사진들은 일본 어딘가를 돌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는 카메라가 없다고 고백했을 뿐 사진을 모른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래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어쩐지 '사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진에 대해 말하기 전에 쓴 책들의 목록이 다음과 같을 땐 특히 그렇다.
<파리 트랜스>, <베니스의 제프, 바라나시에서 죽다> 여기까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소설. 양쪽 다 패러디처럼 보인다. <영국인의 태도>-존 버거에 연연한다는 느낌. <그러나 아름다운>-"악기는 하나도 다를 줄 모르지만"이란 단서를 굳이 달아놓은 재즈 비평. <솜므의 실종 용사, 순수한 분노를 넘어서>-부제는 "D. H. 로렌스와의 레슬링"이다. <요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가>-?!, <조나 : 방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영화에 대한 책>-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책. 그가 팔고 있는 게 약 아니면 약 비슷한 무언가라는 게 드러날 것만 같은 목록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속의 순간들>은 전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막힌 로드무비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진 비평서나 사진사(寫眞史)를 넘어 볼라뇨를 떠올리는 건 역시 과장일까? 심지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출신의 이 백인 작가는 심지어 꽤 댄디한 인상까지 갖추고 있다. (그는 2009년 영국판 <지큐(GQ)>가 뽑은 그 해의 작가인데, 같은 리스트의 2012년 수상자는 키스 리처드였다. 리처드의 책에는 마리안느 페이스풀이 '믹 재거의 그것은 작다'고 말한 부분이 여과 없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연혁을 좇는 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해진 이야기.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범상치 않고, 예술에 대한 주체 못할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바람을 피운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차를 몰아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도 역시 닮았다. 그들이 탄 차는 어쩐지 캐노피가 열린 캐딜락이었을 것만 같고, 안쪽에는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은 창문 밖으로 쭉 뻗은 채 담배 연기를 휘날리는 사진가들이 보일 것 같다. 이들은 아마 예술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거나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중일 것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달리 이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아마 부자였을 것이고, 미국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지속의 순간들>에는 닮은 느낌이 있다. <지속의 순간들> 쪽의 이야기도 얼마간은 '허사가 된 비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가 있다면, <지속의 순간들>에도 에드워드 웨스턴과 워커 에반스가 있다. 주변 인물로는 존 스트랜드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등이 있겠으나, 조지아 오키프와 관련한 그들의 사연은 꽤나 유명하니 굳이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이 이야기에는 나머지 서른여덟 명의 사진가와 그 수에 준하는 작가들이 인용되거나 언급되고 있지만, 그렇다면 (서른여덟 명이나 남았기 때문에) 오히려 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허황된 묘사처럼 진지한 탕아가 되어 여행을 떠난 사진가가 실제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웨스턴으로, 정물처럼 신체를 꼬며 웅크린 여자의 누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타고난 난봉꾼이었던 웨스턴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모두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옷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던" 여자 친구들의 누드를 무수히 남겼다. 그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그는 "다부지고 고집이 센 작은 체구의 사내"이며 "자신의 예술에 대한 확고부동한 진지함"을 가졌고,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웨스턴은 인간의 굴곡이야말로 신이 창조한 진정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고, 그것과 닮았다는 이유로 변기도 사랑했다. 그래서 변기에 대한 사진을 찍다가 아예 그쪽으로 천착해 조형적인 사물-바위, 조개나 식물, 이를테면 후추, 양배추, 양파, 박 등-을 찍어댔다. 개중에는 고의적으로 음란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도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상황에 대해 "웨스턴 같은 작자는 바위나 찍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웨스턴은 개의치 않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반면 에반스는 "뾰족한 가시로 덮여 있어 다루기 힘들며, 속물적이고 이기적이며, 냉담할 뿐 아니라 자기도취적인 사람"(<워커 에반스 : 열화당 사진문고 6>(룩 상트 지음, 김우룡 옮김, 열화당 펴냄))이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들은 그가 농업안전국(FSA)에 고용되어 있을 때 찍은 것들이다. FSA의 실권자 로이 스트라이커는 자신의 일에 깊은 감동을 느꼈거나 아니면 애초에 감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세하고 엄격하며 동시에 시적인 '촬영 대상 가이드'를 사진가들에게 제공했다. 이때의 멤버 중에는 도로시아 랭이나 벤 샨처럼 자신의 작품을 남기려는 각오를 품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냥 지시대로 평범한 사진을 찍은 이들도 많았다.
에반스는 점점 더 세밀해지는 가이드에 질려버렸고, 이민자 안정 정책에 대해서도 쓸 데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원금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펜실베이니아부터 루이지애나, 앨러바마, 캐롤라이나 등지에서의 작업을 수행했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흥미로운 것만 찍거나,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같은 장면을 같거나 아예 다르게 두 번씩 찍어 하나는 자신의 작업물로 챙겼다.
1934년 마흔 여덟이던 웨스턴은 당시 열아홉 살이던 채리스 윌슨을 만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누드를 찍었다. "1937년 4월과 1939년 3월 사이에 그들은 애리조나, 워싱턴, 오리건,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전역을 여행했다. 운전은 채리스가 했고, 웨스턴은 사진을 찍었다." 야망에 넘친 웨스턴은 질투에도 솔직했다. 그는 존 스트랜드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했지만 스트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워커 에반스를 괜찮은 사진가 명단에 포함시켰지만 에반스가 웨스턴을 무시해 다시 한 번 부아가 치밀었다. 여러 면에서 그의 선배격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치 역시 웨스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니 그는 다시…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된다. 월트 휘트먼의 <풀잎>에 사용될 사진을 의뢰받게 된 웨스턴은 "휘트먼 자체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동시대의 미국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사진을 찍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출판사는 반대했고 담당 편집자는 노심초사했지만 그는 그런 위협에 굴할 '쪼잔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세상을 포괄하는 건 그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여정에서 그는 인상 깊은 사진들을 남겼다. 웨스턴은 자신이 농업안전국이나 다른 곳에서 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하던 차였다. "편집자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그는 에반스나 도로시아 랭이 경험한 것들과 유사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인지 대책 없는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다른 동시대의 사진가들과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35년과 1941년. 6년의 시차를 두고 둘은 벨 그로브 농장이라는 동일한 장소에 도착한다. 도착하기 직전 한 농장에서 웨스턴은 "자신의 가장 에반스적인"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기점으로 그들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질 예정이었다. 에반스는 마치 웨스턴이 그랬던 것처럼 10살 연하의 젊은 여인을 만나 그녀의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은 것은 어쩌면 누드였을 것이고, 결국 유부녀였던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6년 후 벨 그로브에 도착할 무렵 채리스와 웨스턴은 심각한 말싸움을 나눈다. 5년 뒤인 1946년 둘은 최종적으로 갈라선다. 이즈음 웨스턴은 파킨슨병의 징후를 발견했고, 1951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1948년의 것이었고, 이는 절망이 앉을 자리도 모자랄 것처럼 짧고 한쪽 다리가 부서진 벤치였다.
1973년까지 장수해서 살아남은 에반스는 폴라로이드 SX-70 카메라를 손에 넣는다. 1945년부터 <포춘>에서 "여가 같은 일"을 제공 받은 그는 배도 나오고, 생각도 둔해지고, 마음은 심드렁한 그런 인생을 보내며 천천히 늙어갔을 것이다. 처음 그는 폴라로이드를 장난감으로 여겼지만 이내 자신만의 실험을 시작했고 2600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가 찍은 것들은 이제껏 찍어왔던 것들의 대리물이거나 폐품, 이상하게 색이 바란 화장실 풍경, 혹은 조잡한 쓰레기 따위였다.
사진가들은 각자 자신 있는 분야가 따로 있었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주제를, 또는 공유 되는 어떤 것들을 찍었다. 절망이 앉을 자리를 항상 비워둔 것 같은 벤치의 이미지부터 손과 등, 맹인과 누드, 도로와 자동차극장, 계단과 울타리, 문과 창밖의 풍경, 주유소와 이발소처럼 특별한 어떤 것들은 위대했던 과거의 영웅들 혹은 영혼들을 소환했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출발한 환영이 어느 한 곳에 모여 사진 속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모자를 얼굴로 가리고 외투로 몸매를 가린 완전무결한 익명은 여러 장의 사진에 몰래 들어갔다.
보르헤스, 쉼보르스카, 진 리스, 카프카… 언급되는 이름들은 무수히 많다. 이 많은 이름들은 각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고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텍스트에 기대어 이 책은 미국의 사진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아마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방식이기를 바라면서 적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 비평집은 처음엔 일기처럼 보였다가, 여행 가이드인 척 굴었다가, 에세이가 되었다가 결국 소설이 되려는 순간까지 내달린다. 쉬지 않고 달리는 이미지는 <이지 라이더>의 그것, 도로시아 랭, 그리고 그와 동석한 잭 케루악의 유산처럼 힘차게 달리다가도 급작스레 머물러 에드워드 호퍼의 풍경을 재현하기도 한다.
마치 두 사람의 인생을 다룬 것처럼 끊임없이 대치되는 이미지들을 등장한다. 그래서 모두 읽은 뒤에 책에 포함된 사진들이 정확히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웨스턴의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 마치 에반스의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진으로 둘러 본 역사이며 (아쉽게도 미국의 역사일 뿐이겠으나) 대기 중에 스며든 각별한 이미지들이다.
이제는 누구나 간단히 즉석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것을 아쉬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기는 누구나 쓰는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와 사진, 책과 예술, 사진과 정치에 대해 일기를 써야 하며 그것을 서로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시를 짓거나 사진을 찍고 싶어지지 않을까? <지속의 순간들>이 일단 정지한 곳은 9.11을 추모하기 위한 전시다. 중절모를 눌러 쓰고 외투를 입은 익명의 그림자들이 사라진 곳으로 그들의 환영이 몰려드는 것이다. 무언가 긍정할 수 있게 만드는 흡족한 결말이라고? 그래서 이 글도 그냥 이렇게 끝나버리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는 것들은 없다. 누구의 운명도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결말의 몇 페이지 전으로 돌아가 멈춰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말미에 삽입된 이 사진은 제임스 나흐트가 코소보의 메야에서 찍은 기묘한 인간의 형상이다.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보이는 형상은 선사시대의 기록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느 다른 행성에 떨어진 인간의 잔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사진의 정체는 코소보에서 살해당한 한 남자의 흔적으로, 주변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짓이겨져 있다. 진짜 이야기가 끝나는 곳은, 바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외의 체호프'로 불리던 미국의 소설가 존 치버는 단편 '저스티나의 죽음'(<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황보석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수록)에서 신경쇠약에 걸린 광고 카피라이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피라이터인 '나'는 모처럼 방문한 아내의 사촌 저스티나가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에 휘말린다. 장례 절차를 준비하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법령상 그들의 집이 위치한 구역에서는 "장의사를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는 아무것도 묻을 수가 없고 또 거기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개한 '나'는 행정가를 협박해 비밀리에 사촌의 장례를 치른다. 이 부당한 처사에 화를 주체할 수 없던 '나'는 근무하던 광고 회사의 제품과 광고 회사 전체와 자신의 조국에 대한 폭언이 담긴 '광고 카피'를 제출하고 회사를 뛰쳐나온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 고작 항상 하던 일(카피를 적는 것)을 그것도 충실히("그는 카피를 다시 써 오라는 상사의 지시에 계속해서 따랐을 뿐이다.") 하는 것뿐이었다는 안타까운 상황은 차치하고, 이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문장에 주목해 보자. "가공의 이야기는 예술이고 예술은 혼돈에 대한 승리이며, 우리는 더없이 주의 깊게 선택하는 훈련을 통해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쓴 치버는 곧장 "우리의 선택 능력이 잘못되어 우리가 다루는 비전이 허사가 되고 말 위험성"이 있다고 덧붙인다.
한편, 영국의 사진가 마이클 오머로드는 미국으로 건너와 한쪽 구석만 부서진 흰 울타리 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그가 직접 부쉈을 지도 모르는 이 울타리 사진은 치버의 <일기>(Journals)에 표지로 쓰인다. 깔끔하게 정돈된 풍경 속에서 부서진 몇 개의 패널은 소리 없는 불안과 긴장을 암시한다. "나무랄 데 없는 교외 지역의 일종의 참상"에 대한 치버의 세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일기>에서 치버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존 업다이크를 비꼬는 시도를 한다. "그가 감성의 비현실적인 단계를 개발해냈다. (…) 혹자는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어떻게 어두운 하늘이 별빛의 무게를 품을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나는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라고 쓴 것이다.
얼어붙은 연못은 그 자체로 위험할 것이다.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려면 우선 얼음이 깨지지 않을지 걱정해야 하고, 혹시라도 넘어졌을 경우 자신을 공격할 지도 모르는 스케이트의 날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설사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일이 일상이 되었더라도 세상은 아직 깜깜한 밤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수 센티미터 아래에 도사린 불안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별을 바라보고 그 빛에 놀라며, 별빛의 무게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까? 치버의 물음은 이것이었다. 과연 밤하늘이 별빛의 무게를 품을 수 있는지 따위가 궁금한가 하는 것.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힘든 것은 이 별빛이 어떤 "서정"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이란 때로 반드시 말해야 할 것 같다가도 반대로 절대 말하지 말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또 입도 뻥긋해서는 안 될 상황도 있다. 불안에 감싸인 미국의 교외는-아니, 대부분의 장소와 시간은-"서정" 따위 생각지도 않는 게 좋은 위기의 공간이다. 이 책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순간이었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을까? 다이어는 이 물음에 대해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겉보기와는 반대로 업다이크가 옳았고 치버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어두운 밤하늘이 어떻게 별빛의 무게를 품을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그 뒤에 적은 "별빛의 필연적 무게"라는 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데 마흔두 명이라는 사진가들의 숫자,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인생과 우주 그리고 세상 만물에 대한 해답'으로 숙고(Deep Thought)와 시리(Siri)가 공히 인정한 그 숫자가 아니었나.
약을 파는 것도, 답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드는 드문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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