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 북>(자일스 채프먼 책임 편집, 신동헌•류청희•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자동차의 역사>는 1995년에 등장한 페라리의 F50을 표지에 내세웠다. F50은 페라리의 수퍼카 계보를 잇는 존재이자 애스턴 마틴 DB5에 비해 희소성도 높지만(DB5의 생산대수는 F50의 세 배에 가깝다!) 자동차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상징성을 갖기엔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 결과 <자동차의 역사>의 표지는 제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차이가 바로 <카 북>의 노림수가 아닐까? <카 북>은 오래되었지만 낯설지 않은 대상을 표지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영리함을 동시에, 그리고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직한 구성이 갖는 힘
<카 북>은 총 10개의 장(최초의 자동차, 그리고 1920년대부터 2000년대 이후까지 10년 단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분야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서는 진부할 정도로 전형적인 구성이다. 각각의 장 역시 누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해당 시대의 주된 흐름과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자동차들에 대한 소개, 해당 시대를 상징하는 명차에 대한 상세한 설명, 동시대를 빛냈던 자동차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자동차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던 포드, 르노, 메르세데스 벤츠, 알파 로메오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자동차 회사들의 역사.
하지만 이러한 평이한 구성 속에 담긴 내용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카 북>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자동차뿐만 아니라 특정 자동차의 애호가만이 알 수 있는 특이한 파생 차량까지 소개하고 있다. 미니 쿠퍼를 개조한 브로드스피드 GT, 3년 동안 단 100대만이 생산된 고급 스포츠카인 고든 키블, 단 한 대만이 생산된 람보르기니 400GT 몬차와 파나르 750 스파이더와 같은 희귀한 자동차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개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자동차까지 다루는 여유는 바로 <카 북>의 편집자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 더 눈여겨볼 것은 각각의 자동차에 대한 두 문장을 넘지 않는 설명이다. <카 북>은 백과사전의 기능에 충실하게 '자세함'보다는 '키워드'의 제공에 무게를 두었다. 그리고 <카 북>이 제공하는 키워드는 말 그대로 핵심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포르쉐 550 쿠페에 대한 설명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포르쉐가 경주용으로 특별 제작한 첫 번째 자동차다."(146쪽)
550은 포르쉐가 자동차 경주를 위해 처음으로 만든 모델이지만, <카 북>에 소개된 550의 사진은 그 중에서도 1호 차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차량이다. 이처럼 <카 북>은 단 한 문장만으로도 완벽하게 대상 자동차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각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자동차들은 자세하게 소개된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지나칠 정도의 간결한 모습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상 차량을 엔진 속까지 낱낱이 파헤친다. 해당 차량의 중요 부분뿐만 아니라 손잡이와 전조등의 갓과 같은 사소한 부분도 연도별로 조금씩 변경된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이를 짚고 넘어간다. 보통은 그냥 넘어갈만한 작은 스위치나 레버의 기능까지도 언급한다. 이쯤 되면 과연 이것이 자동차에 대한 소개인지 사용자 설명서인지가 헷갈릴 정도다. 물론 자동차 애호가에게 이 정도는 행복한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인간에게 이로운 수많은 기술의 발전은 전쟁 덕분에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는 자동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 경주는 곧 자동차에게 전쟁을 의미하고, 자동차 기술의 의미 있는 발전은 대부분 자동차 경주를 통해서(또는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카 북>은 자동차의 역사에 있어서 자동차 경주가 갖는 중요한 위치를 간과하지 않는다. 각각의 시대마다 해당 시기에 이루어졌던 포뮬러 그랑프리, 내구 경주, 랠리, 스톡카 경주 등 다양한 분야의 자동차 경주 및 당대 최고 성능을 자랑했던 자동차들이 비중 있게 언급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단행본 중 이처럼 깊이 있게 자동차 경주의 역사를 다룬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카 북> 중 '알파 로메오 6C 1750' 해설 페이지. ⓒ사이언스북스 |
공정을 기하기 위한(?) 쓴 소리
<카 북>의 아쉬운 점을 굳이 언급하자면, 원 출판사 및 책임 편집자의 국적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국제 자동차에 대한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 정도의 깊이와 진지함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단 한 권으로 전 세계의 자동차를 다룰 것이 아니라 크게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이렇게 다섯 편의 책으로 발간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차의 역사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자료집이 되었을 것이다(물론 독자의 경제적 부담은 가중되겠지만).
그리고 일부 차량의 사진과 설명이 바뀌어 있는 점, 차량의 명칭, 인명 등에서 일부 오기(誤記)가 눈에 띄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물론 39쪽에 소개된 알파 로메오 P2에 대한 설명에 있는 오기는 번역자의 지나친 의욕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해당 차량의 운전자가 알베르토 아스카리로 기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안토니오 아스카리, 즉 알베르토 아스카리의 아버지가 해당 차량을 운전했다. 이는 원서의 오기라고는 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오히려 간결하지만 진지한 설명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해당 차량에 대한 상당한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은 번역자들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카 북> 총평
하드커버에 질 좋은 종이, 그리고 멋진 사진으로 가득한, 그러나 정작 내용은 없는 책을 일컬어 '커피 테이블 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카 북>은 '커피 테이블 북'의 외모를 가진 진정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카 북>은 독자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동차 역사의 더 깊은(그리고 더 즐거운!) 곳으로 파고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길잡이이자, 그러한 길로 가는 문을 여는데 필요한 열쇠 같은 존재이다.
독자들이 이러한 <카 북>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고 제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도 백과사전이나 에세이 유가 아닌 좀 더 전문적인 자동차 서적의 번역 및 저술이 더욱 활기를 띄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카 북>의 번역 출간은 작지만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카 북>과 함께, 또는 나중에 읽을 만한 다른 좋은 길잡이로 <안 타고는 못 배겨!!>(데라다 카츠야·데이브 시기하라 지음, 요시다 타쿠미 감수, 신동헌 한국판 감수, 서울문화사 펴냄)와 <세상을 바꾼 50가지 자동차>(디자인 뮤지엄 지음, 권규혁 옮김, 홍디자인 펴냄)를 추천하고 싶다. 클래식 자동차를 다룬 또 다른 책 <매혹의 클래식카>(세르주 벨뤼 지음, 김교신 옮김, 시공사 펴냄) 역시 무척이나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책의 주제에 대한 번역자의 관련 지식 부족으로 인하여 불행하게도 너무나 불친절한 결과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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