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서 수를 없애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숫자는 언제부터 생겼을까?'라는 질문은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음직한 물음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우리 선조들도 사용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생긴 숫자를 사용했을까? 그리고 다른 나라의 숫자는 또 어떻게 생겼고, 언제 만들어졌을까?
▲ <숫자의 문화사>(하랄트 하르만 지음, 전대호 옮김, 알마 펴냄). ⓒ알마 |
이 책에서 저자는 수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숫자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고 있고, 필자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각각의 숫자는 세계의 모든 문화에서 독특한 상징을 가지고 있고, 때론 비밀스럽고 위험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예로 1부터 13까지의 수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설명된 내용들이 전적으로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우리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석기 시대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2진법 체계에 이르기까지 숫자들의 탄생 비화와 변천사에 문화적 배경을 곁들여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너무 복잡하여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마야의 기수법도 그림과 함께 흥미롭게 잘 설명하고 있다. 마야에서는 수를 신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사실 숫자 역시 마야와 마찬가지로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에 글이나 수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성직자와 같이 아주 특별한 계급이었다. 그래서 상형문자는 점점 신성문자로 바뀌게 된다. 마야 문명도 예외는 아니어서 1부터 13까지 수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는 그들의 주요 신 13위까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14 이상의 수는 이들의 조합으로 나타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릿값 기수법 또는 위치 기수법이라고 하는 표현방법과 유사한 형태이다.
특히 숫자 '0'은 위치 기수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데, 지역과 민족에 따라 '0'을 사용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도 그림을 곁들여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보여준 숫자 '0'의 여러 가지 표현 가운데 필자는 마야 문명에서 사용했던 표현이 가장 흥미로웠다. 사실 필자도 마야 문명이 사용한 숫자 '0'의 기호를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만큼 정교하게 표현된 그림은 보질 못했다. 마야 문명과 함께 소개한 아즈텍 족이 사용했던 숫자들도 설명과 함께 그림이 제공되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마야의 아즈텍 숫자의 흥미로움도 좋았지만 필자가 가장 정독했던 부분은 바로 3장과 4장이다. 이 부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지배력이 강한 언어가 지배력이 약한 언어를 누르는 과정에서 지배력이 약한 언어의 숫자를 일컫는 단어인 수사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배력이 강한 언어였던 중국의 한자식 수사가 전통 수사를 억누르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고유의 수사가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수사인 하나, 둘, 셋, 넷… 열은 중국식 수사인 일, 이, 삼… 십과 함께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부터 아흔아홉까지 전통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한자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숫자도 당연히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비록 수를 적을 때는 한자를 사용했어도 수를 표현할 때는 한자와 더불어 고유 수사를 사용했다. 지배적인 언어로부터 자신들만의 고유 수사를 지켜낸 우리 민족의 독특하고 뛰어난 문화에 절로 자긍심이 생기는 대목이다.
저자는 수학자들이 수의 역사를 말할 때 문화사와 관련해 언급하지 않아서 그 내용에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서술이 너무 일화적이고 단편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문화학자들이 수를 다루는 경우 특정 지역과 시대 그리고 상징적 의미에만 관심을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는 숫자의 역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색다른 측면을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처음 의도한 것을 모두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아쉽게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첫째는 저자가 숫자의 탄생과 변천사를 수학과 문화로 설명하면서 수학적 소양을 좀 더 발휘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저자는 숫자에 관련된 내용을 전개하면서 '수'와 '숫자'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사실 '숫자'는 '수'를 표기하고 나타내는 방법이다. 따라서 숫자는 언어적, 문자적 사실이고 수와 숫자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과 세 개'를 볼 때, 사과가 세 개 있다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각 나라 또는 지역의 사람 각자가 글로 표현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의 문화, 언어, 시대 등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三'으로, 어떤 사람은 '3'으로, 또 어떤 사람은 ''로 표현할 것이다. 이들이 표현이 각자의 문화, 언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며 우리가 '숫자'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수의 '표기' 또 '기호'이다. 이것을 우리는 '기수법'이라고 한다.
한편 '사과 세 개'를 우리는 '세'개라고 하고, 영어로는 'three'라고 하며, 중국어로는 '산(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를 부르는 방법을 '명수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수법과 명수법은 경우에 따라서는 함께 또는 독립적으로 변해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기수법과 명수법을 구분하여 각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문화사적 설명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두 번째 아쉬움은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1부터 13까지 수들의 상징적 의미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1부터 13까지 수들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아쉽게도 기하학과 연결하여 설명하지 않고 있다. 수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고자 했던 많은 고대의 학자들은 개수를 세는 경우의 수의 의미뿐만 아니라, 공간 또는 평면에서 그 수가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모양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1과 2를 수로 인정하기보다는 태초의 어머니와 아버지쯤으로 여겼으며 그 두 수로부터 나온 3을 최초의 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설명을 더했다면 훨씬 흥미로운 전개가 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기하학적 의미로부터 수를 표현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아쉬움은 마야 문명이 사용한 숫자를 그림과 함께 설명한 부분이다. 이미 소개한 것과 같이 필자는 이 부분에 많은 흥미를 느꼈는데, 흥미가 아쉬움으로 변한 것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주어진 그림의 애매함 때문이다. 또 이 책에 제공된 그림의 대부분이 크기가 작기 때문에 그림을 이해하거나 또는 그림으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있다. 어느 경우는 그림이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고, 어느 경우는 그림과 내용 설명이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그려진 그림조차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필자가 제시한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지역과 언어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곁들여 숫자의 변천사를 일반인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일반 상식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고, 책의 분량도 적당하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숫자의 문화사적 의미를 설명하며 숫자가 탄생할 당시의 문화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좋다.
수학에서 숫자는 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수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가 모두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정보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지금도 인류는 단순한 숫자 하나를 통일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적, 언어적, 시대적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알아내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수학에서 숫자의 변화 과정이나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고된 작업이다.
오늘날 인류 문명의 발전은 새로운 문화의 창달로 이어지며 또 다른 양질의 문명과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 다른 분야 사이에 '융합'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수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숫자'를 수학에서 벗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찾는 것 또한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순수 자연과학인 수학, 그 중에서도 수학의 기본이 되는 숫자를 사회과학인 문화의 측면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즉, 이 책에서는 수학자가 모르는 숫자의 문화적 의미를 말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문화학자가 모르고 있던 숫자의 수학적 의미를 큰 틀에서 역사적 흐름을 따라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융합을 생각하며 실천해야 하는 지성인이라면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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