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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에 내려진 지령, 읽히려거든 보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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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에 내려진 지령, 읽히려거든 보이지 마라!

[프레시안 books] 헤라르트 윙어르의 <당신이 읽는 동안>

깨끗하고 따뜻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인상을 가진 백발의 네덜란드 할아버지가 당신 앞에 와서 앉았다. 날씬하고 곧은 체격에, 편안하면서도 적당히 격을 갖춘 화사한 수트를 말끔하게 입었다. 길게 뻗은 하얀 속눈썹과 입매무새의 표정이 새침하다. 이 책의 저자, 네덜란드의 글꼴 디자이너 헤라르트 윙어르 선생이다.

당신이 '읽는' 동안

▲ <당신이 읽는 동안>(헤라르트 윙어르 지음, 최문경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화창한 날,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펼쳐져 있다. 윙어르 씨는 강의실의 교탁 앞에 설 생각인 듯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글자를 지루하게 여기도록 만들, 효과가 제법 검증된 방법이라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대신, 그는 야외의 테이블에서 음료 한 잔을 놓고 당신과 마주앉았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40여년 가까이 글꼴 디자인을 해오며 독자들의 읽기 경험을 아늑하게 향상시키려 노력했던 고민의 여정들을.

하늘에는 구름이 펼쳐져 있다. 글라이더 조종사는 반드시 적운 형태의 구름을 '읽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한다. 적운은 조종사를 더 오래,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게 해줄 더운 공기가 어디로 올라가는지 알려준다. 그런데, 구름을 읽는 것도 '읽기'라 할 수 있나? 읽기는 실로 폭넓은 행동을 포괄하고, 다양한 심상을 환기시키며, 눈과 뇌에 다층적이고 복잡한 작용을 수행하도록 한다. 자, 여기까지 읽는 동안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상상했을 수도 있고, 읽는 행위의 범위를 문득 헤아렸을 수도 있다. 반면 글자의 형태를 인지하고 그 형태에 담긴 의도까지 읽어낸 독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글자의 기본 형태'(책 88쪽)와 '구름 문자 세트'(176쪽) ⓒ워크룸

긴 텍스트에 적용되는 글자의 형태는 독자의 읽기 과정과 어떤 상호작용을 가질까? 본문용 글꼴의 디자이너와 본문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이 늘 당면하는 질문이다. 이 책은 이런 질문을 다룬다. 그러나 이 책을 꼼꼼히 정독하고 난 후 책장을 덮고서 자문해보자. 당신이 읽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답하기 어렵다. 책이 정답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답을 내리기에는 헤아려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책이 주는 교훈이다.

독자에게 쾌적하고 효율적인 독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글꼴 디자이너들은 다음의 변수들을 일일이 헤아린다. 숨 가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영역들을 모조리 짚어보자. 역사 속 글꼴 디자이너들의 서로 상충하는 주장들과 공헌들, 각종 경험적 일반론들의 타당함과 부당함, 독서 행위가 일으키는 서정적인 마법, 보기와 읽기의 경계, 눈과 뇌가 글자를 인식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정교한 과학적 메커니즘, 개별 독자들의 취향과 수준 및 숙련도, 독서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요인들, 관습과 전통에의 밀착 정도,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 글자와 필기도구와 책의 인체 공학, 읽기라는 다면적 문화 행위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 각 글자시스템 본연의 형태가 가진 임의성과 필연성, 공간 배분과 리듬감 등 조형 원리들, 글자가 위치하는 각종 환경, 구술언어와 문자언어 및 타이포그래피 간의 긴장관계, 각종 텍스트의 종류 및 저자와 독자가 맺어지는 관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변수, 변수들…

당신이 읽는 '동안'

이렇게 열거된 키워드들을 그대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지루함에 몸부림치다 못해 글꼴 디자인의 영역으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윙어르 선생은 독자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책을 덮고 나서도 읽기가 과연 무엇인지 속 시원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당신이 무능한 독자인 것도 아니고 저자가 소임을 다 못한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사실 작년인 2012년 한 해만 해도 읽기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영어권 서적들이 쏟아졌다. 소피 베이어의 <글꼴 읽기(Reading Letters)>, 얀 미덴도르프의 <텍스트 모양 만들기(Shaping Text)>, 사이러스 하이스미스의 <단락 안 들여다보기─타이포그래피의 기본요소들(Inside Paragraphs: Typographic Fundamentals)> 등 탁월한 저술만도 몇 편이 꼽힌다. 글꼴은 어떻게 작용하며, 우리가 어떻게 읽는지는, 여전히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는 질문인 것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본문용 글꼴 디자이너는 퍽 다른 재능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 재능들은 서로 충돌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글꼴 디자이너에게는 육안으로 감별되지 않는 차원을 다루는 아이러니, 읽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사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 광학, 심리학, 인지과학, 인체공학으로 향한다.

어쨌건 당신은 윙어르 씨와 아늑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을 즐기며 때로는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무언가 만족한 느낌을 받지 않았는가? 바로 이것이 이 저서의 두 가지 미덕 중 하나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어야 마땅할 것 같은 키워드들을 흡입력 있게도 풀어나간다. 네덜란드라는 낯설지만 성숙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와 이야기들, 글꼴들이 품은 천태만상의 사연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한국의 글꼴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일상은 교과서와 강의도 필요로 하지만, 이런 종류의 대화와 담론들에도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와 글꼴 디자인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한국에 소개되는 네덜란드 글꼴 디자이너의 저술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에 번역된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영미권 저자들의 저술이었고, 그중 간간이 독일어권 저자들의 저술이 있었다. 같은 라틴 알파벳 문자권이라도 미국과 영국,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글꼴에 대한 취향과 문화적 배경, 인식이 각각 상당히 다르다.

더치 디자인(Dutch Design)이라 하여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은 활발하게 소개된 바 있지만, 몇 해 전 네덜란드 글꼴 디자이너인 마르틴 마요르가 한국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네덜란드의 글꼴 디자인은 국내에 별달리 소개된 바가 없다.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네덜란드 본문용 글꼴 디자인은 분야의 특성상 역사주의와 전통주의에 기반한다.

네덜란드에 탁월한 글꼴 디자이너가 많은 이유는 이 나라에 역사주의적 정격연주계를 이끄는 탁월한 고음악 학자 및 연주자가 많은 이유와 오히려 일맥상통한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이르러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 풍부한 역사의 유산을 속속들이 연구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동시대에도 그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도록 숨결을 불어넣는 예술적 작업들은 이들의 본령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인의 실용적 완벽주의의 정서 속에서, 그들은 관습을 소중히 여기며 이들을 현대화한다.

▲ 저자 헤라르트 윙어르의 가장 성공적인 글꼴인 스위프트(Swift). 신문의 본문에 작은 크기로 적용되어도 잘 읽히도록 견고하게 제작되었다. ⓒ워크룸

당신이 책을 넘기고 만지고 느끼는 동안

▲ <당신이 읽는 동안> 영역본(앞)의 살짝 열린 표지 사이로 보라색 면지가 보인다. ⓒ유지원
나는 사실 네덜란드어 원문인 이 책의 영역본을 몇 년 전에 소장하고 읽으면서 책에 익숙해져 있었다. 늘 말쑥하게 차려입은 헤라르트 윙어르 선생을 연상시키는, 짐짓 격을 갖춘 두툼한 양장제본과 새하얀 종이. 비교적 큼지막한 본문 글자와 명랑한 진분홍의 간지면. 무엇보다도 양장의 표지를 펼치면 보라색 면지의 하늘에 구름의 부호들이 영역본의 책에는 가득 펼쳐져 있다.

"내게는, 19세기 초 영국의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가 개발한 일련의 구름 문자들이 든든하게 갖춰져 있다. 그는 구름을 분류하고 권운이나 적운 같은 이름을 붙인 사람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만든 이 기호들은 글자의 기본 형태를 구축하는 근본 요소들과 놀랄 만큼 닮았다. 구름은 칼새(저자의 대표 글꼴 스위프트는 칼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들에게 배경을 제공한다. 나는 그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구름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이 구름 부호는 영역본에서 그가 만든 또 다른 글꼴인 걸리버(Gulliver)로 디자인된 본문을 앞뒤로 배경처럼 감싸고 있다.

반양장본으로 다소 간소하게 제작된 한국어본에는 저자의 품성을 연상시키는 이런 유머러스한 장치들이 생략되어 있다. 원서에 비하면 다소 딱딱해서 에세이라기보다는 논픽션이나 학술서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어본만 독립적으로 보면 디자인의 자체 완결성이 뛰어나고 많은 고심의 흔적들이 보인다. 디자이너인 워크룸의 강경탁 씨에게 넌지시 의견을 청해보았다. "저는 저자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잖아요. 그런 척 흉내를 낼 수는 없었어요." 능청을 모르는 성실한 디자이너의 디자인적 근거, 일리 있는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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