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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반란, 증오를 거두라고? 죽도록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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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반란, 증오를 거두라고? 죽도록 싸워야 한다!

[프레시안 books] 강준만의 <갑과 을의 나라>

게임 스타크래프트와 관련한 재미있는 우스개가 있다. 서구의 어느 게임 웹진에서 이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여기서 1위를 한 종족이 테란, 프로토스, 저그가 아닌 '한국인'이라는 게 이 우스개의 결말이다. 거의 모든 게임에서 한국 사람들은 발군의 실력을 자랑해 세계인을 괴롭히는 것으로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대단한 일이다.

남양유업 사태 등으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관계'에 대해 고찰한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의 <갑과 을의 나라>(인물과사상사 펴냄)를 읽다 보면 이 우스개가 절로 떠오른다. 게임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게임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꼼수'를 창조적으로 발견해낼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여기에 위의 우스개를 연결해보면 특히 한국 사회에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회적 조건이 있을 것이라는 직관적인 통찰을 얻게 된다. <갑과 을의 나라>는 이런 조건들에 대한 다양한 사례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 <갑과 을의 나라>(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첫 번째 부분은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진 '관존민비'의 전통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은 인맥을 바탕으로 활약하는 '브로커'들에 대한 탐구이다. 세 번째 부분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선물'에 대한 고찰이며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체제에 저항해 온 사람들의 '시위'에 대한 이야기다.

즉, 강준만에게 있어서 '갑을관계'로 인한 문제는 민간보다 정부가 우월한 지위를 가졌던 시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위력을 떨치던 시절 정부의 부당한 지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던 민간기업의 처지와 공직 사회에 만연했던 온갖 부조리가 오늘날의 '갑'이라 불리는 것들의 기원이라는 인식이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예는 대통령에게 회장이 밉보여 그룹이 해체됐다는 식의 후일담이다. 1980년대에 21개 회사를 거느리며 재계 서열 7위를 자랑하던 국제그룹은 1985년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이 '국제그룹 정상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해체되는데, 공식적으로는 무리한 기업 확장 등이 원인이 됐다는 발표가 나왔으나 총수인 양정모 회장이 대통령에게 밉보인 것이 원인이 됐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온갖 수법이 판을 친다.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는 '아첨지'에 관한 것이다. 아첨지는 공무원들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든 종이라는 것으로 서류의 좌측 상단 코너에 붙이는 작은 종잇조각를 말한다. 이것의 존재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회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강만수 전 장관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삼성경제연구소 펴냄)에서 자신이 관세청장으로 일하던 시기를 회상하며 출근 첫 날 이것의 사용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밝혔다. 강만수 전 장관에 따르면 이 종잇조각의 존재는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페이지를 넘기는 데 방해가 되며 문서를 철할 경우 좌측 상단만 부풀어 오르는 결과를 불러오는 등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임에도 오로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없애야 할 관습이었다.

즉, 관가의 사정으로 볼 수 있는 갑의 횡포는 공식적인 체계 외의 방식을 사용해 하부 조직이나 민간을 통제하려고 하는 정부의 태도가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최대한 나라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풍토를 만들어 낸 데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듯 갑의 횡포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꼼수가 더해질 때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강력해진다. 브로커와 선물의 존재는 이것을 강화시킨 일등공신이다. 브로커는 인맥과 사교기술을 동원해 공식적인 체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차라리 뇌물에 가까운 선물은 그러한 과정의 유력한 수단이다. 관가를 중심으로 선물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지자 이제 누구나 이를 통해 브로커를 자처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렇게 꼼수를 바탕으로 한 갑을관계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생활양식으로 굳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갑에 대항하는 을의 반란은 일종의 시대정신이다. 강준만 교수는 여기에 하나의 조건을 더 붙인다. 갑을관계를 둘러싼 거대한 부조리는 결국 상대를 짓밟고 내가 출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을의 반란이 '증오의 종언'을 향해 나아가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상황의 분석에만 매몰되지 않고 무언가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강준만의 통찰에는 무언가 중요한 고리가 하나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갑을관계를 둘러싼 논란이 결국 우리 사회가 '노동'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라면상무', 남양유업 사태 등으로 논란이 된 갑의 횡포에는 그간 꾸준히 노동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온 노동자들의 서글픈 처지가 반영돼있다.

학습지 교사, 화물 노동자, 보험 설계사, 화장품 외판원처럼 실제 하는 일은 노동자에 준하지만 법적으로 개인 사업자화 되어 있는 사람들을 '특수고용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들의 대부분은 이전에는 노동자로서 법의 보호를 받는 신분이었지만 제도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노동 3권 등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된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1990년대 전후 신자유주의적 개혁 조치가 일반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노동 유연성'이 강요된 결과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자본은 더 쉽게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됐고 팔 것이 노동력밖에 없는 불행한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이름표마저 빼앗기게 되어버렸다.

택배 기사 역시 '노동자'란 이름마저 빼앗긴 '특수고용 노동자'다. 사진은 지난 5월 8일 경기도 안산 호수공원에서 CJ대한통운 택배 노동자 600여 명이 벌인 집회의 모습. ⓒ프레시안(최하얀)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고용관계가 독립된 개인과 개인의 갑을관계로 둔갑돼 일반화 된 것은 이런 맥락 덕분이다. 강준만 교수가 제기하는 갑을관계의 시초를 민간에 군림하는 국가에서 찾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에 이 문제는 갑을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정경유착'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다뤄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민간을 길들이고 그 대가로 특혜를 제공하는 부당한 세태가 국가 경제를 망쳤다는 주장이다. 1998년 15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준만 교수는 '갑을관계'라는 말이 2004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정부가 민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는 문제의식이 담긴 '정경유착' 프레임이 어떤 과정을 통해 '갑을관계'라는 표현으로 변모하게 됐느냐는 것일 게다.

소위 재계는 1990년대를 지나는 시기 동안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직접 출마한 것은 재계가 정부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야말로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신자유주의적 국가 운영 원리의 이식을 요구하면서 정부의 권한이 사실상 축소되자 기업은 드디어 '갑'이 되었다. 기업들은 보다 많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노동자들을 좀 더 쉽게 해고하고 좀 더 편리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국가에 요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됐고 법망을 피하기 위한 불법 파견, 위장도급 등의 편법적 조치들이 횡행하게 됐다.

여기에서조차 밀려난 노동자들은 자영업자라는 신분과 불안정 노동자라는 신분을 오가며 갑을관계의 맨 끝에 있는 불행한 존재로 전락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편의점주와 이번에 논란의 당사자가 된 남양유업 대리점주도 이런 신세에 처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로그래밍을 배워도 결국 치킨집을 운영하게 된다"는 컴퓨터 공학 전공자들의 자조도 이러한 세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30여개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4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자영업자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있지만 베이비붐 세대들이 2008년 이후 은퇴를 하면서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해버린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자영업자 중 50대가 30.5퍼센트, 60대가 24.0퍼센트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지난해의 통계는 '노동 유연화'에 취약한 계층부터 노동 시장에서 탈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업의 구렁텅이에 빠진 청년층과 자영업으로 밀려나야 하는 노년층, 그리고 '을'의 입장에서 쥐어 짜이는 3, 40대가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부대끼는 장면은 우리 시대 '노동'의 지위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강준만은 약자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얻는 현상을 일컫는 '언더도그마(underdogma)'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을의 반란'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도를 요구한다. 물론 강준만은 현재 갑을관계를 둘러싼 문제들은 언더도그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수준이 돼버렸다는 데에는 인식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갑의 횡포가 갑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며 '증오의 종언'을 통해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는 체제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위에 언급한 노동자들의 처지를 중심에 놓고 보면 강준만의 이러한 주장은 다소 단순하고 낭만적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갑의 횡포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갑의 양보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을'들이 자신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기준으로 단결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들이 단결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해 갑이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식자들은 흔히 북유럽 국가 등 마치 증오가 종언돼 자본과 노동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는 선진국을 우리 사회가 가야 할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처지에 이르게 된 과정은 자본과 노동이 서로 맞고 때리는 '증오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는 것 역시 잊으면 안 된다. 보수 언론과 우파 정치 세력이 증오의 화신들로 묘사하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2008년 기준 10.3퍼센트이며 단체협약 적용률은 10퍼센트 정도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지만 최근 정치인들에 의해 대안적 체제로 많이 거론되는 독일의 경우 2008년 기준 노조 조직률은 19.1퍼센트, 단체협약 적용률은 7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느냐와 그들의 힘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존중받고 있느냐를 알 수 있는 지표이다. 비록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피가 라인강에 뿌려졌을 지 한 번 상상해보라.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파시즘의 공포, 마가렛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앞에 두고 유럽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또 이것을 이기기 위해 얼마나 격렬하게 싸워야만 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이켜봐야 한다. 상생은 이런 투쟁의 끝에서야 찾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을 앞에 두고도 증오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사실 한가한 이야기다. 갑의 횡포를 끝내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오의 종언이 아니라 피지배계층의 기득권을 향한 더 큰 증오와 이것을 조직하는 정치적 힘이다. 과유불급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말해야 한다는 얘기다.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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