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연예인의 '우월한 유전자'를 부러워하지 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연예인의 '우월한 유전자'를 부러워하지 마!

[프레시안 books] 이블린 폭스 켈러의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

본성인가 양육인가? 타고나는 것이냐 길러지는 것이냐? 유전이냐 환경이냐? 우리는 일상에서 심심찮게 이런 논쟁을 벌이곤 한다. 박태환이나 김연아와 같은 유명 스포츠 선수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에도 타고난 바탕, 가족이나 지도자의 헌신적인 뒷받침, 그리고 뼈를 깎는 훈련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지 저울질을 하곤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확실한 결론은 없다.

▲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정세권 옮김, 이음 펴냄). ⓒ이음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정세권 옮김, 이음 펴냄)는 제목에서 이미 시사하고 있듯, 본성이냐 양육이냐는 식의 논쟁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따위의 일은 전혀 관심 밖이다. 혹시 최근 유전학을 비롯한 생물과학의 발전으로 드디어 해묵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이 종식되었고, 이 책이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인 과학사회학자 이블린 폭스 켈러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섣부른 기대를 품지는 않을 것이다. 팔순에 가까운 필자는 우리나라에서도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이한음 옮김, 지호 펴냄), <생명의 느낌>(김재희 옮김, 양문 펴냄) 등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으며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과 사회, 여성 등 포괄적인 주제에 걸쳐서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굽어볼 수 있는 날카로운 문제제기로 정평이 나있다.

이블린 폭스 켈러가 이 짧은 책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에서 제기하려는 물음은 한마디로 왜 우리가 양육과 본성이라는 실제로는 구분할 수 없는 쟁점에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 왔는가이다. 어떻게 이런 신기루가 우리의 사고 속에 그토록 깊게 뿌리박혔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는가? 이 책은 먼저 양육과 본성이 실제로는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이야기한다. 가령 멀리서 들려오는 드럼소리는 연주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그의 악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한 사람은 회반죽을 하고, 다른 사람은 벽돌을 쌓았다면 두 사람 중 누가 완성된 벽에 더 크게 기여했는가?

그녀는 이런 신기루, 즉 허수아비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를 본성과 양육이라는 어법이 탄생하고 굳어지는 과정의 탐색을 통해 밝히려고 시도한다. 이 탐색 과정은 단순하지 않으며, 읽는 이들이 따라잡기도 녹록지 않다. 먼저 저자는 왜 본성과 양육이 분리된 무엇이라고 가정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흔히 본성-양육 논쟁의 시발점이라 꼽히는 프랜시스 골턴에서 시작해서 이 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을 분석한다. 저자는 우생학과의 연관성을 무척 조심스럽게 논하고 있지만, 유럽에서 양육과 본성을 구분하려는 어법이 유전자라는 개념이 구체화되기 이전에 이미 만연해 있었으며 거기에는 '유전적 개량'에 대한 갈망'(그것이 사회 발전에 대한 꿈이든, 인종이나 남녀 차별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든)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이한음 옮김, 지호 펴냄). ⓒ지호
물론 저자는 단순화된 설명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정치적 이해관계, 특히 사회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의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춰왔고, 그것은 이 퍼즐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이 책에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기본적 직관과 추론을 만드는 언어적 행위에 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이며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배경을 다루는" 것이 계획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성과 양육을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한 정치적 및 사회적 분석보다 조금 더 세밀한 탐색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길들인다. 가령 '유전가능하다'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문가들도 헛갈린다. 그것은 전문적 의미와 일상적 의미 사이의 혼란, 개인과 집단의 혼동 때문이다. 흔히 학자들도 유전가능한 형질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져서 표현하지만 "유전가능하다는 것은 개인이나 개인적 혈통의 특성이 아니라 집단 또는 적어도 개인이 한 쌍 이상 모였을 경우의 특성"이다.

사실 유전자라는 말과 그 어법이 양육과 본성이라는 있지도 않은 구분을 둘러싼 논쟁을 야기한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자는 그 실체가 확인되기 오래전부터 유비와 상상의 산물로 존재해왔다. 아직도 유전자에 모든 분자들 중 가장 중요한 마스터 분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지만,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과거와 달리 유전자나 DNA에 인과적 힘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발생과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인정하지만, DNA 단독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개념이 너무 낡아서 생산적인 전성기를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유전자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DNA는 형질을 만들지 않으며 발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암호화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DNA를 세포가 생식과 증식을 위해 활용하는 고정 밑천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연예인을 가리키면서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기자들이 무심코 쓰는 기사 내용,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어법 속에서 유전자는 매우 중요한 맥락을 획득한다. 그것은 유전자가 분리 가능한 실체이고, 그 실체가 양육과 분리 가능한 본성의 토대를 이룬다는 생각으로 자동 번역될 수 있는 터전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유전자의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되기 힘들다. 분자생물학자 리 실버는 "유전의 단위라는 멘델식 유전자 개념은 허구"라고 못 박는다.

▲ ,생명의 느낌>(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김재희 옮김, 양문 펴냄). ⓒ양문
전통적인 유전자 개념이 생물학 연구에서 차지했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은 유전을 개념화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저자가 언급하듯 DNA 염기서열 복제로 작동하지 않는 유전체계, 즉 후생유전이나 비유전자 유전 등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유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차원을 열어주었고, 우리가 흔히 단백질의 암호화 염기서열로 환원시키고 있는 유전자가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과학, 특히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모호함과 혼동을 말끔히 해결해줄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논쟁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최근 정크(쓰레기) DNA에 대한 새로운 이해처럼 DNA와 유전자, 유전가능성 등의 개념을 재개념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발생생물학뿐 아니라 신경과학, 생리학, 생태학 등에 대한 투자가 새로운 생산적인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피력한다. 그러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유전자 중심의 분자적 접근방식은 기존의 분리 가능한 미립자적 유전자, 또는 분리 가능한 유전력이라는 어법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유전자를 중심으로 생명을 해석하려는 강력한 정치경제학이 버티고 있다. 유전자를 둘러싼 어법과 그 정치경제학은 본성과 양육만큼이나 분리 불가능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