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그대로 전국 경제인들의 결집체인 전경련은 때로는 자신들의 경제 문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경제란 어떤 형태로든 정치, 사회적 흐름과 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제 외적인 일에 전경련이 나서야 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다른 경제 단체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전경련은 특히 한국 민간 경제계의 구심점이라는 그 비중과 위상 때문에 경제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도 자주 떠 맡아야 했다. 특히 안보, 국제 관계 등 경제 문제와 연계되는 사안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고 국내외에 지인들이 많은 정주영 회장 재임시기에는 이러한 일들이 더욱 많았다.
1978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 안보의 상호연관'에 관한 세미나는 이런 전경련의 위상과 입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한편의 대북한 냉전공작 드라마와도 같았다.
70년대 당시 한국은 유신과 3선개헌, 끊이지 않는 노동쟁의와 대정부 투쟁 등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긴급조치 발동으로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은 물론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아 경제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경제의 발목을 잡은 요인은 국내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1977년, 현직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공화당의 포드를 물리친 카터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한미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 주된 요인의 하나는 '인권외교'를 주창한 카터 대통령과 장기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 대통령의 충돌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취임 이전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카터 대통령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주한미군철수'였다.
미국이나 카터의 입장이 어떤 것이건 간에, 한국 정부와 한국 경제계에 있어 주한미군 철수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 수 없었다. 1970년대 당시 우리의 군사력은 병력과 전투장비 모든 면에서 북한에 뒤지고 있었다. 주한미군을 빼고는 군사력의 균형을 도저히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후 밝혀진 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핵 보유를 국가적 과제로 선정했을 만큼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절박했다.
발등의 불 주한미군 철수문제
전경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주한미군 철수는 정치,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장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가졌다. 안보가 문제가 있어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나라에 물건을 주문하거나 돈을 투자하겠다는 얼빠진 외국인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 무엇보다 해외 자본 유치에 몰두해야 했던 전경련으로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전경련의 최대 관심사 역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있었다.
전경련은 77년, 78년 이태에 걸쳐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에 관한 수많은 국제세미나를 조직했다. 한·미·일의 영향력 있는 학자, 정치가, 언론인, 정부 인사 등이 패널로, 청중으로, 연사로 대거 참가했다. 물론 그 주된 주제는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의 안정이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세미나 주제의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에서의 미 지상군 철수가 한국의 정세에 미치는 영향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 한반도의 군사적 균형(로버트 팔츠그라프)
·카터 정부의 극동정책과 동북아의 안정(남캘리포니아대 리처드 워커 교수)
·카터 행정부의 한반도 중심 대외정책은 타당한가(버클리대 차머스 존스 교수)
·베트남 전쟁 이후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균형(존 콜린스)
·미국과 한국의 군사안보 문제의 장래(뉴스위크 도쿄지국장 버나드 크리셔)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뒷바침하고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국제적 규모의 대규모 세미나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전경련은 이들 세미나를 조직하는 한편 전 조직을 가동,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유럽, 아시아 각국에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쳤고 각종 자료를 준비하여 각국 학계, 언론 및 도서관에 배포하는 등 홍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 어느 날, 두 차례의 국제 세미나를 마친 직후 안기부 5국의 김국장이 전경련을 찾아왔다. 78년 7월의 일이었다.
"전경련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부탁이라니, 뭡니까?"
"아시다시피 지금 주한미군 철수를 미국이 강행하려 하고 세계 학계와 여론도 동조 기미를 보이고 있는 터에 북한에서는 기회에 미군을 한반도에서 내보내기 위한 여론 조성으로 쐐기를 박을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일이 좀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서요."
찾아온 안기부 5국장
북한의 주장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판에 안기부 국장이 굳이 전경련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입에서 곧 그 해답이 흘러나왔다.
"북한 애들이 우리 흉내를 내려고 그러는지 이번에 대규모 국제 세미나를 개최한답니다. 그것도 북한 내에서가 아니라 도쿄 한복판에서 좌경의 일본 총평과 함께 북에 동조하는 미국, 유럽, 일본 학자들을 대대적으로 모아서 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국장의 이야기는 북한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그들의 입장과 대응되는 논리로 보다 큰 규모의 세미나를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김빼기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의 도쿄 세미나가 11월 하순 예정으로 코앞에 닥친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4개월 뒤였다.
국내 세미나라면 사람들을 섭외하고 홍보하고 자료를 준비하고 하는데 4개월이란 기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 세미나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만고만한 연사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거물급이라면 대체로 1년 스케줄 정도는 잡혀 있게 마련이고, 장소 섭외, 자료 준비, 홍보까지 생각한다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기간이었다. 말하자면 안기부에서 워낙 늦게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우리가 난색을 표하자 그는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각하께서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 노발대발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실 여기 오기 전에 국책연구소 등 여러 군데를 다녀봤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더군요.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전경련을 추천합디다.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전경련밖에 더 있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안기부의 힘이 닿는 한 어떤 일이라도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이러한 안기부의 요청을 배경 설명과 함께 정회장에게 보고했다.
“우리가 할 일이오"
"이봐요 그거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오. 나라꼴이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게 더 중요한 일이오."
즉각적인 사업 승인이 왔다. 우리는 총력을 다해 세미나를 준비했다. 3개월 안에 세미나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급한 일이 인물 섭외. 우리는 팀을 나눠 다각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미나 직전에 다가가서야 당시 미군 철수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던 주한 미8군사령관 베시 대장과 훗날 미국무성 부차관보가 된 게스턴 시거, 찰머스 존스 교수 등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섭외할 수 있었다. 또 국내에서는 정주영 회장을 포함한 전경련 회장단, 이홍구·이영호·구영록·김학준 서울대 교수, 연세대학교의 김달중 교수, 언론계의 양호민, 문단의 모윤숙 등이 참석했다.
정회장은 그후 업무 추진 과정에서 매번 직접 보고를 받으며 여러가지 지시를 했다.
하지만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서둘러 하는 일에 탈이 없을 수 없었다. 약속했던 연사가 불참을 통보해와서 부랴부랴 대체시키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고, 장소 문제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았다. 특히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그때 그때 준비되는 자료를 시간에 맞춰 일본에 보내는 일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통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팩스마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자료들을 한국에서 인쇄, 일본으로 공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더욱이 몇 번이나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 시간이 흐르는 바람에 인쇄가 늦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때만큼 안기부의 위력을 실감한 때도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를 위해 안기부의 김국장은 약속대로 비행기를 연발시켜 붙잡아두는 엄청난 일을 해주었던 것이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 제국호텔에 묵고 있는 우리와 국내외 연사들에게 혹시 닥칠지도 모를 테러를 대비해 수십 명의 안기부 직원을 동원, 주변을 경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세미나 국내 참가 인사 중에는 당시 유신체제에 밉게 보여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여권 발급마저 안되고 있는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철군반대론을 강력히 개진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일방적인 논리를 펴는 인사들로만 구성하면 균형이 보기 좋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이러한 사람들을 참석시키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여권 발급은 주민등록증 복사본만 가지고 두세시간에 끝내는 안기부의 지원을 받아서 가능했다.
정주영 회장은 약 이틀 넘게 계속되는 세미나 전과정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화장실도 뛰어서 갔다오는 열정을 보였다.
세미나는 성공이었다. 일본의 산케이 신문 등은 세미나 이전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고, 미국의 타임스, 뉴스위크 등등 외국 언론들도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물론 북한의 세미나는 이미 김이 다 빠져버린 상태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후일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이날의 세미나 덕분에 북쪽의 많은 담당자들이 처벌당했다고 한다. 당시의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씁쓸하고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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