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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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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5>

정회장의 사고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보통 남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가 하면 흔히 지나치기 쉬운 대상에서 커다란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일단 결정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 실현을 위해 몸을 내던진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폐선 물막이 간척사업, 조선 시설도 되기 전에 선박 수주… 이러한 사업의 바탕에는 범인의 경지를 넘어서는 정회장만의 번뜩이는 발상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아이디어는 때때로 경제를 넘어 정치·외교에까지 이어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출마도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감으로써 남북통일의 한 상징적 이벤트를 연출했던 것도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79년, 인도에서도 역시 그만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빛나는 아이디어를 십분 느낄 수 있다.
1974년 영국과 정기적인 경제협력회의를 갖기 시작한 이후, 영국 이외의 나라들에 대한 경제협력회의도 한층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1977년 6월에 창립된 한·인도 경제협의회. 그 방식은 영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년마다 상호 방문하여 산업시설을 둘러보고 각종 협력 현안들에 대한 협의를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1979년은 바로 한국이 인도를 방문하기로 한 해였다.

인도 역시 나이지리아와 같은 비동맹국. 더욱이 인도는 비동맹국 모임을 주도했던 네루 수상의 후광으로 비동맹국의 수장을 맡고 있는 터였다. 다행이라면 나이지리아와 달리 1973년에 이미 우리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 동시 수교국이었다는 것 정도.

당시 국제사회에서 비동맹국가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는 보잘 것 없는 국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1974년에 이미 핵실험을 성공리에 마친 인도를 비롯, 이집트, 나이지리아 등 1백개 국이 넘어섬으로써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특히 1국 1표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유엔에서는 이들 표의 향방이 곧 유엔의 정책 방향을 결정지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1979년 6월. 경제사절단 일행은 인도의 수도 델리를 향해 떠났다.
연례 행사로 기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인도측 준비는 상당히 치밀한 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치러진 환영 리셉션을 시작으로 인도의 산업시설을 둘러보고 곧 인도 재계 인사들과의 협의회가 시작되었다. 회의 자체는 싱겁다 할 만큼 별 어려움 없이 끝났다. 양국 모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던 덕분이다.

***"고견을 듣고 싶소"**

그리고 수상을 만나 예방인사를 한 후 다음 일정에 따라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대통령 관저를 향했다. 인도의 정치 체제는 프랑스와 비슷해서 수상이 국정을 책임지는 한편 대통령이 외교권 등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된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 대통령 예방 인사차 들른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곳은 영빈관이 아니라 회의실이었다. 이미 예정되었던 회의를 모두 마친 뒤라 따로 할 얘기가 남은 것도 아니었고, 일정상 회의가 잡혀 있지도 않은데 회의실로 안내를 하다니….

그러나 굳이 마다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곳은 인도였고 우리는 손님이 아닌가. 주인이 일정을 변경했다면 따를 수밖에. 그리고 안내인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예상과 달리 아주 커다란 회의실에는 뜻밖에도 인도 대통령과 경제 관련 각료들이 빠짐없이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저 끝쪽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인사를 건네왔다.
"비서진이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정회장님을 따로 뵙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혹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명을 듣고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예정된 회의는 모두 끝났지만 한국 경제계의 신화적인 인물 정주영 회장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회의가 무사히 끝났다는 보고는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좋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정회장님을 다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례적인 협의 말고 한국과 인도 사이에 진행할 만한 프로젝트가 없을까요? 지금 인도 경제는 아주 어렵습니다. 이 위기를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회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고 예고도 없이 만들어진 자리였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인도 경제의 앞날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 각료들이 몽땅 나와 있는 자리가 아닌가. 말 한마디라도 허투루 던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먼저 정회장의 표정부터 살폈다.

정회장은 역시 정회장다웠다.
잠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던 정회장은 망설이지 않고 회의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대형 인도 지도 앞으로 걸어가더니 발을 멈추었다.

***"좋은 프로젝트 있소"**

그리고 펜을 들어 인도의 남쪽 끝, 인도양을 향해 비죽이 솟아나와 있는 지점에 동그라미를 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내는 곧 카랑카랑하고 톤이 높은 정회장 특유의 목소리와 통역을 하는 내 목소리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좋은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좋은 프로젝트라니, 무슨 말인가?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잠시 긴장했다. 한국에서 올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좋은 프로젝트'란 완전히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곧 풀렸다. 즉석에서 생각해낸 그의 반짝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참석했던 인도 각료들 중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는 못했으리라.

"바로 여기에 수리조선소를 세우는 겁니다. 비행기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수많은 이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화물들은 어쩔 수 없이 배로 실어 날라야 합니다. 그 배들이 다 어디를 지납니까? 바다죠? 그리고 인도대륙 앞에는 이렇게 인도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중동을 가려면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배란 물건은 단번에 목적지까지 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가다가 쉬기도 하고 사람도 보충하고 물건도 싣고 고장난 데를 고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장난 배를 고쳐주는 수리조선소를 바로 여기다 세우자는 겁니다."

배를 고치는 데 드는 기간은 짧아야 며칠이고 길면 몇 달이 갈 수도 있다. 따라서 수리조선소를 세운다면 배를 고치는 비용을 얻는 것은 물론 선원들이 내려서 쓰고 가는 돈도 수월찮을 것이 자명한 일. 아시아와 중동의 길목을 잇는 인도가 바로 그 적지라는 것이 정회장의 이야기였다.

좌중에는 잠시 탄성이 흘렀다. 그러나 탄성이 가라앉자 대통령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단히 훌륭한 구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수리조선소를 지을 만한 자본이 없어요. 설사 조선소를 지었다 하더라도 기술을 가진 인력도 없고…."

말하자면 그림의 떡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회장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본이든 기술이든 우리가 대겠습니다. 우리의 조선 기술은 이미 세계적 수준입니다. 그 노하우까지 몽땅 전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인도에서는 땅과 노동력을 제공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기능공양성소도 세우겠습니다. 인도의 그 풍부한 노동력과 우리의 기술, 자본이 결합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회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박수갈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곳에 그를 수행하고 다녔지만 정말 놀라운 발상과 감각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교가 별건가"**

인도 방문을 마치고 온 그 다음달부터 정회장의 아이디어는 곧 실천에 옮겨졌다. 현대 관계자들의 현지 답사가 수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회장의 즉석 아이디어는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불안하기 그지 없는 인도의 내정과 인도의 수용능력 부족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이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의 집권당은 1977년 총선을 통해 네루 수상의 딸 인디라 간디를 물리쳤던 자나타당. 그러나 우리의 방문이 있었던 그해 자나타탕의 데자이는 붕괴하고 싱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싱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정권은 다시 인디라 간디 여사에게 이양되었다. 인디라 간디 여사는 1984년 자신의 보디가드였던 광신도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주영 회장의 빛나는 아이디어는 안타깝게도 그냥 아이디어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정회장은 인도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때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참 좋은 기회였는데 말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지만 나는 이 방문을 통해 정주영 회장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고방식만큼 독특한 외교철학이다.

정회장이 인도를 방문한 이유는 경제적인 면 말고 외교적인 면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인도는 물론 나이지리아에서도 소위 말하는 정치적인 발언은 일체 삼간 채 경제적인 문제에만 집중했다. 정회장의 그런 처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박군, 재미있지 않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 사람들 말이야."
"인도인들 말씀입니까?"
"그래, 인도인들. 수리조선소 건설 건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한국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겠나?"
"물론 안 그러겠죠."
"그게 재미있다는 거야. 외교라는 게 별 거 아니거든. 경제교류만 잘하면 외교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어. 저 사람들이 바로 그 증거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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