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언젠가 소설 쓰는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내년엔 추리소설 한편 쓸까봐” 물론 이 문장 중 ‘근사한’이라는 형용사는 머릿속으로만 그렸을 따름이다. 후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음, 그거 재미있겠는 걸.” 그랬다. 딱히 무슨 작정을 하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나도 그거 재미있겠는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꿍심 때문에 요즘 내가 추리소설을 읽어대는 건 아니다. 그건 단지 내 마음의 어떤 작용, 자연스런 움직임 같은 것일 게다. 이를테면 어느 시기엔 프랑스 소설들만 잔뜩 찾아서 읽는다거나 어느 땐 ‘새 유럽의 역사’, ‘자궁의 역사’, ‘의자의 역사’, ‘키스의 역사’ 같은 무슨무슨 ‘역사’에 관한 책들만 줄기차게 읽을 때처럼 말이다.
최근에 흥미롭게 읽은 기사가 있다. 그건 요즘 새로 불기 시작하는 추리소설에 관한 기사였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어린이용으로 재편집된 추리소설을 봤던 2,30대 매니아들이 성인용으로 완역된 책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내 경우로 비추어보면 그건 사실이다. 나도 셜록 홈즈와 그의 친구 왓트슨이 나오는 홈즈 시리즈의 추리소설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모두 유년시절에 읽었었다. 추리소설을 새로 찾아 읽기 위해 성인용으로 완역된 책을 찾았으나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얼마전 모 출판사에서 셜록 홈즈 전집의 일부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얼마 전, 나는 모 계간지 편집위원인 모씨와 통화를 하던 중에 서로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요즘 책이 정말 안 팔리고 안 읽힌다잖아. 그래 그렇지. 셜록 홈즈 전집 같은 거 내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우와, 그거 정말 재밌겠다. 그런 얼마 후였으니 나는 짐짓 아! 나는 차라리 소설 쓰지 말고 기획 같은 걸 하는 게 적격이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갈등도 하긴 했다. 그 추리소설집이 요즘 말로 소위 대박이라고 하니 더더욱이나!
기사에 따르면, ‘추리 소설의 고전인 르블랑의 '괴도 뤼팽' 시리즈도 다음주쯤 성인용 완역판으로 다시 나올 예정이며 특히 뤼팽 시리즈는 4개 출판사가 완역본 출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영국 추리소설의 여왕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도 국내 출판사들이 판권을 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등 추리물 시장을 둘러싼 출판사들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고 한다. 바야흐로 추리소설의 붐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 기사를 읽다말고 나는 내 책상 위에 읽다만 책들을 둘러봤다. ‘셜록 홈즈 전집’, ‘뒤마 클럽’,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미소지은 남자’, ‘다섯번째 여자’ 등, 그야말로 추리소설 일색이었다. 아하, 그러니까 나도 거기에 한몫하고 있었군 그래. 그리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추리소설을 읽는가, 하고 말이다.
소설을 쓰는 탓에 나는 소설에 관한 이론서도 꽤 읽곤 한다. 내가 읽은 이론서들은 이젠 일일이 그 출처를 밝힐 재간이 없다. 그건 이미 나의 몸속에 들어와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으니 말이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토도로프가 한 말인데, ‘중요한 것은 진술된 사건들이 아니라 나레이터가 그 사건들을 알려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것과 좀 다른 이야기일진 모르나 나는 ‘행동 없이는 인물도 없지만 그 인물을 알 기회를 제공하는 플롯 없이는 행동도 없다’는 말과 겹쳐 생각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마리 카르디날인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인가 하는 작가는 소설은 하나의 원圓이라는 표현을 했다. 수없이 많은 점들, 혹은 선들이 모여서 결국은 하나의 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동감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이 탐정과 범인을 대립시키는 상호 공격적 관계를 단순히 두 인물이 정면 대결하는 형식으로 드러나게 하지만은 않는다는 것, 그 사건은 이야기의 최종 부분에 가서야 완결된다는 구조적 방법이 순수문학 작품의 한 방법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까지 되는 것이다.
추리소설 매니아라고 말할 순 없지만, 나는 이제 추리소설의 매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추리소설엔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그러니까 모종의 범죄, 구체화된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독자의 동일시와 감동을 이끌어낼 만한 소재, 살인, 사랑, 음모, 배신, 용서, 눈물, 그리고 거기에 작가와 독자간의 ‘지적인 게임’이 함께 한다. 그 지적인 게임엔 필연적인 긴장이 있다. 그 팽팽한 긴장의 느낌이 나는 좋다. 그건 물론 좋은 추리소설을 읽었을 때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긴 하지만.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로브 그리예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약간 길지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전통적으로 좋은 소설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무질서하고 무엇인가 엉성한 듯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지만 일단 소설이 끝나게 되면 어디에도 모호한 점이라고는 남지 않는다. 그것은 추리소설은 각각의 사물이 하나의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말해진 이야기는 의미와 함께 애매하고 변화하며 불확실한 관계들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텍스트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그 의미가 차츰차츰 확고해져야 한다는 소위 현실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은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관심있는 서술적 구조들은 바로 공백 구조들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현실계에 있어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텍스트 상에 끊임없이 구멍이 뚫리며, 결과적으로 의미는 바로 그 구멍들을 거쳐 통과하다는 것이다.’
당분간 나는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접어두어야겠다. 좋은 추리소설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벌써부터 지레 주눅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느 소설인들 그렇지 않겠으나 추리소설이야말로 각 인물들의 심리 상태와 묘사가 치밀해야 하고 인물들 간의 특정한 세계관을 나타내야 하며 거기엔 필시 흥미로운 문체적 변형들을 수반하는 시점의 끝없는 변화들이 가해져야 할 것이며 게다가 그것의 확장, 극적인 묘사, 감동까지 연출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고요한 봄밤, 나는 추리소설들을 읽어대며 범죄 행위와 심리의 분석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수단으로 추리소설을 인식하려고 애쓰는 한편 더 나아가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꽤 복잡 미묘한 생각들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이런, 책이 매번 눈에 제대로 안 들어올 수밖에.
혹자는 최근의 추리소설 붐에 관해 새로운 작가나 작품의 등장에 의하지 않고 과거 인기를 끌었던 외국 원전의 재번역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다, 추리물 열기를 이어갈 국내 작가들의 작품 활동도 아직 활발하게 보이지 않고 있어 염려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역시 책을 고르는 안목일 것 같다. 하긴 그 안목이라는 게 단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작가는 실제에 있어서 대중과 공모관계에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추리소설을 쓰느냐 마느냐, 그 고민이 이렇게 절실한 걸 보면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소설은 주의력과 집중과 메아리와 친화력의 메카니즘이며 확증과 예감으로 가득찬 세계라고 말이다. 그건 또한 추리소설의 한 세계이기도 하다!
* 이 글의 일부는 이브 뢰테르의 ‘추리소설’(문학과지성사, 2000년)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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