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2일, 43번째 평화의 배, 피스보트(peace boat)가 출항했다.
피스보트는 지난 1982년 일본 정부가 교과서에 아시아 '침략'을 '진출'로 기술한 것을 계기로,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을 찾아 올바른 역사를 배우자는 취지로 설립된 일본의 대표적 평화운동단체다. 동시에 이같은 목적으로 승객들을 태우고 세계 각국을 찾아다니는 배 이름이다. 피스보트는 1983년 9월 열흘 동안의 태평양 항해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43번째 배가 세계 각국을 찾아다니며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일본 도쿄에서 출발, 1백일 동안 대만, 베트남, 싱가폴, 인도, 스리랑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아프리카, 유럽, 대서양을 건너 북미, 남미, 태평양을 건너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피스보트에 강제숙(평화시민연대 대표), 김박태식(평화박물관건립운동,비폭력평화물결), 임영신(이라크 반전 평화팀), 이정용(한겨레 신문 사진기자) 네 사람이 피스 프로젝트 팀으로 참가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이 보내오는 소식을 계속 소개하고자 한다. 본지에 싣는 글과 사진은 이들 피스 프로젝트팀이 함께 기록한 것이다. 편집자주
***평화를 찾아가는 긴 여행을 시작하며**
어느새 길을 떠난 지 보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10월, 그곳은 가을이겠지요
태풍 속에 하룻밤을 꼬박 기다려 흔들리는 배를 타고 혼곤한 멀미 속에 시작한 물 위의 여행
어느새 그 물길이 인도 대륙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가을로부터 멀어져 점점 더운 기운 속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1천2백명이 탈 수 있는 이 배는 때로 거대한 섬 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무지개에 아침을 맞기도 하고
또 지는 노을을 보기 위해 갑판에 사람들이 한없는 침묵 속에 서 있기도 합니다.
갑판 위엔 일본 전통 북을 배우는 이들의 북소리,
태극권을 하는 이들의 소리없는 움직임,
젊은 친구들의 댄스,
수영을 즐기는 수영장의 사람들로 하루 종일 이 거대한 섬은 쉴새 없이 움직입니다.
이 움직이는 섬 위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먼 여행
그 여정을 짧은 편지로 조금씩 나누어 가려 합니다.
전화도 인터넷도 쓰기 어려운 물위의 섬에 있으니 편지가 조금 늦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주일 전 베트남에서 부친 편지가 다음주 쯤 한국에 도착한다 하니
이 배의 느리고 느린 속도에 마음을 맞추어 갈 밖에요.
이틀간 심하게 흔들린 배로 아직도 몸의 울렁임 멈추질 않습니다.
지금 배가 인도 첸타이 항에 다다르고 있으니
잠시 후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뿐입니다.
늘 그러하듯이 조금 늦게 시작한 이 여행
게으름으로
몸의 울렁임들로 조금 늦게 시작된 이 편지들이
그곳에 무사히 닿을 수 있기를
제 뒤늦은 걸음들이
평화의 바다에 이르는 이 먼 여정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첫 번째 편지-피스보트, 그리고 물길 안내인**
10월 7일, 이제 배는 인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어젯밤까지 싱가폴부터 3일째 이어진 인도 강좌로 사람들의 마음은 내리기도 전 인도에 깊숙이 젖어 있습니다.
대만을, 베트남을 싱가폴을 거쳐 인도에 다다르는 길, 모두 하루 혹은 반나절 정도를 머무른 짧은 여정이지만 그 여정이 결코 짧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항구에 다다르기 며칠 전 배에 승선해 대만의 근현대사를, 베트남 사람으로서 겪은 베트남의 전쟁 그리고 오늘의 베트남을, 싱가폴의 이면과 아픔들을 안내해 주는 '물 위의 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뿐 아니라 그곳의 음악, 음식, 옷, 언어를 알려주기도 하며, 배에 타고 있는 6백명의 승객들의 마음을 물길을 열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피스보트는 이들을 '물길 안내인'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 시작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들르게 될 21곳의 항구, 1백일의 여정 속에서 승객들은 50여명이 넘은 '물길 안내인'과 깊은 만남, 토론을 가집니다.
피스보트 여행은 들르는 기항지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렇게 기항지에 다다르기 전 철저히 준비된 그 사회에 대한 깊은 만남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대만에 이르기 전 대만 전문가가 승선해 대만의 근현대사를, 일본의 역사적 범죄와 아직 그 사회에 남아있는 그 아픔들을 강좌를 통해 나눕니다. 때로는 다큐멘터리로, 영화로, 슬라이드로, 평범한 시민들은 대만에 다다르기 전 이미 대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는지, 마음을 여미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강좌들 속에는 스리랑카의 음악, 음식 만들기, 인도 옷 입는 법, 간단한 대만어 배우기, 베트남 결혼식 등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그램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강제되는 게 아니라 승객들은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강좌들에 참여해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됩니다.
보통 기항지 한곳에 내리기 전 3-4번의 큰 강의(3백명 정도가 수용 가능한 강의실에서), 그리고 2-3번의 작은 강의, 한두 번의 깊이 있는 소그룹 토론이 있습니다. 한 기항에서 한 곳에 다다르는 여정이 길이에 따라 그것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짧게는 이삼일 보통 5일 정도의 승선 기간 중 승객들은 강의 시간 뿐 아니라 하루 세 번 식사시간, 티 타임 등을 이용해 스스로 만든 프로그램에 이 강사들을 초청하기도 합니다. 인도 옷에 관심이 있어서 인도 옷 만들기 강좌를 하고 있는 이는 인도 여성 평화운동가 람다스씨를 초청해 인도 옷 만드는 법, 옷 입는 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라면 몇몇 학자들이나 그 분야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활동가들이 아니라면 접하기 어려운 강좌들을 이곳에서 그저 여행을 떠난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강좌에는 통역이 있어 영어를 못하는 승객들도 강좌에 참여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작은 규모의 강좌나 소그룹을 만들 경우도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통역팀에게 미리 통역을 의로하면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한국이라면 오래전 부터 준비해 진행될 국제 회의 수준의 일들이 이곳에선 3개월 동안 일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승객들은 쇼핑도 하고 사진도 찍지만 기항지에 내리기 전 정보와 함께 마음의 시선을 얻어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스보트는 이렇게 물길 안내인들을 태우는 과정을 통해 일년 내내 각 분쟁 지역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또 중요한 학자 및 운동가들과 연대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7개의 옵션 투어가 진행될 것인데, 시민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시장이나 관광지 혹은 박물관에 갈 수 있습니다. 고아원을 찾거나 대학생들과 교류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다양한 옵션 투어와 함께 스텝들은 내년 1월에 뭄바이에서 열릴 월드소셜포럼(World Social Forum)과 연대하기 위해 한 대학에 Pre World Social Forum을 갖습니다. 올 12월에 출항할 다음번 크루즈의 일정는 내년 1월 뭄바이의 World Social Forum에 참여하도록 항해 일정이 조정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국제연대 담당자 한 명을 파견해 한국의 활동과 이슈를 소개하는 우리의 국제연대 차원과 달리 이들은 이 배를 통해 6백여명의 시민들이 World Social Forum이 무엇인지 접하고 전 지구적 이슈들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물길 안내인을 통해, 또 기항지에서의 다양한 프록램들을 통해 놀라운 수준의 평화교육, 국제연대를 해 가고 있는 피스보트의 행보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무엇보다 배워가고 싶은 것을 이 배를 띄우는 피스보트 사람들의 그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이제 막 배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하루라는 짧은 여정, 그러나 그 속에서 인도의 시민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항구에 내릴 채비를 합니다. 잠시 글을 멈추고 인도를 향해 한 걸음 내딛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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