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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반미용공 사상에 빠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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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반미용공 사상에 빠졌다고?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문화일보 조희문 칼럼 '한국영화의 敵들'에 대한 반론

이쯤되면 궤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바로 매체와 필력을 이용한 혹세무민의 전형적인 자세다. 조희문 교수(상명대 영화학과)가 최근 문화일보에 쓴 칼럼 「'괴물'과 한국영화의 敵들」얘기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 교수의 이번 글은 우리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것과 '의도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추후 정권 향배에 따라 자신의 기득권을 극대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조희문 교수는 이번 글에서 <괴물>을 포함해 <웰컴 투 동막골>과 <한반도>, 심지어 <왕의 남자>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조 교수는 글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한국영화들이 '한국'을 인정하며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걱정스럽다"며 "전통적 가치나 관습을 극단적으로 뒤집거나 자해적 자기 부정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조 교수는, 영화 <괴물>의 괴물이 미군부대에서 방류한 독극물 때문에 생긴 돌연변이라는 설정을 예로 든다 조 교수가 판단하기에 영화가 주한미군을 '치명적인 악역'으로 만들어 '마치 우리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영화 <괴물>에 「괴물=미군부대=미국」이라는 반미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다는 주장이며, 여기서 보다 더 큰 문제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영화의 상당수가 그 같은 「극단적 자기부정=한미 동맹관계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조 교수의 주장이다.
괴물 ⓒ프레시안무비
<웰컴 투 동막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 교수는 이 영화 역시 미군을 '적'으로 묘사하면서 궁극적으로 "미군이야말로 모든 비극의 배후이며 증오의 대상처럼 비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는 영화가 "전쟁의 원인이나 책임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반일의식이 문제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왕의 남자>에 대해서도 영화속 왕과 신하가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챙기는 인물들로만 묘사돼 문제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조 교수는 결론적으로 "흥행을 주도하는 주류 영화의 큰 흐름이 우리 사회를 긍정하며 통합으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전복과 분열적 자기 부정을 조장하는 현상을 '예술'이나 '문화산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열광하기는 어렵다"며 "한국영화 열풍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기보다 공격성과 적개심, 선동성을 앞세운 채 오히려 사막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 「흥행영화=반미영화」라는 등식으로 보수세력 결집에 나서 조 교수 글에 대해 삼척동자라도 제기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영화가 차용한 소재나 설정을 영화의 메시지로 직결시켜버리는 '단순우매함'에 있다. '괴물'이 미군이 버린 독극물에서 비롯된 돌연변이라는 설정이 미군을 적으로 간주하는 메시지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핵폭탄 투하 이후 나타난 '고질라'는 일본영화계의 반미의식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얘긴가. <괴물>의 '괴물'을 보면서 대다수의 관객들은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 교수의 얘기처럼 이를 곧바로 '우리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진짜 정체'라고 확대 과장하지는 않는다. 그저 '평화를 위협하는 것' 중의 하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유일한 '문제적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웰컴 투 동막골 ⓒ프레시안무비
<웰컴 투 동막골>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이 힘을 합쳐 미군 B29에 총을 쏴대는 장면 역시 조 교수가 보기에는 미군을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의도인 것처럼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반관객들은 그 장면을 통해 오히려 전쟁이 갖는 아이러니, 나아가 적과 아군이라는 단순한 개념 이상의 휴머니즘을 느꼈다고 입을 모은다. 조 교수의 말대로 그 장면이 정말 문제였다면 지난 해 <웰컴 투 동막골>이 800만 이상의 관객이 몰리면서 누구 하나 문제제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웰컴 투 동막골>의 장면은 그동안 우리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을지언정, 그것 하나로 우리사회의 줄기가 뒤바뀔 것이라고 생각한 관객들은 없었다는 얘기다. 관객들은 최소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양식을 갖고 영화를 대한다. 어쨌든 그렇다면 "흥행을 주도하는 주류 영화의 큰 흐름이 우리 사회를 긍정하며 통합으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전복과 분열적 자기 부정을 조장한다"는 조 교수의 주장은 현실 속에서 전혀 그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과연 이들 영화로 인해 지금까지 우리사회가 전복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분열된 흔적이 조금이라도 나타났던가? 오히려 이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더 큰 화합의 의미를 획득하고, 더 큰 통합의 장을 확장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조 교수야말로 이번 칼럼에서 이들 영화를 빌미로 삼아 우리사회를 보수적 기치와 이데올로기로 전복시키고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최소한 조 교수의 이번 칼럼은 '창작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험한 발상이자, 심각한 위협의 글로 보인다. '전통적 가치나 관습을 극단적으로 뒤집든' '자해적 자기 부정을 더 많이 드러내든' 그 같은 소재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태도는 일종의 파시즘적인 것이다. 설령 그런 영화가 만들어진다손 치더라도 그 같은 경향을 순화시켜 사회 시스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내성'이 마련돼 있다면 이들 영화야말로 사회문화의 다양성을 이뤄내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들일 수 있다. 오히려 조 교수처럼,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철저한 배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야말로 사회문화의 다양성을 해치는 제1의 요소가 될 것이다. 조 교수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예술'이나 '문화산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열광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첸 카이거가 말했다. "영화는 성스러운 창녀와 같다." 거리에 서 있는 여자를 성스러운 마리아로 보느냐, 창녀로 보느냐는 것은 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달려 있다는 얘기다. 조희문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로 보고 있는 영화를 혼자서만 그 여자가 창녀인 것을 안다고 떠들고 있는 셈이다. 하긴 그것도 조 교수 마음이다. 조 교수의 글의 가장 큰 성과는 그가 쓴 칼럼의 제목마따나 한국영화의 진짜 '敵'이 누구인지를 쉽게 알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조희문 교수 칼럼 전문] '괴물'이 또 한번 한국영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582개로 줄긴 했으나 전국 620여개 스크린에서 관객 '사냥'을 시작한 것도 새 기록이고, 개봉 14일 만에 전국 736만명을 돌파한 속도도 처음이다. 영화의 수준이나, 상영 규모, 흥행 속도 어느 쪽으로라도 한국영화의 새로운 단계다. '왕의 남자'가 세운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언제 넘을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을 정도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로 이어진 흥행 신기록 행진은 그대로 한국영화의 약진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괴물' 돌풍은 한국영화의 힘이 계속 상승하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람을 일으키는 한국영화들이 '한국'을 인정하며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걱정스럽다. 전통적 가치나 관습을 극단적으로 뒤집거나 자해적 자기 부정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미군부대에서 방류한 독극물 때문에 생긴 돌연변이 괴물이 치명적인 악역을 맡는다. 선량한 가족과 시민을 위협하며 서울을 공포의 도시로 만든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가 닥치는데도 우리 정부나 미군 당국은 무책임하고 무능한 태도만 보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진짜 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적개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얼마 전 흥행 바람을 일으켰던 '웰컴 투 동막골'도 국군이나 미군을 '적'으로 묘사한 경우다. 6·25전쟁중의 강원도 산골 마을의 평화를 깨는 존재는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이다. 남한의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 낙오병들은 우연히 동막골에서 조우하지만 곧 경계심을 걷어버린 채 어울린다. 전쟁의 원인이나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없다. 조난당한 미군 조종사를 찾으러 국군 수색대가 등장하면서 마을의 평화는 깨진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을 위협하고 협박한다. 이어지는 미군의 공습. 결국 미군은 모든 비극의 배후이며 증오의 대상처럼 비친다. 적과 아군, 동지의 개념은 멀리 날아간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한반도'는 더 직설적으로 일본을 적으로 몰아세운다. 대한제국이 국권침탈을 당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한 이 영화는 오만하고 무례한 일본을 응징하려 한다. 사실을 뛰어넘는 과장과 국수적 민족주의를 배합한 구성을 흥행 포인트로 삼아 관객의 감성을 흔들려 한다. 영화적 포퓰리즘이다. '왕의 남자'는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작품성과 흥행을 함께 인정받은 경우로 꼽히지만, 영화 속에 등장 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도 행복한 경우를 찾기 어렵다. 왕은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광기로 부서진 지 오래다. 국정을 제대로 이끌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다. 신하들은 출세에 어두워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챙기고 매관매직을 일삼는다. 그런 왕과 신하들이 통치하는 나라의 백성들은 더 죽을 맛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징이랄 수 있는 광대들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 신세나 다름없다. 권력이 부르면 가야 하고, 때리면 맞아야 하고,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왕도, 신하도, 백성도 절망에 갇혀 있는 패자들일 뿐이다. 개별 영화들만으로 본다면 만드는 사람의 극적 상상력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지만, 흥행을 주도하는 주류 영화의 큰 흐름이 우리 사회를 긍정하며 통합으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전복과 분열적 자기 부정을 조장하는 현상을 '예술'이나 '문화산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열광하기는 어렵다. 한국영화 열풍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기보다 공격성과 적개심, 선동성을 앞세운 채 오히려 사막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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