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점자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실용화됐다.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 승강장 바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란색 점자 블록. 8년 전 한 곳에 불과했던 점자 블록 전문회사는 현재 30여 개가 치열하게 경쟁할 정도로 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점자 보도블럭 등 전통적인 점자시장이 커진 것뿐 아니라 최근엔 점자의 사용 범위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또 기업의 좋은 이미지 구축, 독특한 디자인 등 그 사용 목적도 다양해졌다. 초콜릿에서부터 명함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꾸준히 넓혀 가고 있는 점자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2003년 국산 점자 악보 도입
평범한 악보가 아니다. 있어야 할 오선과 음표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백지로 보이는 종이에 손을 대 보니 그제야 톡톡 튀어나온 점들이 만져진다. 돌출된 작은 점들이 오선과 음표 대신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백지 아닌 백지 악보는 바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악보다.
2005년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약 18만 명. 그 중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지만 지난 2003년 국산 점자 악보가 처음 도입됐다.
일반글자를 점자로 바꾸어주는 점역사 조성용(54) 씨가 설립한 '악보디지털 도서관'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 이전에는 주문이 들어오면 일본이나 미국에 의뢰해서 제작했다. 의뢰인이 악보를 받아보기까지 최소 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악보뿐만 아니라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의 악보도 발행하고 있다. 주 고객층이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주문을 받으면 직접 가정으로 발송해준다.
이 회사는 온라인상에서도 악보를 판매 하고 있다. 점자 프린트기가 구비되어 있는 가정에서는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점자 악보를 출력해 볼 수 있다. 점자악보의 가격은 한 장당 7000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회사 홈페이지 온라인 악보를 이용하면 1000원에 다운받을 수 있다.
점자 노트북 등 최첨단 전자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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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보화 시대에 발맞춘 최첨단 전자 제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점자를 이용한 대표적인 제품은 점자 정보 단말기와 프린트기다.
흔히 점자 노트북으로 알고 있는 점자 정보 단말기는 일반 노트북 못지않은 성능을 자랑한다. 비록 이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외의 기능은 대부분 가능하다. 시각장애인은 기기의 모니터 역할을 하는 점자판을 만져보고 자신이 한 작업의 내용을 확인함으로써 문서작업은 물론 인터넷 사용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단말기의 가격은 약 520만 원 선. 고가이기는 하지만 일 년에 한번 정부에서 장애인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금액의 약 80%정도를 지원해준다. ㅎ사가 1999년부터 4년에 걸쳐 개발한 한글지원점자 정보 단말기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그 전까지는 모두 수입에만 의존해 훨씬 높은 가격으로 구매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로만 지원돼 시각장애인들이 사용에 큰 불편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ㅎ사의 최혜란(29) 씨는 "판매율이 크게 높아지지는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이 25%로 정도 늘었다"며 "조만간 해외에 역수출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점자프린트기'도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보통 종이보다 빳빳한 전용 종이에 까만 글씨 대신 오돌토돌한 점자가 새겨져 나온다.
점자프린트기의 강점은 점자를 모르는 일반인들도 손쉽게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반문서를 점자로 바꿔 주는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만 해주면 자동으로 인쇄되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 외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점자 프린트기는 약 15년 전부터 국내에 수입됐다. ㅎ업체의 경우 96년에 2대 정도를 판매하는 데에 그쳤지만 현재 판매량은 약 21대로 열 배 가까이 증가했다. 한흥기(44) 기술영업개발팀장은 "수입품이지만 외국에서 전문기술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A/S 서비스를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다"며 "지금도 전적으로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국산 점자 프린트기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라서 3~4년 이내에 국산 점자 프린트기를 시중에 선보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점자 보드게임까지 등장
놀이를 위한 점자 제품도 출시됐다. 최근까지는 시각장애인들의 여가를 위한 상품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게임은 장기와 점자바둑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인천의 한 중소기업인 ㅈ 회사에서 국내 최초로 '매트릭스'라는 시각장애인용 보드게임을 선보였다. 각각의 숫자를 점자로 새겨 넣은 64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이 게임은 인체에 무해한 멜라민 수지로 만들어졌다. 숫자를 잘 조합해서 자신의 타일을 모두 없애면 승리한다. 게임진행이 빠르면 3분 이내에 끝낼 수 있으며 게임의 주도권을 수시로 뺏고, 뺏길 수 있어 박진감이 넘친다. 약 1년여의 연구기간을 거쳐 제작된 이 상품은 현재 시각장애인학교나 복지관, 장애인 선교회 등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회사의 최명호(29) 팀장은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게이머와 시각장애인이 대결하는 것을 보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매트릭스'는 문화관광부와 교육자원부가 개최하는 시각장애인 게임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매년 9월에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린다. 또 '매트릭스'와 함께'젓가락 윷'도 얼마 전부터 주문 생산하고 있어 시각 장애인들의 즐길 거리를 늘려가고 있다.
점자, 대기업 마케팅에도 활용
새롭게 불고 있는 '점자 바람'은 대기업의 마케팅으로까지 연결됐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맥주'. ㅎ맥주 회사는 10년 전부터 캔맥주 윗 부분에 점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맥주'라는 뜻의 점자는 현재 캔으로 출시되고 있는 다섯 종류의 모든 제품에 찍혀 있다. 경쟁 회사인 ㅇ사도 이에 질세라 4개 종류의 캔맥주 상품에 점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제품에 점자표기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제조 원가가 얼마 차이 나지 않아 기업 측에서도 부담 없이 쉽게 시도할 수 있었다.
맥주뿐 아니라 점자는 음료, 영양제, 초콜릿 등의 기호식품에도 속속 등장했다. 2000년부터 ㅋ사의 초콜릿에는 이름과 함께 가격도 점자로 찍히고 있다. 이 회사는 점자표기가 회사의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앞으로 점자 표기 제품을 더 늘릴 예정이다. ㅎ사의 마케팅 부서 김진형(37) 대리는 이처럼 기업들이 점자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기업은 모든 사람을 고객으로 생각한다. 시각장애인 또한 예외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점자 표기가 매출량 증대와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장애인을 배려한다는 측면에서 회사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점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매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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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2~3년 전부터는'점자명함 갖기 운동'까지 일고 있다. 더 좋은 이미지를 위해 정치인은 물론 기업에서 단체로 점자 명함을 주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틈새시장을 노린 점자 출판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ㅌ점자 출판사의 김용택(39) 부장은 "3년 전만 해도 점자명함의 1년 주문량은 1~2건에 불과했지만 작년에는 15건 정도로 많아졌다. 점자 명함이 시각장애인을 배려했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점자 명함을 만든 정모 씨(49)는 "직접 시각 장애인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지만 일을 하면서 혹시 필요한 경우가 생길 것 같아 회사원들끼리 만들었다"면서 "점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장애인을 조금이나마 생각한 것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강원지부 이판구(44) 사무국장은 점자를 활용한 상품이 이처럼 많아지는 추세에 대해 "궁극적으로 상업 활동을 위해 점자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시각장애인을 배려했다는 측면에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며 "상품이 출시되는 만큼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의 경우에는 점자가 이미 많이 보급됐는데 우리나라도 한 때의 이벤트성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손목시계, 담배 자판기, 화투 등에도 새겨져 있는 점자는 점점 시각장애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점자는 시각 장애인의 것만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표방하는 요즘 '점자'는 일반인과 장애인의 틈새를 좁혀주는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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