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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2009]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보다 '관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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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PIFF2009]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보다 '관계성'이다"

[Film Festival] 김동원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지상중계

<워낭소리> 이후 독립 다큐멘터리는 다시금 뜨거운 관심과 주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과거 주로 가려진 현실을 드러내는 정치, 사회적 이유 때문이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재미와 감동 등 보다 문화적이고 상업적 의미에서의 관심이라 할 만하다.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을 요구받는 지금의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과연 다큐멘터리의 '이야기 진행'은 어떤 식이어야 하는가? 스토리텔링의 한계는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 독립영화의 대부, 한국 다큐멘터리의 아버지인 김동원 감독이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들려주는 마스터클래스가 12일 오후 3시 그랜드호텔 스카이홀에서 열렸다. 김동원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에서부터 다큐 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관계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며 결국 '진정성'을 강조했다. 노숙인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거리에서의 삶을 심층깊게 담은 박기복 감독의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1994), 국내에 '풀어헤쳐진 말들'이란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말론 릭스 감독의 <묶인 혀를 풀며 Tongues Untied>(1990), 그리고 다큐멘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의 3부작 영화 <칠레 전투> 중 2부의 일부 장면들을 상영하며 견해를 덧붙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그의 이야기를,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관객들과 독자들을 위해 프레시안이 정리했다.

'스토리텔링'이란 대체로 마케팅 전략의 측면에서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다큐멘터리가 정보성이나 유용성을 전달했다면, 지금은 재미와 흥미,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중시된다. <어떤 나라>, <푸른 눈의 평양시민> 등을 연출한 대니얼 고든 감독도 어느 강연 자리에서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며 "메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메시지는 스토리에 자연히 따라온다"고 강의할 정도다. 이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스토리를 고민했던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정반대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이 지금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가 되면서, 또 사회가 파편화되면서 일반적으로 생겨난 경향이다. 그러나 지금 특히 스토리텔링이 화제가 되는 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극장용 다큐멘터리나 피칭(감독, 프로듀서 등이 투자자 앞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프리젠테이션하는 것)에 대한 세미나에서는 이전에 없었던 경향이 센 힘으로 밀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피칭이라는 게 원래 영화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 심지어 사전조사도 아직 되지 않은 단계에서 그럴 듯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심사위원들에게 재미있겠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것이 주요 내용이 돼가고 있다. 태도에서 쇼맨십이 요구되고, 섹시한 이야기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를 택하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열린 피칭에서 최종 다섯 작품이 올라왔는데, 이 중 두 편이 인도 촬영이더라. 클리닉 강의를 했는데 거기서는 여섯 작품 중 세 편이 음악 다큐멘터리였다. 흥미요소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 ⓒ프레시안

<워낭소리>를 계기로 제작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다. 과거 다큐멘터리의 평균 제작비가 3, 4천만 원선이었다면, 이제는 억 단위가 됐다. 극장에서 개봉하기 위해 사운드 믹싱이나 HD카메라 사용 등이 보편화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제작비가 증가했다. 한편으로는 피칭에서 제공되는 펀드 규모가 대체로 천만 원 내외였는데, 최근 전주영화제에서 8천만 원을 표방했고 EBS의 경우 3천만 원을 책정했다. 무엇보다도 영진위의 투자조합을 통한 제작비 지원은 2억이 됐다. 방송다큐에서는 최고선이 2억이었던 것이 이제 10억으로 올랐다. 여기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되려다 보니 글로벌 마켓을 겨낭한 소위 블록버스터 다큐를 자꾸 기획하게 된다. 이러한 펀딩이나 극장개봉용 다큐에 대한 관심은 독립 다큐보다 오히려 방송 다큐 감독들이 더 많다. <북극의 눈물>도 방송 다큐를 극장용으로 재편집해 곧 개봉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EBS에서는 작년에 방영된 공룡 애니메이션 다큐를 50억을 들여 내년에 극장 다큐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독립 다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즘 고민이 많이 된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로서 이 현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스토리 vs. 스토리텔링

다큐멘터리 역시 하나의 스토리체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동원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강력한 영상매체다. 음악은 물론 내레이션도 다큐에서는 흉이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극영화와 비교해 보면,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로서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초라해 보인다. 그 한계를 인정하자는 것이 나의 출발지점이다.

물론 다큐에는 큰 전제가 있다. "현실은 어떤 픽션보다 위대한 드라마이다" "장동건보다도 내가 더 뛰어난 배우다"라는 것. 9.11 사건이 주는 충격은, 비슷한 장면 담은 극영화들, 예컨대 <고질라>나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영화가 이전에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능가해버린다. 80층이 아닌 10층짜리 빌딩이 무너졌다 해도 극영화에서 80층짜리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충격일 것이다. 다큐의 힘은, 이것이 언젠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극영화에서 감독이 하는 일은 준비한 판타스틱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현실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다큐 감독은 그런 걸 할 필요가 없다. '사실'은 이미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것이 다큐 감독의 태도다. CG, 복잡한 복선, 멋진 엔딩, 소품, 의상, 이런 것들이 다큐에는 필요없다. 극영화에선 이 모든 것들이 스토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중요성을 갖지만 다큐는 그럴 필요가 없다.

▲ ⓒ프레시안

다큐 감독이 하는 일이란, 스토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갖고 뭘 하는가, 이다. 이것이 바로 다큐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는 현실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해내는 것이고, 극영화는 창조하는 것이라 얘기하는데, 그렇다고 '발견'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다. 말은 쉽지, 줍기만 하는 되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뻔히 있는 걸 알면서도 발견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지나간 순간들인 만큼 인터뷰 증언이나 과거 자료들만 남아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발견'이란 과연 무엇인가.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번 푸티지는 아마도 케네디 암살사건을 담은 뉴스릴일 텐데, 물론 그런 장면을 찍으면 좋겠지만 그건 로또에 당첨될 확률 정도로나 가능하다. 다이렉트 시네마 감독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결정적 순간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만약 포착을 했다 치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려면 다툼이 됐든 미움이 됐든 깊은 욕구가 됐든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 갈등 요소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면 큰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찍었다 하더라도 이걸 과연 편집에 넣을 수 있는가, 고민하게 된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갈등의 순간을 표현해내는 건 '발견'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화면에 띄울 수 있는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큐는 극영화에 비해 '이야기적인 구조'와 재미를 갖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너무 비관적인가? 가능성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봐서 극영화와 이야기적으로 대결하지는 말자. 극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다큐를 만드는 건, 난 이미 포기했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는 다큐는 애당초 한계가 존재한다.

다큐의 3요소 : 대상과 감독, 그리고 관객

다큐뿐만 아니라 모든 재현체는 그 이야기의 대상이 있고, 하는 스토리텔러가 있고, 듣는 관객이 있을 때 성립한다. 하나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라 해도 듣는 사람, 혹은 관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감독이 하고픈 얘기와 대상이 보여주고픈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송환>의 경우도 그냥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동원이 본, 같이 있었던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이다. 주관적 내레이션을 했든 안 했든, 언제나 감독이 스스로 직접 고르고 편집한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다이렉트 시네마에서처럼 감독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한다는 것도, 실은 '관찰하는 듯한'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이다. 어떤 형식을 취하고 어떤 입장을 갖든, 이것은 대상의 이야기에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섞이는 것이다. 여기에 관객은 다시 자기 이야기를 섞게 된다. 쿨레쇼프 효과를 생각해 보자. 전혀 상관이 없는 두 컷을 붙여놓으면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찍어 촘촘히 편집한다 해도, 사실과 사실간에는 틈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관객이 이 틈을 스스로 연결시켜서 이해하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방송다큐가 극장으로 가는 경우 조심해야 하는 것도 이런 측면이다. TV에서 그냥 앉아 다큐를 보는 시청자와, 극장에 자기 돈을 내고 가서 능동적으로 보는 관객은 다르다. 지금의 TV 다큐처럼 지나치게 친절하면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넣을 틈이 없어지게 된다. 다큐란 다소 불친절함으로써 관객의 적극적 참여의 여지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큐 감독의 역할이기도 하다. 관객의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해석의 여지와 틈이 있어야 한다, 수동적으로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을 관객은 좋아하지 않는다.

대상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극영화에서의 등장인물은 주로 영웅신화적 모티브를 띄고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큐에서는 인물이 사건 안에 놓여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극적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우리가 변화를 가할 수 없지 않는가. 그저 막연하게 예상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의 대상이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감독은 그 파업이 언제 일어날지 어떻게 될지 잘 모르지 않나. 그 상황이 노동자를 변화시킬지 아닐지, 혹은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할지 안 할지, 파업이 중단될지 계속될지도 알 수 없다. 보통 다큐는 상황의 변화를 기대하기가 난감하고, 요구할 수도 없다. 액션이 없는 것이다. 인물들이 뭘 할 건지 예상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개입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극영화에서 인물이 상황을 변화시키지만 정작 그 인물은 고정되는 반면, 다큐에서는 상황은 고정되지만 인물이 미묘한 변화를 겪는다. 다만 그 변화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게 어려울 뿐이다.

대상의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한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대상의 이야기와 감독의 이야기가 혼재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좀더 적극적으로 상호작용 하는 것이 바로 다큐의 특징이 아닐까. 극영화에선 감독과 등장인물의 관계가 계약적이고 수직적이다. 요즘은 다큐에서도 사례비를 주는 경우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이것은 연출을 할 권리를 일정 정도 사는 느낌이 든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촬영 후 오히려 '물건'으로 선물을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만약 돈을 주는 관계가 정착돼 버리면 그것은 다큐에 비극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큐에서는 흔히 대상과 감독간 관계가 수평적이고 쌍방적이라고 한다. 다큐에선 등장인물이 감독인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런 관계가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다큐다.

카메라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복잡한 양상이 전개된다.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솔직할 것인가, 말과 행동이 어떻게 괴리되는가, 혹은 이것이 어떻게 포착되는가. 그리고 만드는 이와 대상 간 관계야말로 결국 다큐의 미학이라 생각한다. 사운드나 믹싱을 잘하는 것 역시 미학적 부분이겠지만, 이는 다른 매체, 특히 극영화에서 더 잘할 수 있는 것이고,. 다큐의 고유한 스토리텔링적 장치란 결국 그런 관계성이라 생각한다.

다큐의 고유한 스토리텔링적 장치는 '관계성'

감독과 대상과의 상호작용이란, 감독이 피할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일반화되었다. 감독의 역할이 소극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개입하는 관찰적 모드든 마이클 무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든, 가와세 나오미처럼 어떤 대상의 이야기를 하든 결국 다 자기 이야기로 돌아오는 나르시시즘이든 마찬가지다. 내 경우 <송환>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해보긴 했는데 나도 내성적이라 그런지 잘 못하겠더라. 내 이야기는 대상의 이야기의 서브텍스트같은, 겸손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며 <송환>에서 나를 표현했는데, 어떤 사람은 굉장히 유쾌하고 발랄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낫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개성이 적절히 잘 표현되면 그것이 관계성"이라고 예전에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TV에서 <동물농장>을 즐겨 보는데, 동물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 제작자가 전문가를 데려와 치료해주지 않나. 제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온갖 리얼리티쇼들은 상황을 다 짜놓고 아예 멍석을 깔아준다, 개입이라는 것을, 요즘은 방송다큐에서 더 많이, 적극적으로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개입이 있다고 해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관계를 깊이 맺고 개입을 많이 해서 좋은 일을 하고... 이것도 한편으론 벌써 유행이 지난 것, 혹은 오염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관계성'이 바로 스토리텔링적 가능성인데, 그렇다면 어떤 관계성의 표현이 가치있고 감동적일까, 요즘은 이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개입'이라는 것이, 독립다큐는 방송다큐에 비해 관계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일부 장면 상영 1 :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박기복 감독 / 1994

감독과 대상이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나중에는 호형호제하는 관계로 바뀌는데, 그 밀접한 관계가 느껴져서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 밀접한 관계 때문에 나중에 가면 담배 한 가치를 주고받으며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을 딱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참 아름다운 장면인데, 내 경우 그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이 따로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 결국 감독도 변한다는 의미란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찍히는 대상인 노숙인뿐 아니라 노숙인을 보는 감독의 관점과 태도도 변한다. 다큐를 하면서 감독도 변하는 것이다. 나 역시 영화를 찍으면서 의견이나 태도가 변하는 경우가 많다. 혼란스럽거나 의심이 들거나, 믿었던 것에 회의가 들거나, 내가 흔들리거나. 그런 순간들이 참 많다.

다큐는 그런 흔들림과 변화가 표현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감독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위치나 시선이 딱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감독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관찰적이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자연인으로서 감정적 혼란을 겪거나 태도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다른 매체나 장르는 이를 표현할 수 없다. 감독과 등장인물과의 관계의 변화란 결국 감독의 변화를 노출하는 것이고, 내게 재미있는 건 이것이다. 그것만이 진실한 것 아닌가. 그런 변화 없이, 그런 변화에 대한 언급 없이 우리가 어떻게 대상을 이야기하겠는가?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 다큐멘터리스트에겐 신나는 일이 된다.

▲ <묶인 혀를 풀며>
일부 장면 상영 2 : <묶인 혀를 풀며 Tung untied> 말론 릭스(Marlon Riggs) 감독 / 1990

외국 작품 베스트를 꼽으라면 꼭 톱5 안에 넣는 작품이다. 고정된 스튜디오 안에서 다 만들었기 때문에 좀 썰렁하고, 현장감이나 생생함이 전혀 없다. 흑인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대해 흑인 동성애자인 감독 자신이 얘기하는, 선동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흑인 게이 시인에 대한 이 영화는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면서 게이 컬쳐에 대해 소개한다. 영화적으로 보면 세팅도 단조롭고 편집도 거칠어 기법상으로는 다소 엉성하게 느껴지지만, 이 영화만이 갖는 고유한 힘이 있다. 말론 릭스가 얘기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꼭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시적 언어로 승화된, 마치 시를 낭송하는 느낌으로 독백을 하는데, 그런 사실들 자체를 승화시켜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랩, 춤 등 다양한 요소로 표현하면서,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흑인 게이 컬쳐의 독특한 특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표현하고 있다.

설명적 내레이션이나 인터뷰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전통적인 방법들이 많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재미없는 작품이 됐을 것이다. 흑인 게이 커뮤니티에 대해 흑인 게이 커뮤니티의 언어로 표현이 됐고, 그렇게 되는 순간에 감독이 들려주는 에피소드의 내용은 더 이상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진정성이 담기는 것이다. 대상의 이야기가 감독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이 영화는,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독특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흑인 동성애자에게 흑인 게이적 스토리텔링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면, 한국 다큐적 스토리텔링의 방법으로는 판소리나 우리의 또다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맞물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 <칠레전투>
일부 장면 상영 3 : <칠레전투 : 제2부> 파트리시오 구스만 (Patricio Gusman) 감독 / 1976

상영한 장면은 3부 연작 중 2부의 끝장면인데, "아옌데는 죽었지만 칠레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흐른다. 영화 전체적으로 감독이 굉장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태도로, 반대되는 입장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전반적으로 건조하게 이끌어가는 다큐멘터리인데, 맨 끝에서 바로 이 내레이션 목소리가 나오면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드라이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주관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3부에선 민중 자치의 실험을 나열해 나가는데, 맨 마지막 장면이 노동자들이 모여 열심히 회의하다 헤어지는 장면이다. 그들이 잡담을 나누며 인사를 하는 장면을 담고 그 배경에 산을 보여주는데, 이것 역시 매우 주관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칠레 전투라는 사건 자체가 갖는 힘도 있지만, 거기에 구스만 감독의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 희망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 태도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작품은 별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없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내가 왜 좋아할까 정리를 하면서 내가 감동받는 세 장면을 고른 것이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의 경우 감독이 계급과 신분이 다른 노숙인과 벽을 뛰어넘었단 사실, 자신의 변화 모습을 솔직히 노출한다는 점이 감동적이고, <묶인 혀를 풀며>의 경우 사실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감독의 태도와 진정성, 이를 뒷받침해주는 여러 표현방법들이 강점이다. 감독이 진솔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칠레전투>는 아까도 말했듯 절대로 희망을 놓지 않는 감독의 태도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가. 가장 중요한 게 뭔가. <칠레전투>에서처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다큐에서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성'과 '희망'

아무리 '진실'이란 말이 바래고 촌스러워진다 해도 다큐에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이런 냉소적인 세상에서 왜 사람들은 '다큐열풍'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여전히 다큐를 볼까. 아무리 극영화가 판타스틱한 얘기를 SF적 상상력에 담아 이야기를 해도, 이와는 또 다른, 다큐가 표현해내는 것이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스크린을 채울 때, 사람들은 더 날 것을 요구한다. 다큐의 존재에서 스토리텔링보다 더 우선되는 건, 진정성을 지키려는, 최소한 진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진정성이란 것, 좀 쑥쓰럽지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걸 믿느냐 아니냐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이 감독 자신과 분리되면 안 된다. 작품의 메시지가 감독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 때 진정성이 나온다. 다큐는 등장인물의 90%가 소수자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부끄럽거나 껄끄럽지 않기 위해 내 삶과 생활에서 나를 준비해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 때, 진정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가장 위대한 스토리텔링은 스토리텔러와 분리되지 않는다. 스토리텔러의 혀와 발과 지갑은 스토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라는 말도 있다. 마케팅에서도 가장 위대한 스토리는 진정성이라 얘기한다. 누구나 진정성이 최고의 가치란 건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정말로 믿고 추구하고 자신의 삶을 맞춰가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오늘,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정작 얘기를 많이 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관계성의 표현, 진정성, 이런 것들이다. 피칭이나 방법론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노파심에서 내 얘기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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