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온도를 지닌 세 남자가 있다. 강렬한 절대 권력에 의해 검게 타들어가는 그들의 정신과 육체는 고단하다. 발끝에는 태양의 이면에 교묘히 숨어 세 남자를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달려있다. 태양과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여자, 그리고 사랑.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절망과 환희의 경계에, 몸과 언어의 경계에, 고전과 모던의 경계에 선 롤랑 프티의 세 작품이 각각 자신의 죽음을 품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국내 처음 소개된 롤랑 프티의 세 작품은 연극적이다. 분명 무용수들의 몸은 말을 하고 있다. 직설이 아닌 은유를 추구한다. 신경 곳곳에 포진돼 있는 감정은 절제를 통해 무대의 밀도를 높인다. 모든 표현들이 살아 음악 위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관객들은 무용수 손끝의 땀 한 방울 조차 유의미하게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땀은 눈물이 된다. 왜 몸으로 울 수밖에 없는가. '아를르의 여인'의 프레데리, '젊은이와 죽음'의 젊은이, '카르멘'의 돈 호세가 방황과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거기에는 숨어있던 죽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며 서 있다.
'롤랑프티의 밤'에는 쉬이 넘어가는 장면이 없다. 모든 신마다 압축된 에너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군무는 또 하나의 예술이자 미학으로 승화된다. 모던하면서도 퇴폐적인 무대는 비극을 내포한다. 세 작품은 세 가지 색 옐로우, 블랙, 레드로 요약된다. 가장 돋보이면서도 불안한, 태양처럼 환하면서도 경고의 의미를 지닌 옐로우는 '젊은이와 죽음'의 여인이 입은 드레스, '아를르의 여인'의 배경과 프레데리가 몸을 던지는 창틀에서 상징성을 얻는다. 강렬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치명적 레드는 '젊은이와 죽음'의 배경이 되는 방, 천장에서부터 침대를 아우르는 유일한 원색으로, 카르멘의 화려한 무대장치로 강렬함을 전한다. 속을 알 수 없는 블랙은 직접적 죽음을 암시, 프레데리와 비베트의 공간, 카르멘과 돈 호세의 일관된 색으로 미지의 세계를 선사한다.
결혼식은 곧 장례식이 된다. 환희가 절망으로 치닫는 것은 순간이다. 모두가 행복해야할 의무를 지닌 결혼식에서 당사자 프레데리의 표정만이 시종일관 어둡다. 아를르의 여인을 그리워하는 남자무용수는 단 한순간도 웃지 않는다. 고뇌가 그의 얼굴을 짓누른다. 애절한 비베트와 공허한 프레데리는 서로를 바라보나 시선은 결코 마주쳐지지 않는다. 그 교차의 안타까움은 그들의 2인무가 아름다울수록 슬프다.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아를르 지방의 풍경은 아슬아슬한 프레데리의 그리움처럼 서정적이며 불안하다. 두 감정의 공존이 평행을 이루며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프레데리를 원하는 비베트의 몸짓과 그녀에게 다가가야 함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프레데리의 춤은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둘만의 공간은 첫날밤의 판타지를 자극할 그 무엇도 없이 오직 검을 뿐이다. 초조하게 빛나며 내내 함께하던 태양도 모습을 감췄다. 이미 어둠이 그들을 삼켰다. 절정의 마지막, 휘몰아치는 음악과 프레데리의 제어되지 않는 절규의 행위가 모든 것을 압도,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궁극의 전율을 선사한다. 끝까지 살아남은 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를르의 여인과 죽음이다.
무채색의 무대는 표정이 없다. 정제돼있고 끝없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방에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의 정체성은 그저 혼란과 고독이다. 묘기에 가까움 춤을 선보이는 이 무용수는 단단하며 흐트러짐이 없다. 그의 몸에는 철학이 담겨있다. 이어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는 단 하나의 문이 열리며 노란 원피스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차림새와 동작은 비현실적이며 신경질적이다. 애원하는 남자를 끊임없이 밀쳐내는 여인은 차갑다. 인간의 본질적 상실감과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재의 순간들이 20분 동안 젊은이의 방황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된다. 이 상실 외에는 무표정, 무감각한 '젊은이와 죽음'과 달리 배경음악 파사칼리아의 C단조, BWV 582는 자신만의 색채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젊은이가 죽은 후 방이 사라지면 모두가 잠들어 잊힌 네온만이 초라하게 밝히고 있는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에게 무관심하고 어두운, 삭막한 도시 위로 남자와 그만의 죽음이 사라진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의 카르멘은 단연 돋보인다. 요란하게 떠들지 않는 카르멘의 농축된 표현이 세상을 유혹한다. 그녀의 선택을 받은 돈 호세 역시 더 이상 연약하지 않다. 유연하며 섹시하다. 은밀한 탐색의 과정은 단 한 번의 터치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화려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무대는 한없이 검은 두 남녀의 치명적 매력을 부각시킨다. 현대 미술을 보는 듯한 시각적 탁월함이 분위기를 압도, 이를 배경으로 이뤄지는 카르멘과 돈 호세의 외설적이고도 아름다운 춤은 신세계를 선물한다. 그 짜릿한 찰나의 순간이 비극을 더욱 비극답게 만든다. 돈 호세는 카르멘을 찌르며 완벽한 상실을 맞이한다. 그 처절한 죽음은 서사의 힘과 롤랑 프티만의 미적 구도가 드러난 무대, 끊임없이 절제하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무용수들의 동작에 힘을 입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공간을 침범한다. 관객은 익숙하나 낯선 카르멘의 비극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정교하게 짜인 동작의 연결은 감정의 흐름을 더욱 탄탄히 받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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